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0화
제350화
아틀란 왕국, 수도 메테우스.
미도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넓은 대전에 모여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은 하나 같이 무시무시했다.
마이클과 데미안이 이끄는 제우스 길드는 물론이고, 견소룡이 이끄는 무림 길드도 있었다.
작년 월드 대항전에 참가했었던 다양한 스타 프루츠 능력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최근 오르카 왕국이 멸망의 길을 걷고, 아틀란 왕국의 상승세가 가파른 것을 보며 미리 시민권을 따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였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말하자면 아틀란 왕국에서 가장 힘 있는 유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회의를 주관하는 것은 아틀란 왕국의 왕손녀의 신분으로 가장 상석에 앉은 미도였다.
그녀의 좌우엔 백무열과 레슬리가 팔짱을 낀 채 고압적인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고, 그 탓에 그곳에 모인 이들 또한 미도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백무열과 레슬리의 실력과 성격을 잘 아는 탓이었다.
아마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 거슬리는 짓을 했다간 양옆에 영감들이 눈을 부라리며 죽일 기세로 달려들 게 뻔했다.
"헬레나님. 할아버지의 실종과 관련해서 얻은 정보는 아직 없나요?"
"네. 아르고스의 조직원을 동원해 대륙 곳곳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폐하에 대한 단서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수장이신 조셉님 또한 함께 실종되신 상태입니다."
조셉이 아르고스의 수장임을 드러낸 건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아예 이곳 아틀란 왕국으로 아르고스의 아지트를 이전했고, 온전히 아틀란 왕국의 사람이 되어 활동을 해왔다.
'할아버지….'
미도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최근 일어난 일들도 그렇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미도는 금세 냉정을 되찾고는 애써 다른 안건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혹, 로그아웃에 성공했다는 사례를 들으신 분 있나요?"
그런 미도의 말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미도는 "역시."라는 말과 함께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앞의 유력자들에게 지금 벌어진 로그아웃 불가 사태로 인해 일어난 여러 가지 소요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가장 심각한 건 갑작스레 일어난 폭동이었다.
"현재 아틀란 왕국의 치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불사의 인간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로그아웃이란 것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 공포감에 적응하지 못해 폭동을 일으키며 살인이나 강도짓을 일삼는 이들이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서 설명해준 헬레나의 말에 미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앞의 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처럼 강하지도 않고, 레벨이 높거나 가진 아이템이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할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왕족이 되었을 뿐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급한 상황이에요. 다들 수정구슬로 바깥소식을 들으셨겠죠?"
그런 미도의 물음에 눈앞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로그아웃 불가 사태에 유니온에선 긴급한 사과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최대한 지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며,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에게 적합한 사례를 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유니온에서는 지금 게임 속에 접속해 있는 유저들에게 강제로 로그아웃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캡슐과 연결된 뇌에 과부하가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였다.
사실 숨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미 로그아웃 불가 사태가 일어난 지 하루가 되자마자, 게임을 즐기던 전 세계의 유저 중 수천 명이 대거 사망하고 만 것이다.
유니온에서는 이와 같은 사상자가 늘지 않도록 미리 막기 위해 재빨리 성명을 발표해 유저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고, 그것은 절대 게임 속에서 죽지 말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게임에서의 죽음은 곧 현실의 죽음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절대 같은 유저끼리의 살인은 안 돼요. 폭동은 최대한 힘으로 굴복 시키되 목숨은 빼앗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유피테르와 여신들의 싸움이 이제 막바지에 들었다고 들었어요. 다들 유니온에서 보여준 동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미도가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피테르가 이길 게 틀림없어요. 우린 그런 유피테르를 막기 위해 힘을 하나로 합쳐야만 해요. 더 이상의 사상자는 나와선 안 돼요."
유니온에서 뉴스를 통해 보여준 것은 아틀란 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두 명의 여신과 유피테르의 싸움이었다.
게임 속에 있는 유저들은 수정구슬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제 싸움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머지않아 끝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런 여신들이 무려 하루나 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럴 때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쳐야했다.
"큰일 났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거늘."
레슬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갑자기 들어온 기사에게 노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며 꾸짖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조차 개의치 않는 듯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바깥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보아라."
"그것이…. 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기사의 말에 미도 또한 이상함을 느끼고는 이참에 다같이 나가보자고 눈앞의 이들에게 말했다.
미도와 일행은 함께 왕성의 높은 곳에서 커다란 아틀란 왕국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곳엔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저건 북극의 수인들이잖아?"
"어떻게 이곳을 건너온 거지?"
"원래 저들은 북극에서만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기 좀 봐! 마녀와 마법사들도 있어!"
