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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348화 (348/375)

나 빼고 다 젊은이 348화

제348화

여왕이 죽었기 때문인지 함께 왔던 헤커트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당연히 반격이 시작될 차례였다.

마침 아래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어들은 나를 따르라!]

데우칼리온의 우렁찬 함성에 힘입어 인어 병사들이 뒤이어 한바탕 칼부림이 벌어졌다.

푸른 바닷속은 이미 붉은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수만의 헤커트와 여왕을 잃어버린 레비아탄이 잠자코 있던 입을 열며 포효했다.

[넵튠! 또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냐!]

피를 좋아하는 레비아탄의 본능이 깨어난 탓에 그의 눈은 무척이나 붉게 번들거렸다.

[넌 언제나 평화를 지킨다는 명목을 앞세웠지! 난 네놈이 싫었다. 어찌하여 그 힘을 가지고도 약한 이를 잡아먹거나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거대한 레비아탄의 몸에서 붉은 기운과 검은 기운이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고난 마왕의 권능 중 하나인 질투의 권능과 바다의 심연에서는 블라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심연의 권능이었다.

그리고 그런 질투의 권능에 감화되어버린 인어 병사들이 같은 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 왜 이렇게 잘 생긴 거야! 재수 없게!"

"뭐? 그런 너는 왜 이렇게 못생긴 건데!"

"난 언제나 상관인 당신이 마음에 안 들었어!"

효과는 발군이었다.

질투의 힘은 얼마 남지 않은 헤커트들을 공격하려던 인어 병사들의 기세를 한순간에 누그러트렸다.

이어진 것은 레비아탄의 검은 아쿠아 브레스였다.

그것은 수룡 블라쉬의 맑은 아쿠아 브레스와는 확연히 다른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콰아아아-!

길게 압착된 수압이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곧게 뻗어 나가 인어 병사들이 있는 곳에 닿으려 했다.

그곳엔 클리메네와 데우칼리온도 있었는데, 강재성은 재빨리 헤엄쳐 트라이던트를 휘둘러 쳐 궤도를 비틀어 버렸다.

쩌엉! 쿠구구궁-!

궤도가 비틀어진 검은 아쿠아 브레스가 엄한 바닷속 산호초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하나를 붕괴시켰다.

위력에 흡족한 레비아탄이 길게 입꼬리를 올렸다.

[흐하하하! 과연 넵튠이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받아보아라!]

무언가 일그러지는 느낌과 함께 괴기스런 감각이 전신을 감싸는 듯했다.

강재성은 차가운 한기에 가까운 오싹함을 느끼며 레비아탄의 뒤편 너머의 공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레비아탄의 말이 이어졌다.

[마계 또한 바다가 존재하지. 피로 얼룩진 붉은 바다엔 마계의 피라냐들이 서식하고 있다. 막을 수 있으면 한 번 막아보아라.]

[어, 이건 내가 개발한 적이 없는데….]

레비아탄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편에서 소환된 마계의 붉은 바다에서 피라냐들이 무서운 속도로 넘어와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가 무려 수십만에 이르렀다.

[자, 다시 한번 붙어보자. 아틀란티스의 떨거지들아!]

레비아탄의 몸에서 얼음 가시가 분출됨과 동시에, 그가 가진 8개의 심연의 촉수가 빨판을 자랑하듯 아틀란티스의 인어 병사들을 하나씩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마계의 피라냐가 피보라를 일으키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혼돈이었다.

* * *

한편, 나는 강재성이 말했던 비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도대체 이 비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거야 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비석의 이름은 '약속의 비석'.

강재성이 말하길 어둠과 죽음의 신 플루토와 그가 맺은 모종의 약속을 상징하는 징표가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기에 플루토와 강재성이 약속을 맺은 것일까?

그동안 나는 플루토를 무찔러야 할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정작 강재성은 그를 아군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으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여기 적힌 선택받은 자는 분명 어르신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죠. 약속을 깨트리란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함께 있던 조셉이 비석을 이리저리 만지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그로서도 강재성이 이곳으로 데려온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강재성이 NPC였기에 귓속말도 되지 않았다.

난제도 이런 난제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님한테 좀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네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 불찰이에요."

조셉이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시간이 촉박했지 않냐."

"그래도요."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나는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며 눈앞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새겨진 글자에서는 하얀빛이 새어 나와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의 바다를 건너 죽은 자의 땅으로 가고자 한다면 오래된 약속을 깨트려라. 하지만 그대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평생 죽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리라…."

