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34화
제334화
눈부신 광휘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꼭 감았다.
어쩔 수 없는 죽음이란 이토록 허망한 것임을 이때의 나는 처음 알았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원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지만, 아마 그들 또한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죽은 아내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성좌들이었다.
나야 곧 캡슐에서 일어날 테지만, 성좌들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 응?
"……?"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금 빨라지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그보다는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가 더 궁금했다.
잠깐만 여긴 동굴인데?
뭐야, 여기?
"여긴…?"
바로 그때.
"아빠다!"
"……?"
갑자기 누군가 "아빠다!"하고 소리치며 내 허벅다리에 달려들었다.
무척이나 검은 머리를 가진 처음 보는 단발머리의 소녀였다.
풍희와는 조금 다른 외향이다.
아니, 근데 얘는 대체 누군데 나를 아빠라고…?
"너 누구…."
"춘자야!"
"…응?"
"춘자."
"……."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알던 춘자는 분명 레추자였고, 레추자는 분명 부엉이 외향을 하고 있으며 초승달 눈동자를 가지고 있….
"…있네."
눈앞의 소녀는 정말로 초승달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로 이 아이가 춘자라고?
그럼 여긴 혹시…?
"다크문?"
"응, 맞아! 아빠랑 친구들이 위험해 보여서 춘자가 몽땅 다 소환했지! 에헴!"
오, 맙소사.
이런 기특한 녀석을 보았나.
"허허허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으며 춘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성좌들과 김수정, 마석두, 드레인 또한 사정을 알게 되자,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이기 시작했다.
그때. 칠흑의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성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대가 이 아이의 주인인가?"
* * *
잠시 뒤, 아리에스가 성좌들을 이끌고 밖을 나갔다.
김수정, 마석두, 드레인도 자리를 피해주었고, 현재 동굴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춘자.
그리고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춘자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레추자 '크레센트'가 함께 있었다.
참고로 춘자는 방구석에서 열심히 다시 마법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랬구만. 그런 상황이었던 건가."
나는 크레센트에게서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공간이동으로 이곳에 오게 된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미도와 일행들은 이곳 다크문에서 우연히 도깨비 부락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크레센트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크레센트는 춘자가 자신의 핏줄임을 알게 되어, 현재 시공의 마법이 걸려있는 이 동굴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춘자는 공간이동에 관한 마법 책을 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내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장 달의 마력을 사용해 대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춘자 덕분에 나를 비롯한 성좌들이 모두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이거 참."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타이밍이 또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그때 춘자가 다른 책을 보고 있었다면, 일행들은 모두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모두 폭사했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겠지.
"……."
나는 다시 눈앞의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호화스럽고, 크레센트가 마법으로 만든 것들이 가득했다.
뒤에선 여전히 머리를 싸매며 또박또박 책을 읽는 춘자의 낭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하면…? 와, 됐다!"
크레센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춘자에게로 걸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과연 내 핏줄이구나. 역시 배움이 빨라. 그럼 이제 다음은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알려주마."
그 모습에 이상하게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춘자를 처음 만나 기른 건 나였지만, 역시 친부모가 해주는 것과는 다르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질투심이 샘솟은 것 같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잠깐만, 그런데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메테오 스트라이크라고?
그거 대마법 중 하나 아닌가?
"이, 이보게. 메테오라면 분명 대마법사들이 쓰는 거 아닌가…?"
그런 내 물음에 크레센트가 무슨 문제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러니까. 그걸 춘자가 지금 배워도 될 단계냐는 거지."
사실 내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는 마법은 본래 박막순의 성좌인 피타고라스가 주로 쓰던 마법이었다.
피타고라스는 500년 전 라그나로크에서 그 대마법을 이용해 죽음의 군단과 맞서 싸우며 초토화시킨 전력이 있었다.
그런 엄청난 마법을 지금 춘자가 배워도 되느냐는 것이었지만 크레센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대는 아직 저 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
"뭐…?"
"저 아이는 이미 인간들이 부르는 대마법사라는 경지에 들어선 지 오래다."
"뭐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기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탓에 탁자에 있던 찻잔이 엎어져 버렸다.
크레센트는 "흐음, 괜찮네. 내가 치우지."하며 손가락을 튕기더니, 마법처럼 책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깨졌던 찻잔 안에는 다시 내가 먹었던 차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
다시금 요리사가 아니라 마법사로 전직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World. 가이아의 금제를 지키던 '사계절 성좌'들의 봉인이 모두 깨졌습니다. 지금부터 일주일 뒤, 신들의 강림이 가능해집니다.]
