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37화
제337화
미도는 지체하지 않고 릴리스의 초상화를 들고 성의 꼭대기를 향해 달려갔다.
꼭대기로 가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되어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면서도 미도는 속으로 다빈치를 욕하기 바빴다.
'나 거의 색맹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쩌란 거야…!'
사실 미도는 미술에 무척이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특히 색감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다른 사람들보단 많이 떨어졌다.
분홍색에 대한 집착 또한 큰 편이었고, 그녀의 그림 수준은 거의 초등학교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행히 다빈치는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 P.S 그림자 잉크로 입술만 잘 색칠하면 된다.
정말 그의 말대로 초상화는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실제로 아이템에 있는 그림의 완성도 또한 98%를 나타내고 있었으니, 남은 것은 다빈치의 말처럼 입술을 잘 색칠하는 것뿐이었다.
그리는 것은 아주 찰나이겠지만, 그 찰나에 미도는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물론, 진짜 죽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다빈치는 구할 수 없을 것이 뻔하겠지.
"…후우."
미도는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계속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그림자 잉크는 검은색만 있었기에 색감에 대한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
미도가 마침내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계단의 끝엔 문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호화로운 것이 이곳이 바로 릴리스의 방이 틀림없어 보였다.
미도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왔어요? 빨리 왔네~]
교태와 애교가 뒤섞인 콧소리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방에 있는 듯했다.
미도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제임스가 주었던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철컥.
기회는 단 한 번뿐.
'확실하게 성공해야 해.'
그렇게 미도는 굳게 다짐하며 재빠르게 방안을 홱 돌았다.
[…어?]
놀란 릴리스의 음성과 동시였다.
타아앙-!
권총 안에 장전되어있던 첫 번째 빛의 총알이 릴리스의 앞에서 눈부신 섬광을 터트렸다.
* * *
릴리스의 성, 1층.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예전 이름을 알고 있는 제임스를 보며 잠깐이지만 혼란스러움에 몸을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때. 제임스가 뱀파이어의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귀걸이를 벗어 던졌고, 그의 얼굴은 어떤 익숙한 인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를 확인한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마이클의 끄나풀이었나?]
아스모데우스가 우습다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마이클이 오랜만에 떠오른 아스모데우스는 이죽거리며 제임스에게 물었다.
[마이클은 잘 지내나?]
"끙. 그게 왜 궁금하지?"
제임스가 간신히 두통을 참으며 물었다.
[뭐, 안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후후.]
마이클은 웃음기를 머금은 아스모데우스를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미는 것 같았다.
데미안에게 마이클의 소식을 들었던 제임스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마이클의 성좌는 타락하여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헛소리하지 마…."
[응?]
"네가 버린 거잖아!"
갑자기 터진 울분과 함께 소리친 제임스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내 얼음 속성의 탄환을 쏘아냈다.
탕탕! 탕!
그는 모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얼음탄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흐음, 여전히 폼만 잡는군. 너나 네 성좌인 데스페라도 녀석이나.]
아스모데우스가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마기를 가득 머금은 모래 벽으로 얼음탄을 손쉽게 막아냈다.
그때쯤 제임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마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눈앞의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타락하였지만, 한때는 궁좌였던 존재.
아스모데우스는 적어도 작년 월드 대항전 때의 마이클만큼 강할 것이 분명했다.
"……!"
바로 그 순간.
모래 벽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제임스의 주변을 감싸더니, 드릴 같은 모양새로 자신을 찌를 듯이 위협해왔다.
그건 마치 창과도 같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넌 그림자를 타고 다니는 무척이나 신출귀몰한 녀석이었지.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임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제길. 이러면 정말 도망도 못 치는데.'
자신이 그림자 속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손바닥을 땅에 한 번 짚어, 주변의 그림자를 모두 느껴 이동할 곳의 위치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탐색을 거쳐야만 마력을 일으켜, 그곳으로 그림자 이동술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꼼짝도 할 수 없다면, 녀석의 말처럼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아.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제임스가 눈을 질끈 감는 바로 그때.
[꺄아아악-!]
꼭대기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뇌리에 꽂히듯 등줄기를 관통했다.
아스모데우스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악귀처럼 얼굴을 찌푸리더니 몸을 흑색의 모래로 동화시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릴리스의 방.
짧은 비명과 함께 소리를 지른 릴리스가 눈부신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았다.
릴리스는 뱀파이어의 여왕답게 피를 이용한 권능으로 주변을 할퀴듯 공격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데 맞을 리가 없었다.
미도는 그런 릴리스의 공격을 피해내며, 그림자 잉크로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입술의 색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초상화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마왕 릴리스의 초상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초상화에는 봉인의 힘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림과 똑같이 생긴 대상의 봉인을 시작합니다.]
슈우우욱!
릴리스의 초상화에서 나선형의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이상한 촉수가 나타나 그녀를 그림 속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꺄아아악-!]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공에 떠오른 릴리스의 초상화는 그대로 릴리스를 집어삼키고는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도는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와."
딱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도는 마왕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왕 중 하나를 그림에 봉인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다빈치가 거의 다 한 것이고, 자신은 숟가락을 얹은 것이지만, 일단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릴리스-!]
