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47화
제347화
[흐음.]
루시퍼가 무심한 눈으로 네크론의 뼛조각을 내려 볼 때였다.
부서진 뼛조각 사이로 무언가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검은 아지랑이를 빨아들이는 옅은 보랏빛 구슬 조각.
루시퍼는 흥미로운 듯 턱을 매만졌다.
[호오. 녀석이 가지고 있던 죽음의 힘인가. 판도라가 그것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빨아들이는 건가 보군.]
루시퍼는 재빨리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네크론이 남긴 죽음의 힘을 판도라가 몽땅 빨아들이기 전에 자신이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상상의 실체화라는 힘을 가진 그에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슈화아악!
가공할 흡인력과 함께 루시퍼의 팔을 타고 무언가 꿀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혈관이 마치 독사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음.]
루시퍼는 고통을 가까스로 인내하기 위해 인상을 썼고, 네크론의 뼛조각들은 다시 부서졌다가 합쳐지며 루시퍼의 오른쪽 어깨에 견갑처럼 달라붙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미 루시퍼의 오른팔은 어둠과 죽음의 권능이 일부 깃든 모습이었다.
[후후후. 좋아. 마음에 드는군.]
마침내 흡수를 모두 마친 루시퍼가 길게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피더니,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며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루시퍼는 네크론이 가지고 있던 어둠과 죽음의 힘을 약간이 나마 쓸 수 있었다.
물론, 흡수한 힘은 절반밖에 되지 않고, 태초의 3신 중 하나인 플루토에 비하면 무척이나 초라하지만, 그것은 꽤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루시퍼가 다시 판도라를 주으려는 그때.
[으아아아아아아-!]
[……!]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거력이 짓누르는 압박감이 루시퍼의 머리 위로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양손을 엑스자로 교차해 막아낸 루시퍼는 재빨리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지. 아까 그 여자들인가?'
아니다.
세 자매에게 이만한 힘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녀들은 지금 저기에 버젓이 누워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제3의 인물. 설마 신인가.'
루시퍼는 재빨리 머리 위를 내리찍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나무였다.
그냥 나무가 아니고 무척이나 단단하고 거대한 나무였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잘 깎아낸 것이 무척이나 탄탄해 보였다.
루시퍼는 한낱 나무 따위가 자신을 이토록 압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곧장 이 공격을 막아낸 뒤 이루어질 후속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자신을 공격한 정체 모를 신은 아마 다른 종류의 공격도 해올 것이 분명했다.
'어떤 신이지?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다음 공격은 권능을 이용한 공격인가?'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가진 신살의 힘 앞에선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루시퍼는 속으로 어떤 신인지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각기 다른 신들의 권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때. 머리 위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더욱 강해졌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
[큭!]
루시퍼가 딛고 선 땅이 내려앉으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아니, 이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루시퍼가 이마의 힘줄을 만들어냈다.
'순수한 힘…!'
쿠아아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헤스페리데스 일대에 거대한 지진과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움푹 파인 구덩이가 생겨난 건 물론이고, 땅이 쩍쩍 갈라졌으며, 주변의 나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뽑혀나기 일쑤였다.
[허억. 성공인가…?]
그리고 그런 루시퍼를 공격한 것은 반인반신의 몽둥이 성좌.
헤라클레스였다.
그는 인간계를 내려오자마자 헤스페리데스를 찾아갔는데, 그것은 라레투사와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매일 라레투사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빌었고, 라레투사는 그런 헤라클레스에게 아버지인 아틀라스가 용서한다면 자신도 용서를 하겠다고 하였다.
헤라클레스는 곧장 아틀라스를 찾아갔고,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는 아틀라스의 꾸중을 듣던 중.
아틀라스가 갑자기 헤스페리데스가 공격받는 것 같다며 빨리 돌아가 보라는 말에 달려오던 참이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도착했을 땐 바로 이와 같은 광경이었던 것이다.
'가진 힘의 80%나 썼는데도 버텨내다니. 괴물은 괴물이로군. 과연 황도12궁의 전 대장인가.'
하지만 그런 헤라클레스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 있었다.
[쿨럭! 대단한 힘이군. 순수한 힘만으로도 이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놀라워.]
[……!]
