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39화
제339화
"하아, 알았어요. 폐하가 바꾸시라면 바꿔야죠."
헬레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누가 본다면 굉장히 불손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왕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할 생각 따윈 없었다.
허례허식 같은 것들은 이미 벗어 던진 지 오래였으니까.
"이제 준비하실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근데 무척이나 일어나기 싫었다.
조금만 더 안마 의자.
아니, 안마 옥좌에 앉아 있고 싶었다.
드드드드-!
어흐, 시원해라.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다 풀리는 것 같다.
"에잉, 좀만 더 있고 싶은데."
"안 돼요. 가셔야죠. 이 나라의 왕이시잖아요."
"끙. 난 별로 생각도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맡은 거라고. 그냥 네가 왕 하면 안 되냐?"
귀를 후비적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헬레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소리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지금 모든 백성들이 폐하를 우러러보며 몰려드는 상황이라구요. 정말 모른다고 하실 거예요?!"
"에이, 그놈의 잔소리 진짜."
지난 시간 동안 아틀란 왕국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백성들과 유저들의 입을 오르락거리며 화제가 되었고, SNS로 동영상이 퍼지며 전 세계인들이 모여든 것이다.
다행히 헬레나가 선견지명으로 대도시로 승격을 하며 확장공사를 미리 해두었기에 치안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유저들이 나서서 치안을 유지하며 공헌도를 얻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난 그냥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백성들 사이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에게 폐하라 부르더니, 그것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모두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리도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폐하 체면이 있는데…."
"그건 안 될 말이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안마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는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난 날씨 요리사다. 그건 내 상징과도 같은 것이야. 그것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다. 내 취미까지 막으려 하진 말거라."
그런 단호함 때문인지 헬레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거로 합의해주세요. 그동안 계속 만드셨잖아요? 그것도 엄청 커다랗게. 건물 잔해 치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지금까지 부순 건물만 해도…!"
"쩝, 그건 주의하마."
잔소리가 길어지자 나는 그녀의 말을 대뜸 끊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 나는 날씨 요리를 하며 다양한 요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실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도깨비의 요술을 하나 익혔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내게 도깨비 뿔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도깨비 왕 쇠꼬비는 내게서 도깨비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요술을 하나 가르쳐주겠다고 했었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그림자 단검을 만든 재료가 도깨비의 뿔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요술을 하나 골라서 배울 수 있었다.
그 요술은 무엇이든지 거대하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리고 나는 만들어낸 날씨 요리에 그것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역시나 미숙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커져서 건물 몇 개를 부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간신히 모여든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진 않았지만,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며 꽤 큰돈이 빠져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내게 아낌없이 먹을 것을 베푸는 성군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는 오해도 하였다.
하지만 뒤로는 이렇게 헬레나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자꾸 그러시면 박막순 대마법사님께 말해서…!"
"먼저 간다."
나는 오랜만에 문워크로 방을 빠져나왔다.
* * *
곧장 방을 나선 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복장으로 왕궁을 거닐었다.
그것은 드레인이 만들어준 벨페고르 요리 정장이 아닌, 왕으로서의 위엄이 서린 모습.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왕으로의 등극을 축하하며 드레인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나는 소박한 금색 왕관을 쓴 채 천천히 왕성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내 옆엔 헬레나가 시중을 드는 것처럼 찰싹 붙은 채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내려가던 중, 어디선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하하하! 그 꼴이 뭐람! 으하하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을 확 찌푸리고 말았다.
백무열이 배꼽을 부여잡고는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지 마. 이 썩을 놈아. 나도 안 어울리는 거 아니까."
"푸후우웁! 큭큭큭큭!"
하지만 그럼에도 백무열은 여전히 내 꼴이 우스운지 배를 잡으며 웃었다.
내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 그때.
뒤에 있던 헬레나가 화가 났는지 나무라는 것처럼 백무열을 꾸짖었다.
"폐하 앞에서 이 무슨 무례이십니까! 아무리 폐하께서 예를 갖추는 걸 싫어하신다지만, 체통은 지키셔야죠!"
"어험!"
헬레나 앞에서 꼼짝 못 하는 백무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속으로 고소를 삼켰다.
내가 왕이 된 직후.
헬레나는 마치 엄한 어머니가 된 것처럼 누군가를 혼내는 일이 잦았 다.
가장 많이 혼나는 건 역시 나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때.
"할아버지!"
바로 옆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것은 바로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외모의 소유자인 미도였다.
"왕손녀님."
헬레나가 미도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헬레나 님."
미도 또한 그런 헬레나에게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헬레나가 이렇게 미도에게 예의를 차릴 정도의 신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바로….
"폐하."
나는 다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얼마 전 포트렌에서 상왕이 된 아렌이 서 있었다.
"어서 오게. 얼마 전 상왕이 되었다지? 축하하네."
"모든 것이 다 폐하의 은덕입니다."
"허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다 자네의 공일세."
