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1화
제351화
라그나로크에 숨겨진 비사는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적인 줄 알았던 플루토는 사실 아군이었고, 아군인 줄 알았던 유피테르는 무시무시한 흉계를 숨긴 적이었으며, 거기다 가이아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인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건 가이아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던 아내가 실은 어둠과 죽음의 신인 플루토였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강재성이 넵튠이었고, 이건명이 유피테르임을 알았을 때보다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배신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이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는 떠오른 화면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엔 온통 아내인 유선영의 젊은 시절과 같은 얼굴을 한 어둠과 죽음의 신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보았고, 지금 화면엔 서로 대치 중인 플루토와 유피테르가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아래에서 대전쟁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눈길 하나 주지 않으며 상공에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죠? 혜연이는 당신이 이러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녀의 결정은 모두 당신을 위한 결단이었다구요.]
혜연이? 대체 혜연이가 누구지.
[흥. 그런 핑계로 내 힘을 세상 곳곳에 흩어버린 것이겠지. 난 그저 원래의 힘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 가이아, 아니 혜연이는 그런 내가 두려웠던 게야. 힘을 되찾고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한 내 모습을 보게 되면 그녀도 결국엔 포기하고 내게 다시 마음을 돌리고 말 거다.]
아무래도 가이아의 얼굴을 한 여인의 이름이 '혜연'인 것 같다.
지금 이건명이 하는 말로 봐서는 그녀와 이건명도 무척이나 가까운 관계인 것 같았다.
아니, 두려워한다고 했으니 그건 또 아닌가?
[왜 혜연이가 당신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가요. 그녀는 당신이 가이아의 힘을 갖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요.]
[흥,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것이지. 그녀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혜연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군요. 그래서 알렉서스를 이용한 건가요? 당신이 가진 하늘의 힘을 되찾기 위한 그릇으로 삼기 위해? 그렇게 그를 궁좌로 만들어 다시 그 힘을 취할 생각이었나요?]
[호오.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니 놀랍군. 꽤 화난 모양이야. 하긴, 알렉서스를 창조해 달라고 혜연이에게 부탁한 것이 너였지.]
놀라운 말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알렉서스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은 가이아가 아닌, 아내의 얼굴을 한 플루토였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알렉서스가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내는 외로웠을 것이었다.
죽고 난 뒤에도 이곳 세상에서 나를 잊지 못해 가이아에게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NPC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추측을 이어갈 겨를도 없이 누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바로 아틀란의 왕.
날씨 요리사 알렉서스였다.
그는 지금 작은 구름을 밟으며 도약해 상공에 떠올라 있었다.
[알렉서스….]
[플루토시여, 그만 물러나십시오! 당신이 퍼트린 죽음의 힘이 인간계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더 큰 위협이 다가 오고 있어요.]
이어지는 것은 저번에 프로메테우스가 보여준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알게 되고 나서 다시 보게 되니 무척이나 다르게 보였다.
그때. 가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가이아의 상태가 좀 이상해 보였다.
[혜연아, 왜 그래! 정신 차려!]
혜연이라고 불린 가이아는 마치 무언가에 조종을 당하는 것처럼 붉은 눈을 한 채 다짜고짜 아내를 공격했다.
그 사이로 웃는 것은 이건명뿐이었다.
아내는 그것이 이건명이 꾸민 짓임을 알게 되었다.
[대체 혜연이에게 무슨 짓을… 끄흑!]
그러나 아내의 말은 묻히고 말았다.
가이아가 곧장 힘을 발산하며 아내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알렉서스가 그녀의 몸에 치명상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커흑!]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앞의 아내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미 두 손은 꽉 쥐어진 지 오래였다.
아내가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판도라를 움켜쥔 것은 그때였다.
쩌적.
살짝 힘을 주자 거머쥔 판도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그만두지 못할까!]
놀란 이건명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커졌고, 아내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건명을 분한 듯 노려보았다.
이건명이 왜 저렇게 놀라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혜연이를 봉인하겠습니다.]
[어이, 그러면 넌…!]
[전 그저 가진 힘 중 하나를 잃을 뿐입니다. 그 대가가 커도 어쩔 수 없지요. 전 인간으로 죽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혜연이가 제게 부탁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막아달라는….]
[이런 멍청한!]
파창-!
그와 동시에 판도라가 깨어지며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검은 유성이 세상에 흩어지는 것과 같은 장관을 이루었다.
이건명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아내는 명계로 돌아감과 동시에 알렉서스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렸다.