놀란 헤라클레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흩어지는 흙먼지 너머의 그림자를 보았다.
마침내 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건 양팔이 터져 없어져 버린 루시퍼였다.
터져버린 양팔에서 진득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군. 양손이 없어졌으니 이제 저놈을 죽이는 건 시간문제겠어.'
하지만 루시퍼는 태연했다.
[…아까 이 힘을 흡수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흡!]
루시퍼가 얼굴에 힘을 주자 놀랍게도 터져버린 그의 팔에서 새로운 팔이 기괴하게 자라났다.
그것은 찰나였고, 루시퍼는 새로 자라난 팔에 적응하려는 듯 양 손목을 돌렸다.
아까 흡수한 네크론의 힘 중에는 이렇듯 잘려나간 신체도 재생시키는 힘도 있었다.
물론, 네크론은 완전한 리치화로 인해 저주를 받아,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미친.]
헤라클레스의 짧은 평이었다.
[헤라클레스. 너의 명성은 익히 많이 들어왔다. 과연 그분의 아들답군. 이토록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궁좌에 오르지 않았다니 무척이나 의문스러워. 그동안은 가진 힘을 숨기며 살았던 거였나?]
[…….]
헤라클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궁좌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힘 자체가 무척이나 강했고, 가만히 있어도 점차 강해지는 권능 탓에 이 정도 경지에 이르렀지만, 한 번도 궁좌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지금의 헤라클레스에게는 라레투사가 더 중요했다.
[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곧 넌 물러나야 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이런 얘기다.]
드드드드!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시퍼가 낮게 웃었다.
[힘을 시험하기 딱 좋은 상대로군.]
[뭐라고?]
루시퍼가 딛고 선 땅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땅들에선 갑자기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네크론이 가지고 있던 죽음의 권능을 이용해 만들어낸 언데드들이었고, 네크론이 부리던 언데드들이 그의 손에서 재현되어 순식간에 헤라클레스와 세 자매를 둘러쌌다.
[후후. 솔직히 말하면 그댄 이대로 죽이기 아까운 상대다. 기회를 주도록 하지. 결정해라. 계속 나랑 싸울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저들을 데리고 도망칠 것인지.]
헤라클레스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루시퍼와 싸우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호각을 이룰 수 있을 터.
하지만 문제는 세 자매를 보호하며 싸워야 한다는데 있었다.
아마 그녀들이 있다면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을 것이 뻔했다.
지금 헤라클레스에게 중요한 것은 라레투사를 비롯한 세자매들의 목숨이었다.
[…만약 날 쫓아온다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힘으로 널 짓이겨 버리겠다.]
[후후. 좋을 대로 해라. 어차피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 같으니까.]
[좋다. 지금은 물러나지.]
[옳은 선택이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겠다.]
헤라클레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 재빨리 라레투사, 아이글레, 에리테리아를 들쳐 맸다.
다행히 그녀들의 목숨엔 지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빨리 치료를 해야 했다.
'…서둘러 아틀라스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겠군.'
그는 공중에 떠올라 있는 루시퍼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 보내고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루시퍼는 그런 헤라클레스의 뒷모습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 * *
유니온 본사, 모니터링 실.
"필리핀의 로그아웃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로그아웃 기능도 방금 사라졌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프랑스 또한…!"
눈앞의 직원들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지금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왜 이런 일이…."
차기 유니온의 회장에 오를 예정이었던 이석준이 망연자실했다.
유민석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까 전 보았던 메시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로그아웃을 할 수 없다니. 설마 누군가 해킹을 한 건가? 우리 쪽 직원들이 손도 쓸 수 없이 당하고만 있다니. 이건 마치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유민석의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각종 프로그래밍은 물론 해커 출신의 전도유망한 인재들이 있는 이곳 유니온은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최고의 직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두각을 보이는 차진철.
그런 그에게 유민석이 기대를 모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차진철은 자신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
유민석조차도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정도.
지금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엄청난 대혼란은 물론 전 인류의 10분의 1이 15일 안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캡슐을 만들어낸 개발자가 찾아와서 말하길, 그 안에 있는 생명 유지 장치로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현실 시간으로 최대 15일이라고 하였다.