아렌은 얼마 전 키리우스에게 상왕의 지위를 넘겨받게 되었다.
그가 실권을 잡은 이후.
아틀란 왕국과 포트렌의 동맹은 더욱 굳건해지며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사이를 중재한 것은 당연히 헬레나였다.
그녀는 포트렌에서 상왕의 딸로써 권력을 행사하며 살 수도 있었음에도, 이곳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할아버지. 근데 정말 신들이 이곳으로 내려올까요?"
의문 섞인 미도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올 게다. 아직 남아있는 마왕들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미도의 뒤에 서 있는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여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리깔았다.
믿기지 않지만, 그녀는 바로 마왕 릴리스였다.
나는 곧장 귓속말로 미도에게 물었다.
- 잭슨: 릴리스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던?
- 미도: 처음엔 그랬는데, 아예 힘도 못 쓰던데요? 다빈치의 말에 의하면 영혼이 저당 잡힌 상태래요. 어쨌든 안심하셔도 될 거에요. 쟤 저 공격 못 하거든요.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요. 소환수예요. 소환수.
참고로 아스모데우스는 왕성 아래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이었다.
뭐, 녀석의 힘이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테지만, 릴리스가 저렇게 미도에게 붙잡힌 이상.
아스모데우스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그에게도 똑같이 그림 봉인을 할 수 있냐고 다빈치에게 물었는데, 다빈치는 굉장히 특별한 종이로 만든 그림이라 같은 아마 평생 다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미도에게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나가실 시간이에요."
그때 헬레나가 다가오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왕궁의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젠 아틀란의 백성들을 만나야 할 때였다.
* * *
아틀란 왕국, 수도 메테우스의 광장.
"오오, 저분이 바로 아틀란의 왕이신가!"
"바로 옆에 계신 분이 왕손녀이신 미도 님인가 보군."
"난 저분께 얻어먹은 요리로 자식들을 살렸다네."
"폐하 만세!"
아틀란 왕국의 백성들이 각자 만세를 외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히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그들의 왕이었다.
그곳엔 최춘택과 미도.
왼쪽으로는 백무열과 오른쪽엔 총사령관 레슬리와 박막순이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마기를 숨기고 인간인 척하는 마왕 릴리스 또한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릴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인간의 모습으로 외형을 바꾼 마왕 루시퍼.
그가 가진 상상의 실체화라는 힘은 어느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게끔 만들었다.
지금 그는 예전 사도의 모습이었던 금발에 적안을 가진 미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릴리스가 저들의 손에 사로잡히다니, 완전히 예상을 벗어났군.'
릴리스와 아스모데우스가 사로잡힌 것은 아틀란에서 꽤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기에 루시퍼의 귀에도 금세 들어갔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릴리스는 그들에게 약점 같은 것을 잡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이제 쓸모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스모데우스는 릴리스가 잡혔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흐음.'
루시퍼가 턱을 매만지는 그때.
그런 루시퍼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네크론이 릴리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보니 릴리스는 저 최미도라는 여자에게 영혼이 사로잡혔군. 일종의 봉인 마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의 암흑 마법 중 하나지."
[그댄 영혼이 보이는 건가?]
"…짜증나지만 난 이제 리치가 되었다. 죽음의 신이 될 내게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루시퍼와 눈이 마주친 네크론의 눈이 후드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네크론은 얼마 전 네 번의 죽음을 겪은 이후 완전히 리치로 변모하였는데, 그는 이제 완전한 죽음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힘을 갈무리해라. 또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다.]
루시퍼가 귀찮다는 것처럼 혀를 차며 네크론의 주변에 있는 죽음의 기운을 감추었다.
다행히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크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후. 힘이 넘치는 걸 어떡하나. 나도 판도라의 힘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아. 곧 신이 되려고 그러는 건가 보지."
낮은 웃음을 흘리는 네크론을 보며, 루시퍼는 속으로 오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동안 루시퍼는 마왕들에게 나누어준 판도라의 조각은 물론이고, 전 세계 각지에 있는 판도라의 조각을 모아왔다.
자신과 아슈타르. 그리고 아직 바다에 있을 '심연의 질투'.
마왕 레비아탄에게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판도라를 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네크론은 아직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애초부터 루시퍼는 그를 죽음의 신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네크론은 그저 그분께서 강림하시면 판도라를 가져다드리기 위한 도구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판도라의 힘은 소지한 사람을 천천히 갉아먹기 때문에 루시퍼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위험할 수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죽음의 신이 될 수 있다 착각하는 건가. 인간이란 참으로 오만하고 속이기 쉬운 족속들이로군.'
그런 루시퍼의 속내도 모른 채, 네크론이 눈을 빛내며 하늘을 보았다.
마침 그곳에선 오색찬란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곧 신들의 강림이 시작되는 것이 분명했다.
"…후후후후. 드디어 플루토께서 내게 오시는가!"
네크론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될 재앙의 징조였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