섬뜩한 문구였다.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평생 죽음과 함게 살게 될 것이라는 저주 아닌 저주였다.

만약 내가 건너갔는데,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평생 죽음의 노예가 되어야만 하는 거다.

"내가 선택받은 자가 맞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게 말이야. 막상 갔는데. 거기 있는 사람이 난 선택 받지 않았다고 부정하면 무안하잖냐. 정작 난 죽음의 노예 같은 거 되기 싫은데 말이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구만."

"하하하. 어르신도 무서운 게 있으셨군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두렵다마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말 그대로다.

당장의 내겐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당장에 아틀란 왕국의 백성들도 그렇고, 가족들과 새롭게 사귄 친구들 또한 그렇다.

지금 당장 이곳 세계와 현실 세계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만 있을 순 없는 거다.

"지켜야 할 것들이라…. 왠지 공감 가는 말이네요."

조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웃음을 살짝 지어 보였다.

저 녀석 보나 마나 쌍둥이들과 아내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간 의외로 가정적인 녀석이다.

"그나저나 시간의 바다와 죽은 자의 땅이란 건 분명 무슨 장소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 '약속을 깨트려라.'라는 말은 대체 뭘까요? 분명 이게 제일 중요한 단서 같은데요. 도대체가 수수께끼도 아니고…."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

또다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옅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몇 번 느끼곤 했었는데, 이것은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지진이었다.

심지어 이곳을 지탱하는 땅이 쩍쩍 갈라지는 게 아닌가.

"어르신, 피하세요!"

조셉의 외침과 동시에 땅이 쩌적거리며 부유물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나는 괜찮은데 정작 피하라고 소리친 조셉이 문제였다.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이 녀석아. 나보단 네 걱정이나 해라."

"하하. 좀 민망하네요."

조셉이 머쓱한지 다시 한번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던 바로 그때.

"엇, 어르신! 여기 좀 보십쇼!"

난데없이 소리친 조셉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조셉은 약속의 비석 뒤편에 갈라진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선 무언가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순간 머릿속이 번쩍거리며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강재성이 플루토와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의 징표가 이 비석이라면 혹시…."

"어르신, 무언가 알아내신 겁니까?"

"잠깐만 떨어져 있어라."

조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 나는 곧장 드레인이 만들어준 구두에 있는 기능 중 하나인 '나태한 발구름'을 시전했다.

나는 딛고 선 땅을 한 발로 약하게 내리찍었다.

쿠르릉!

옅은 지진과 함께 다시금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차례 지진이 일어난 상황이었기에, 약간의 지진만으로도 땅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노리는 것은 눈앞의 비석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쩍. 쩌적.

약속의 비석이 갈라지더니, 그 틈 사이로 검은 아지랑이들이 더욱 거세게 흘러나왔다.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약속을 깨트리라는 건 이런 말이었나."

나는 재빨리 비석의 정중앙을 발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약속의 비석이 지진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검은 돌풍이 빠르게 불어닥쳤다.

"엇, 어르신. 그런 짓을 하면…!"

하지만 조셉은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건 설마…."

그제야 내 뜻을 짐작한 조셉이 놀란 눈을 했다.

그런 그의 앞에 칠흑의 포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조셉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넌 돌아가라."

그리고는 온통 칠흑으로 된 포탈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마치 날 기다렸다는 것처럼 칠흑의 포탈은 순식간에 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 * *

또옥.

처음엔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물방울은 파문을 일으키며 점점 퍼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몸을 움찔거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들린 것은 파도 소리였다.

쏴아아!

잔잔한 듯하면서도 거칠 것이 없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허어억!"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니 이곳은 해변가였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곳의 바다가 온통 검은색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찬찬히 아까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포탈로 들어섰는데…."

나는 분명 처음 포탈로 들어섰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나를 휘감았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그것에 항거할 수 없었고,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어둠이 찾아왔었다.

아마 난 기절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떨어진 곳은 이 검은 바다의 한복판이었을 것이고, 이렇게 해변가로 떠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마치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점차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난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분명히 기절을 했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을 터인데, 지금 나는 어떻게 이곳에 살아 있는 것일까.

문득 목 주변을 만져보니 토레즈가 내게 물려준 인어의 비늘 효과도 사라져 있었다.

물에서 숨 쉴 수 있는 아가미가 사라졌으니, 더욱 살아날 확률이 없었을 터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도대체 이곳은 어딜까.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던 바로 그때.

"오랜만에 뵙습니다. 존귀하신 일곱별의 왕이시여."

무척 익숙하고도 노쇠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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