나 빼고 다 젊은이 352화
제352화
이건명과 두 여신의 오랜 싸움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당연하겠지만 승자는 이건명이었다.
후에라와 카디야는 가진 신력을 모조리 끌어다 썼고, 결국 본신이 가진 신력을 모두 소모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두 여신은 처량하게 아틀란 해에 몸을 맡긴 채 심해로 가라앉았다.
두 여신의 몸이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바닷물이 치솟으며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순간 이건명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아래에 있는 깊은 심해엔 아틀란티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아틀란티스엔 스토리상 유피테르의 형제라고 할 수 있는 넵튠이 있었다.
이미 자신도 금제가 풀렸기 때문에 넵튠 또한 지금쯤 깨어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NPC니까 잘 구슬리면 되겠지.'
두 여신을 아예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아직 이건명은 강재성 박사가 넵튠의 몸에 의식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몸을 먼저 추스르는 것을 생각하였고, 찬찬히 신력을 회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직 가진 힘을 모두 되찾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한 것보다는 싸움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시간을 너무 끌었어."
태초의 3신이라고 하나, 그 역시 가진 신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제법 막대한 신력의 소모가 있었고, 당장 어딘가에서 쉬며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방금 바다에 떨어져 잠든 여신들의 꼴이 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건명은 아쉽다는 듯 혀를 쯧 차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을 하나 불러서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 곧장 하얗던 구름은 잿빛으로 물들며 먹구름이 되었다.
그런 먹구름에선 천둥 번개가 연신 번쩍였다.
쿠르릉!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와 함께 이건명의 신형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구름에 올라탄 그는 곧장 서쪽에 있을 헤스페리데스로 움직였다.
이건명은 구름 위에서 가이아의 혼을 담은 성배를 꺼내 그것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혜연아….'
사실 이건명이 금제에 걸려 곧장 인간계를 쫓겨난 이후.
그는 로그아웃하여 당시 유니온 본사 지하 연구소에 있는 화면으로 모든 정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가이아가 헤스페리데스에서 황금 사과나무로 변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고, 그녀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건명은 다시 재접속해 천궁 부근까지 올라온 가이아의 혼을 천궁의 깊은 심처로 인도해왔고, 그렇게 오랜 세월 신들을 속여 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강재성…."
이건명이 이마의 힘줄을 드러내며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당시 강재성 박사는 아크스타의 개발을 끝내고 클로즈 베타 또한 완벽하게 끝내 놓은 상황이었는데, 3개월 후에 있을 오픈 날짜만 앞두고 쉬는 중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이건명의 호출에 의해 지하 연구소로 불려갔고, 이건명은 강재성에게 자신의 야망을 숨기며 가이아를 되살릴 방법을 그에게 물었다.
강재성은 흩어진 판도라를 모아 황금 사과나무를 약화시키고 혼을 집어넣으면 좀 더 쉽게 부활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이아가 약해질 수 있으니, 자신이 가진 마스터키로 하루만 시간을 주면 해결해 보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의 이건명은 그 말을 굳게 믿었다.
"네놈이 그리 장난질만 치지 않았어도 이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을…."
허망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이건명의 한숨이 깊게 이어졌다.
설마, 그 하루 사이에 강재성이 마스터키로 자신이 자행했던 불법적인 실험의 데이터를 몽땅 빼돌리고, 잠적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을 보내 그를 오래도록 쫓았으나, 결국 강재성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가이아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고, 당연히 마스터키 또한 행방불명되었다.
아크 스타에 다시 접속했을 땐, 강재성이 서버의 시간을 강제로 빠르게 흐르게 하여 무려 5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버린 뒤였다.
이건명은 하는 수 없이 지금과 같은 계획을 세우며 그대로 게임의 오픈을 준비했다.
[오셨습니까. 주군.]
순식간에 헤스페리데스에 도달한 이건명이 먹구름에서 내려와 부복한 루시퍼의 뒤편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이건명은 쓸쓸하고도 고독한 눈으로 나무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고는 천천히 루시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노고가 많았다. 너의 공이 결코 적지 않으니, 내가 만들어갈 세상에서 너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루시퍼가 말없이 한 번 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명은 그런 겸손한 루시퍼가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곧 다시 보게 될 거요.]
그렇게 말한 이건명이 천천히 성배에 있던 가이아의 혼을 나무를 향해 옮겼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아틀란 왕국, 수도 메테우스.
그 시각.
메테우스의 모든 유저와 NPC들은 상공에 나타난 헤카티아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공간 이동으로 모두를 이곳에 이주시킨 장본인이며, 힘을 합쳐서 유피테르를 막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NPC들은 그런 헤카티아나의 출현에 마음을 다 잡으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문제는 유저들이었다.
그들은 헤카티아나의 말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당장에 유니온에서도 절대 게임 속에서 죽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지금 메테우스의 의견은 정확히 반으로 갈리고 있었다.
헤카티아나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쪽과 지금은 그저 사려서 로그아웃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7:3으로 후자의 의견이 더 앞서는 상황이었다.