그때. 문 너머로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며 몸을 짓누르는 듯 고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도는 한 번에 목소리의 주인이 아까 내려갔던 릴리스의 약혼자인 아스모데우스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귓속말이 안 되는 지역이었기에, 제임스가 무사한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
"에잇, 진짜!"
미도는 재빨리 릴리스가 봉인된 초상화를 들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선은 문을 잠갔고, 마침 꼭대기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하나 보여서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올라갔다.
콰앙!
때마침 문이 폭발하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 * *
같은 시각.
나, 백무열, 박막순은 춘자를 타고 다크문의 수도인 베아트리체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곳은 온통 까만 것들 투성이였는데 태양을 가리는 검은 안개는 물론이고, 숲과 나무들도 온통 까맸다.
다크문의 수도는 마치 연탄으로 뒤덮인 곳에서 사는 분위기였다.
유일하게 까맣지 않은 것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달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다 시커메."
백무열이 베아트리체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보며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아, 시방. 달은 안 까맣잖여. 눈깔 삐었어?"
"뭐라고? 이 할망구가 아까부터 계속…!"
"아따, 이렇게 예쁜 여자헌티 할망구라니 눈깔이 삔 게 맞네. 맞어!"
"눈깔은 내가 아니라 네가 삐었지!"
백무열과 박막순이 또 한 번 말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춘자의 머리에 앉은 채,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사실 말려도 또 싸울 것이 뻔했기에, 말리는 걸 반쯤은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곳이 하늘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땅이었다면 치고 박으며 싸웠을 것이 뻔했다.
어우,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그걸 말리고 있을 나를 상상하니 말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게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구룩!"
춘자가 울며 내게 신호를 보냈다.
지니는 그냥 말로 알려주었지만, 무언가 발견했을 때 춘자는 이렇게 울곤 했다.
참고로 지니는 마력 소모가 조금 심한 편이었기에, 지금은 춘자를 타고 가는 상황이었다.
이곳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크레센트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춘자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보았다.
초감각을 시력에 집중해 시야를 확장하였다.
"아니, 이 할망구가 진짜 치매 걸렸나!"
"치매는 누가 치매여! 시방, 누가 치매란 말이여! 말 다 했어. 시방!"
하지만 뒤에 있는 두 사람의 언성이 점차 높아져가며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그만 빼액!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조용 좀 해 이것들아! 정신 집중이 안 되잖아-!"
"……."
"……."
베아트리체 상공에서 우렁찬 고함이 메아리쳤다.
그제야 두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신을 집중해 시야를 확장했다.
그러자 저 멀리 보이는 고성이 하나 보였다.
"…저긴 마왕이 있는 곳인데?"
크레센트는 수도 베아트리체에 고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마왕 릴리스와 아스모데우스가 머무르고 있을 것이라 했었다.
그런데 그런 고성의 꼭대기에 두 사람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하나는 전갈의 형상을 한 것이 마왕이 된 아스모데우스 인 것 같았고, 또 다른 한 명은….
"무열아, 막순아."
"……?"
"……?"
백무열과 박막순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런 두 사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 준비해. 미도 찾았다."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나는 곧장 춘자에게 고성의 꼭대기로 공간이동을 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들은 나선형의 포탈을 통과해 순식간에 미도와 아스모데우스 사이에 나타났고, 그런 우리를 발견한 미도의 놀란 음성이 가장 먼저 들려왔다.
"할아버지? 아니, 여긴 어떻게…."
"일단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다친 데는 없니?"
"아, 전 괜찮아요!"
씩씩한 미도의 대답과 함께 박막순이 끌끌 웃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미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은 마치 손녀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방. 실물로 보니께. 허벌나게 이쁘다야. 난 여기 오라버니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여. 반가워."
"아, 안녕하세요!"
미도가 박막순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무열은 그런 미도가 못마땅한지 인상을 확 찌푸리며 걸어왔다.
"…미도야.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인사하는 거 아니다."
"아, 스승님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잘 지내긴 개뿔이…."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가 덕담을 나누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으르렁거린 것은 그때였다.
[크윽, 감히 날 방해할 생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릴리스를 내놓아라! 릴리스는 어디 있지?]
나는 눈앞의 아스모데우스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알던 예전의 그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갈의 외형은 마기 때문에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온통 검은 모래가 녀석의 몸에 자작하게 붙어 있었다.
그런데 릴리스가 어디갔냐니.
대체 무슨 소리지?
"미도야. 릴리스라면…."
"맞아요. 마왕이에요. 방금 전에 제가 봉인했어요."
"뭐라고…?"
나와 백무열. 그리고 박막순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우리 셋 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도는 무척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봉인했어요."
그 순간. 박쥐 무리가 몰려들더니 사람 형체를 만들어내었다.
그곳에서 나타난 이의 정체를 확인한 미도가 화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다빈치!"
[용케도 봉인에 성공한 것 같군. 구해줘서 고맙다.]
다빈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미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스모데우스가 다빈치에게 으르렁거렸다.
[다빈치! 네놈의 수작이었구나!!]
하지만 다빈치는 그런 아스모데우스에게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미도의 손에 들려 있던 릴리스의 초상화가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 들려졌다.
다빈치는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덤빌 테면 덤벼봐라. 하지만 내가 죽으면 릴리스의 봉인은 영원히 풀지 못할 거다.]
[…뭣!]
아스모데우스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