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38화
제338화
크레센트와 성좌 일행들이 수도 베아트리체에 도착한 것은 검은 안개가 달을 반 정도 가릴 즈음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는데, 문자 그대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이게 대체….]
성좌들을 이끌고 온 아리에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닫힌 줄 알았던 수도 베아트리체의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부분 변신을 한 크레센트가 등 뒤의 날개를 펄럭거리며 함께 으쓱거렸다.
주변에 있던 뱀파이어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상황.
크레센트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검은 안개 때문에 크레센트는 춘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마왕이다!]
[마, 마왕!]
[정말 마왕이다!]
얼마지 않아 성좌들 사이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아리에스와 크레센트.
그리고 함께 온 유저들이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정말 마왕이 있었다.
'욕망의 여왕'이라 불리는 마왕 릴리스.
그리고 '욕망의 파라오'라 불렸던 전갈 궁좌.
타락해버린 마왕 아스모데우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두 마왕은 곧장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들의 뒤엔 익숙한 얼굴들이 함께 있었다.
가장 먼저 수도로 향했던 최춘택, 백무열, 박막순.
그리고 미도와 화가 성좌 다빈치가 함께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으로 오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스모데우스!]
그 순간, 아리에스의 신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튀어나갔다.
지금 아리에스의 눈은 분노로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사랑했던 루페온에 대한 복수심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리에스의 검이 아스모데우스의 심장으로 곧게 뻗어 나갔다.
쩌엉-!
[……!]
하지만 밀려난 것은 아리에스였다.
그런 아리에스를 막아 낸 것은 순식간에 나타나 뒤돌려차기로 검을 튕겨낸 최춘택.
최춘택은 그런 아리에스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멈추게."
[멈추라고? 저 녀석은 루페온을 죽였어! 그런 나보고 지금 멈추라는 말이 나와?!]
아리에스의 신형이 다시금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최춘택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아리에스의 앞을 막아섰다.
아리에스가 잇소리를 내며 분노를 표출했다.
[인간 따위가 감히…!]
고오오오!
아리에스의 주변으로 고고한 별의 힘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최춘택은 역시 낭패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설득이 쉽지 않겠어.'
사실 아까 전 다빈치는 아스모데우스를 협박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릴리스를 구하고 싶다면 자신들의 편이 되라고 하였고, 릴리스를 사랑했던 아스모데우스는 그것을 승낙하고 말았다.
적이었던 마왕 둘을 다시 전력으로 만드는 것은 최춘택도 꺼려졌지지만, 역시나 걸리는 건 아리에스와 성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예상대로 성좌들이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리에스를 막지 마라!]
[루페온 님의 복수를…!]
[난 용서할 수 없다!]
성좌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
갑작스러운 불의 벽이 나타나더니 나와 성좌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당황하는 성좌들의 뒤로 크레센트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런 크레센트의 손엔 수정구슬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이제 얘기하십시오. 헤카티아나 님."
수정구슬에서 뻗어 나온 빛에는 달과 마법의 여신 헤카티아나가 나타나 있었다.
아리에스와 성좌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조아렸다.
[마왕 둘을 사로잡았단 얘기를 들었다.]
헤카티아나가 눈앞의 이들을 굽어보더니 다시 말했다.
[우린 앞으로 사흘 뒤 인간계에 강림한다. 저들의 목숨은 우리 신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피테르 님의 명이다.]
[……!]
아리에스가 분을 가득 삼키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듭니다.]
* * *
유니온 본사, 유민석의 사무실.
"…후우."
유민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철을 덮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무척이나 많은 서류철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저것들이 모두 결재를 마쳤던 서류라는 점이었다.
거의 세 시간 동안이나 결재만 했었던 유민석은 자신의 팔목을 어루만졌다.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자신의 비서인 김지수.
역시나 그녀는 언제나처럼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이었다.
김지수가 다가와 몇몇 서류철들을 더 내밀었다.
"또 결재인가?"
"…네."
"후우. 알았어. 나가봐."
유민석의 손짓에 김지수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나갔다.
유민석은 다시 앞에 놓인 서류철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회장님.'
이건명 회장의 장례식이 끝나고 발인을 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
유니온의 직원들은 모두 애도의 기간을 가지기 위해 휴식의 시간을 가지기로 지침이 내려왔고, 그것은 이번에 새로 회장으로 취임을 앞둔 이석준 부장이 내린 결정이었다.