[여신 퀘스트 – '헤카티아나의 성전 선언'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미도 또한 마침 눈앞의 메시지를 접하며 퀘스트 내용을 훑는 중이었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모든 유저들에게 뜬 것이었고, 당연히 내용은 다 같이 힘을 모아 유피테르와 쳐들어 올 마왕군을 무찌르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치르는 희생에 비해 얻는 보상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크 대륙의 평화라…."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퀘스트 창을 보고 있는 모두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어렸다.
평화는 참 좋은 말이지만, 당장에 유피테르와 마왕 연합군이 쳐들어와 죽는다면, 평화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미도 또한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상공에선 여전히 헤카티아나의 일장 연설이 진행 중이었다.
그녀는 따르지 않겠다면 힘을 써서 강제로라도 따르게 하겠다고 외치는 중이었다.
[달과 마법의 여신 '헤카티아나'의 일장 연설을 통해 아틀란 왕국의 치안이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강도, 살인, 폭력. 기타 등등을 일삼는 불온한 무리들이 여신의 말에 굴복합니다.]
[아틀란 왕국 소속 백성들 중 절반이 병사로 징집되길 희망합니다.]
"……."
미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장에 다급한 화두로 떠올랐던 치안 유지와 폭동들이 헤카티아나의 등장 하나로 해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힘이 전쟁을 억제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미도는 눈앞에서 당장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드드드드-!
갑자기 대륙 전체에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 일장 연설을 펼치며 인간들을 선동하던 헤카티아나도 같은 진동을 느끼고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 진동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감지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헤카티아나가 불길함을 느끼는 그때.
아크 대륙에 있는 모든 유저에게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World. 창조와 파괴의 신, '가이아'의 부활까지 앞으로 15일 남았습니다.]
* * *
그 무렵. 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따라 죽은 자들의 땅이라 불리는 대륙에 도착하였다.
[최초로 명계(冥界)에 발을 디뎠습니다.]
[당신은 최초로 죽은 자들의 땅을 산채로 밟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당신의 살아있는 영혼을 탐하려 할 것입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
나는 말없이 명계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하이에나가 생태계를 파괴한 삭막한 아프리카의 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어떤 살아있는 기척이 하나도 없었고,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치 깊은 어둠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와보는 명계를 두리번거립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2명계의 삭막함에 미간을 찌푸립니다.]
"여기가 명계인가."
"그렇다. 따라와라."
나는 정체불명의 남자의 뒤를 따랐다.
처음 와보는 명계였기에 주변엔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명계라고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간간이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선인장처럼 가시가 있는 식물 몇 개가 보일 뿐이었다.
놀라운 건 아까 검은 바다에서처럼 주변이 온통 검은색 투성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눈앞의 그에게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온 검은 바다와 명계의 상관관계에 대해 물었다.
혹시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성 물음이었다.
"바로 보았다. 이곳과 우리가 건너온 시간의 바다는 모두 명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여긴 명계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지."
"지름길이라고?"
"본래라면 모든 영혼들은 송화산에 자리한 영혼의 미궁으로 모여들어 그곳에서 줄을 서서 들어간다. 나는 지금 특별한 명을 받고, 그대를 데리러 온 것이고."
[제3사도, '아틀라스'가 헛기침을 합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아틀라스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하긴 영혼의 미궁을 지키는 수문장이 아틀라스이니, 같은 직장 동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그럼 그대는 플루토의 부하 같은 건가?"
"…지금은 그렇다."
지금은 그렇다라니.
무슨 말이 저래.
그럼 옛날에는 아니었다는 거야 뭐야.
하여간 수상쩍은 놈인 것만은 틀림없구만.
음, 이건 특이하게 생긴 꽃이네.
"만지지 마라!"
"……!"
순간 나는 흠칫거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 놓인 신기하게 생긴 검은 꽃 하나를 만지려 했는데, 그만 혼나고 만 것이다.
목소리만 들어보면 나보다 어린놈 같은데, 이상하게 반박을 할 수 없단 말이지.
"크흠. 미안하다."
"그걸 만지면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 생긴다. 가급적이면 이곳에 있는 그 어느 것도 가는 길에는 만지지 마라. 잘못했다간 이곳에 잠들어 있는 버려진 영혼들이 냄새를 맡고 그대를 노릴 테니까 말이야."
나는 목울대를 꿀꺽 삼키고는 곧장 검은 꽃에서 멀어졌다.
이곳에서 비명횡사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 사막을 지나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동굴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우리들은 다시 말없이 그곳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얘기한 것처럼 어느 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다.
"다 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드넓은 대전처럼 꾸며진 공동.
정체불명의 남자는 곧장 어딘가를 향해 작게 예를 취했다.
"데려왔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나른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그 속에 숨어있는 강단과 포근함이 어린 듯한 어조를 듣는 순간.
내 몸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침 옥좌와도 같은 곳에 있던 흑의를 입은 듯한 여인이 나풀거리는 어둠을 입은 채 사뿐하게 내 앞에 내려앉았다.
죽은 자들의 땅인 명계의 지배자.
어둠과 죽음의 신이라 불리는 플루토.
그리고.
[어서 와요. 오랜만이죠…?]
"…서, 선영아. 정말 당신이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 유선영이 생생하고도 앳된 얼굴로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나예요.]
"오오, 믿을 수가 없구만. 여보!"
나는 유선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