강제적인 가수면 상태로 만드는 뇌파 발생 시스템과 인체에 백해무익한 냉동 시스템은 유니온에서도 당당히 특허로 낸 바 있었다.
어쨌든 제한된 시간 안에 대책을 찾지 못하면 지금 게임 속에 접속한 이들은 모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란 소리다.
아까 전 캡슐을 강제로 열려 했다가 사망했다고 신고 받은 사례만 몇 백 건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유니온과 그 휘하 직원들은 전 인류의 공적으로 몰리게 되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유민석으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서는 공식 입장 발표와 더불어 발 빠른 뉴스 보도를 통해 더 이상의 피해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는 방법밖엔 없었다.
"제길!"
설마 이게 강재성 박사가 예고했던 그 재앙이었던 것인가!
유민석은 그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 *
심해 도시 아틀란티스.
강재성은 빠르게 물살을 가로지르며 아틀란티스 광장으로 나왔다.
과연 땅과 바다의 신다운 무척이나 빠른 헤엄속도였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강재성은 재빨리 모여 있는 헤커트 무리를 하나하나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수가 너무 많은데.]
헤커트들은 끝도 없이 몰려왔다.
더구나 마기를 머금고 있어서 인어들에게 치명적이기까지 했다.
이미 몇몇 병사들이 죽어서 힘없이 떠오른 것이 보였다.
저 멀리 클리메네와 데우칼리온이 헤커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보였다.
강재성은 곧장 그곳으로 수압을 강하게 압착시킨 공을 날려 보냈다.
그것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중앙에서 폭탄처럼 터져 순식간에 수백의 헤커트들을 몰살시켰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선 아틀란티스의 수호신이 나섰다며 사기가 충천한 인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강재성은 오래도록 넵튠으로 살면서 겪었던 일이었기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헤엄쳤다.
그러나 헤커트들의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아직 헤커트의 수는 수만 마리나 남아있었다.
[이놈들!]
그리고 그런 강재성 자신에게도 헤커트가 당장 수만 마리가 떼로 달려들었다.
마치 까만 파도가 몰려오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강재성은 눈을 좁히며 흐르는 물살 속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헤커트는 분명 처음 아틀란티스를 기획하며 만들어냈던 몬스터들이었지. 이 녀석들이 이렇게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건 조종하는 놈이 있다는 얘기다. 설마, 여왕을 데려온 건가?'
그런 강재성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 멀리 보이는 마왕 레비아탄의 뒤로 거대한 크기의 헤커트가 있는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저것은 여왕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왕을 죽이면 통제력을 상실한 헤커트들은 순식간에 흩어질 터.
그럼 단숨에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준비를 해뒀던 나도 참 대단하단 말이야.]
강재성이 태연한 표정으로 아까 최춘택에게 받은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을 오른손에 쥐었다.
사실 이 포크 숟가락에는 숨겨진 히든 피스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강재성 박사가 식물인간이 되기 전 만약을 위해 미리 숨겨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사용해야 할 때였다.
치이이익!
뜨거운 물이 손끝에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포크 창이 거머쥐어졌고, 강재성은 그것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거세게 전방을 향해 한 번 휘둘렀다.
[흐읍!]
콰아아아-!
전방으로 쇄도해 오던 헤커트들이 갑작스러운 파도에 허우적거렸다.
파도의 형상은 하얀 말을 닮아서 거대한 말 떼가 헤커트들을 짓밟으며 지나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일어난 소용돌이는 이리저리 굽이치며 그런 헤커트들을 휩쓸어 버리기 바빴다.
단숨에 수만 마리가 증발해버리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게임 할 맛이 나지.]
포크 창의 진정한 모습.
그것은 일곱 바다를 지배한다고 알려진 땅과 바다의 신인 넵튠의 '트라이던트'였다.
강재성이 곧장 해마(海馬)를 소환해 올라탔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여왕을 향해 단숨에 트라이던트를 내던졌다.
콰우웅-!
물살을 가로지르는 굉음과 동시에 여왕의 몸통이 꿰뚫고 지나간 트라이던트가 땅에 푹 박혔다.
그리고 동시에 지진이 일어나며 바다를 떨게 만들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개발자한테 까불고 있어.]
전형적인 게임 개발자의 갑질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