그것은 이건명이 알렉서스에게서 하늘의 힘을 빼앗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임시방편과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알렉서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네 이녀어어언-!]
노기 서린 이건명의 음성과 동시에 아내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러나 이미 아내는 명계로 돌아간 뒤였다.
알렉서스는 차가운 시체가 되었고, 이미 혼은 명계로 가버린 뒤였다.
이건명은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히더니 아내가 도망친 자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가이아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건…. 난 왜 여기에 있죠?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설마, 악과가 깨진 건가?]
가이아는 천천히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전지전능함은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데 이르렀다.
그녀가 가진 능력으로 과거를 훑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선영이가 악과를 깨트린 걸 보니, 결국 내 예상대로 당신이 야욕을 드러냈군요.]
[아니, 혜연아 그게….]
[여보.]
여보…?
설마, 저 혜연이라는 여자가 이건명의 아내였단 말인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처음 튜토리얼을 했을 때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물론, 알렉서스가 내 젊은 시절의 얼굴을 했으니 친숙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당신을 막아야겠어요. 그게 당신을 위한 일이니까.]
[아니, 혜연아. 여보!]
[미안해요.]
그와 동시에 가이아가 인간계에 금제를 거는 광경이 이어졌다.
그녀는 다시 이건명과 신들이 인간계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금제를 펼쳐 동서남북의 사계절 성좌들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이올로스가 죽은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난감을 표하며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세 성좌에게 목숨을 담보로 금제를 지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완전한 불사의 힘을 얻었다.
"……."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 비슷했다.
가이아는 스스로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남은 일을 하였고, 선과인 스타 프루츠를 세상에 흩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였다.
프로메테우스를 내가 먹었던 스타 프루츠에 봉인하며 크로노스에게 맡겼으며, 그렇게 모든 일을 차례대로 마친 그녀가 찾은 곳은 내 눈에도 익숙한 곳이었다.
"헤스페리데스…?"
왜 저기를 찾아간 거지?
[가이아 님을 뵙습니다.]
헤스페리데스의 세 자매.
아이글레, 에리테리아, 라레투사가 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갖췄다.
[고개를 들거라. 난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어 온 것이란다.]
세 자매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듯했지만, 가이아의 말을 들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마지못해 가이아의 부탁을 승낙했다.
가이아는 이곳에 육신을 봉인할 것인데, 그녀들에게 지켜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 엄청난 부탁을 갑자기 받으면 나라도 한 번은 거절했을 터다.
그래도 가이아가 하는 부탁이니만큼 결국은 강제로 받아들이고 말았으리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저희가 가이아 님을 지켜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셔요!]
당시 세 자매는 아직 어렸다.
그렇기에 가이아는 그녀들을 위해 '라돈'이라는 잠들지 않는 용을 선물하였다.
힘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에, 더 강력한 용을 선물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가이아가 선물한 은종은 라돈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가이아는 세 자매에게 은종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요긴하게 쓸게요.]
[또 다른 선물은 없나요?]
마지막 아이글레의 순수한 물음에 가이아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글레는 에리테리아와 라레투사에게 무례하다느니, 멍청한 질문은 하지 말라느니, 하는 잔소리를 듣곤 했다.
아이글레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양 볼을 한가득 부풀렸다.
가이아는 그저 미소 짓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주변 땅의 생기가 넘쳐나는 것이 자신이 잠들기엔 무척이나 아늑한 곳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잠들 곳을 정하였다.
그리곤 라돈을 주변에 세우고 지키게 한 뒤, 세 자매에게 자신이 이곳에 잠들어 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연히 세 자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리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감은 가이아의 몸이 나무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순간.
헤스페리데스에서 보았던 어떤 것이 겹쳐지며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금 사과나무…!"
가이아는 생기를 잃어가는 듯 마침내 커다란 사과나무가 되었고, 나무가 된 가이아는 황금 사과를 열매로 맺었다.
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저곳에 저런 비밀이 있었을 줄은…."
그때. 가이아의 영혼으로 추정되는 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영혼이 어찌 되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상이 끊어졌다.
"……."
나는 그만 멍하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충격적인 일을 갑자기 겪다 보면 가끔 멍해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그때. 정체불명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 나는 아직도 배 위에 올라타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보다 갈 시간이라고?
"어디로 간다는 거지?"
"죽은 자들의 땅."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눈앞에 어두운 포탈이 열렸다.
그 너머로 느껴지는 귀기와 넘실거리는 탁한 기운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플루토 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
"바로 뵈러 가겠나?"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