전 세계는 그런 이건명 회장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번져갔다.
"후우."
지끈거려오는 두통에 유민석이 서랍에 넣어놓은 타이레놀을 꺼내 입에 넣고는 물을 꿀꺽 삼켰다.
바로 효과가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두통이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민석은 텅 빈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망함에 중얼거렸다.
"…대체 진실이 뭐였습니까. 회장님."
유민석이 죽은 이건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겼다.
유민석은 처음 자신을 보았을 때의 이건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없이 자상했고 따스했던 그가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증거를 보았음에도 유민석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과연 진실을 밝힐 수 있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긴, 이젠 다 소용없는 얘기지."
모든 것들의 실마리를 쥐고 있던 이건명 회장이 죽었다.
하지만 조셉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고, 최근 좌표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원정단을 꾸렸다고 들었다.
유민석은 이젠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해 그와 함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조셉은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었다.
"……."
유민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아예 생각 자체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왔다.
그때, 똑똑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 유민석은 한쪽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모니터링실에 있던 차진철이었다.
"매형."
"…흐음, 어쩐 일이야."
"곧 신들의 강림이 시작돼요."
"벌써 그렇게 됐어?"
유민석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차진철은 그런 유민석의 뒤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지하에 자리한 모니터링 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유니온의 전 직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는데, 신들의 강림은 아크 스타의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사건 중 하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어서 오게."
"…회장님도 계셨군요."
유민석이 눈앞의 이석준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석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 참, 난 아직 회장이 아니네."
"그래도 곧 되시는 건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 지면 자넨 곧 부장이 되겠지. 유민석 부장."
유민석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남몰래 뒤에서 이건명의 비밀을 캤었던 자신이 승진을 할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였다.
물론, 눈앞의 이석준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
이석준은 그런 유민석의 표정을 읽으며 아직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잊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석준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곧 시작할 모양이야."
유민석이 말없이 이석준을 따라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그곳엔 현장에 급파되어있는 기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최춘택이 있는 메테우스였다.
- 아틀란 왕국의 수도 메테우스에 나와 있는 강대기입니다. 신들의 강림까지 이제 앞으로 30분 남았습니다. 과연….
* * *
그 시각, 나는 메테우스에 마련된 개인적인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현재 나는 웬 물컹거리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온몸의 힘을 쭉 빼며 쿠션에 파묻혀 있었다.
"폐하 좀 괜찮으세요? 여기요."
"음, 고맙다."
난 헬레나가 건네온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며 머리를 식혔다.
참고로 난 얼마 전 왕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오르카 왕국과 파르타 공국이 멸망하며 모여든 유저들과 NPC들이 이곳으로 밀려드는 바람에 자연스레 왕에 등극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렇게 갑자기 왕이 된 나는 나라의 이름을 '아틀란'이라고 지었고, 이곳 메테우스는 자연히 아틀란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난 지금 왕궁에 있는 것이었다.
"음, 어디 보자. 이걸 어떻게 썼더라?"
나는 지금 내가 앉은 의자의 아래를 살폈다.
"마력을 살짝 불어 넣으시면 되요. 박막순 대마법사께서 그러셨잖아요."
"아, 그랬지. 알려줘서 고맙다."
나는 헬레나의 말대로 눈을 감고 의자에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물컹거리던 의자가 드드드드! 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예 그곳에 몸을 파묻고 있던 나는 무척이나 시원한 느낌과 함께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흣, 어흠, 어허, 시워언하다. 어허허허!"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박막순이 내게 왕이 된 걸 축하한다면서 보내준 마법 물품이었는데, 오즈 부근에 사는 어스퀘이크 슬라임의 핵을 이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스퀘이크 슬라임은 주변 일대에 작은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몬스터였는데, 박막순은 그 슬라임의 특성을 이용해 안마 의자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와, 근데 이거 진짜 시원하네.
집에 있는 거보다 훨씬 좋잖아?
"어흣, 어허, 허읏. 헬, 레나. 야."
"네?"
"으흠, 어흠, 이거 옥좌로 쓰자."
"뭐라구요? 진심이세요?"
"그, 래애애애. 어허흣. 엄청 시원하구나아아아!"
드드드드!
무척이나 흡족스럽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