다수의 하얀 빛이 또 한 번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곳에서 나타난 건 다른 대륙에서 살고 있는 각지의 인간들이었다.
함께 있던 박막순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쟤들 다 공간 이동을 통해 온 것 같은디. 누가 이런 고도의 공간 이동 마법을 쓴 거지? 이 정도 규모라면 대마법에 준해서 내 성좌도 가진 마력을 다 쓰지 않으면 무리일 건디…."
그녀의 말과 동시에 갑자기 하늘에 거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달과 마법의 여신인 헤카티아나였다.
* * *
심해 도시, 아틀란티스.
레비아탄은 태초 신인 넵튠의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나 트라이던트를 되찾은 넵튠의 강력함은 유피테르와 비견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넵튠은 본디 유피테르와 형제로 설정된 NPC였다.
[분하구나. 나의 대계가 이리 허망하게 무너지는가….]
그것이 레비아탄의 마지막 말이었다.
강재성은 레비아탄의 가슴에 박힌 트라이던트를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함께 싸운 인어들이 긍지 높은 함성을 토해내며 위대한 넵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강재성은 곧장 클리메네와 데우칼리온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친 자들을 치료하고 다시 출병할 수 있도록 군대를 꾸려라.]
[출병 날짜는 언제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데우칼리온이 멀어졌다.
강재성은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 게임 속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그다.
비록 이곳이 가상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손자가 저리 늠름한 모습을 보이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가상이긴 하지만 자신의 딸인 클리메네는 어떤가.
여왕으로써 군림하지 않고 다친 이들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궂은일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과연 아틀란티스의 여왕다웠다.
[…이게 애 키우는 보람인가. 나 참.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설마 게임 속에서 먼저 가족을 만들게 될 줄이야.]
아크 스타의 개발을 위해 청춘을 바치느라 짝을 만나지 못했던 강재성이었다.
그에게 곧 아크스타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크스타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체하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빨리 군사를 모아 육지로 진격해야 했다.
이건명을 막지 못하면 정말 모든 게 끝이었으니까.
그의 인생도, 목숨도. 그리고 자신의 가족인 클리메네와 데우칼리온도.
[음? 이 기운은….]
그때. 강재성이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에게서 어떤 옅은 기운을 느꼈다.
물고기들의 몸에 묻어 있던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가볼 필요는 있을 것 같군.]
강재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닷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치 총알과도 같은 움직임이 잔상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아래에 남은 인어 병사들이 마계의 피라냐를 정리하는 광경이 이어졌다.
* * *
한편, 검은 파도에 집어 삼켜졌던 나는 다시 잔잔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애초에 덮쳐온 파도에 황금빛 시계가 그려져 있었던 건 지금 내가 차고 있는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에 숨겨진 의지가 발현된 것이었다.
"이건 오르카 왕국의 건국 일대기인가. 볼 필요는 없겠군."
나는 손에 쥔 시간의 잔재를 그대로 다시 제자리로 던졌다.
금빛 시간의 잔재는 물 위에 둥둥 떠오른 채 떠내려갔다.
현재 나는 '시간의 바다'라는 곳을 건너는 중이었는데, 온통 뿌연 안개 속에서 여러 시간의 잔재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것들을 부수게 되면 당시와 관련된 것들이 눈앞에 떠올라 생생하게 내게 전해준다고 지금 눈앞에서 노를 젓고 있는 남자가 말해주었다.
그 정체불명의 남자는 무척이나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단박에 그의 얼굴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노를 저을 뿐이었고,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멈출 때마다 시간의 잔재를 가늠하며 보고 싶은 과거를 찾아다녔다.
강재성이 말하길 이곳에서 진실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아직 나는 진실의 끝자락도 찾질 못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갔을까.
갑자기 노를 젓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바로 옆에 있는 시간의 잔재를 보며 흠칫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이건 그대가 봐야 할 것 같군."
"……."
나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게 호의적으로 보였기에 오랜 세월 살아온 노인의 감을 믿는 것이었다.
"음."
나는 옆에 있는 시간의 잔재를 거머쥐며 정보를 확인했다.
그것은 라그나로크와 관련된 숨겨진 비사였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거머쥔 시간의 잔재를 손아귀에서 터트렸다.
시간의 잔재는 마치 빨리 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 내 눈앞엔 라그나로크의 참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벌어지고 있었다.
"……."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나는 놀라움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까 강재성이 말한 대로, 유피테르. 아니, 이건명이 왜 적이었고, 플루토를 왜 아군이라 불렀는지를 실감 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무척이나 무겁고, 또한 잔인하며,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보…?"
플루토는 아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