"……!"
충격적인 메시지가 이어졌다.
* * *
동대륙, 무림맹.
같은 시각.
루시퍼는 쓰러진 창천의 용을 보며 천천히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주변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무림맹은 이미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후후.]
과연 창천의 용은 '사계절 성좌'들 중 가장 강하다는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은 것처럼 강했다.
설마 자신을 이 정도로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가 신들을 제외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름 흥미진진한 싸움이었다.]
창천의 용의 모습이 변모하더니 천천히 남궁 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창천의 용은 푸른 털과 비늘이 뒤섞인 아홉 꼬리를 가진 여우의 몸통과 용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홉 꼬리는 비, 벼락, 바람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루시퍼는 천천히 남궁 운에게로 다가갔다.
"크흡!"
남궁 운이 피를 울컥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문득, 후회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남궁 가문은 이 창천의 힘을 대대로 물려받으며 계승해왔지만, 아직 자신은 후계자를 찾지 못했고, 여기서 자신이 죽는다면 그대로 이 힘은 사라져버릴 것이 뻔했다.
"안…돼."
남궁 운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루시퍼에게 자비를 구했다.
하지만 마왕인 루시퍼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마왕인 자신에게 사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후후. 설마 창천의 용이 이런 방법으로 인간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을 줄은 몰랐었다. 꽤 재밌는 발상이었어. 그동안 이렇게 불사를 유지해온 건가? 창천의 용이여. 대답해보라.]
퍼억-!
루시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궁 운의 심장을 꿰뚫었다.
남궁 운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동시에 주변의 땅을 뚫고 올라온 마기 폭풍이 불어닥치더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고, 무림맹 일대가 마계화가 되어 땅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하늘의 균형이 깨지는 것 같은 감각을 루시퍼 또한 느꼈다.
오랜 세월 움직이지 않았던 수레바퀴가 마침내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이제 그분이 오시는 날이 머지않았도다.]
루시퍼는 무심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사라졌다.
* * *
마왕 베르제브와의 격전지.
그때쯤 견소룡을 비롯한 일행들은 마침내 마왕 베르제브를 쓰러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당연히 견소룡이었다.
그가 가진 [☆스타피스, '사랑의 처형자 차원 가위']는 그 강인한 마왕의 몸조차도 단번에 자를 수 있는 굉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고, 견소룡은 곤충으로 모습을 바꾸어 빠른 속도로 덤벼드는 베르제브의 다리와 날개.
그리고 낫과 같이 생긴 팔을 자르는데 성공했다.
차원 가위에 당한 베르제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너무나 허망하게 목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후우."
그리고 그런 견소룡의 앞엔 뎅겅 잘려나간 마왕 베르제브의 머리통이 무림의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베르제브를 잡아서 나온 부산물은 함께 싸운 이들과 나누었다.
견소룡, 마이클, 백무열은 각각 대량의 경험치와 함께 많은 레벨을 올릴 수 있었고, 견소룡은 무림맹이 있는 곳의 하늘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
아까까지만 해도 그곳에선 비와 벼락과 폭풍이 동반된 재앙이라고 불러야 할 수준의 힘의 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격돌이 사그라든 건 5분 전이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견소룡만이 아닌지, 모두의 시선이 무림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World. 가이아의 금제를 지키던 '사계절 성좌'들의 봉인이 모두 깨어졌습니다. 지금부터 일주일 뒤, 신들의 강림이 가능해집니다.]
"……!"
놀라운 메시지와 함께 맑게 갠 하늘을 검은빛이 물들이기 시작했다.
견소룡은 미간을 한껏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계화…!'
그것은 저번에 보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남궁 운이 패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흐음, 베르제브를 이렇게 쉽게 죽일 줄은 몰랐군. 내가 정말 인간들을 과소평가했던 건가?]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존재가 목이 잘린 베르제브의 시체 근처에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흑사자의 외형을 가진 존재.
SNS 상에서도 무척 유명한 루시퍼라는 이름의 마왕이었다.
"……!"
[……!]
"……!"
평화가 찾아온 전장에 다시금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누무시키와 카미유.
백무열과 마이클.
견소룡과 무협길드.
무림맹의 어느 누구도 루시퍼에게 함부로 덤빌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시퍼.]
그때. 카미유가 앞으로 나와 루시퍼를 불렀다.
루시퍼는 베르제브의 몸속에 있던 판도라의 구슬 조각을 꺼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른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마주하는 듯한 오싹한 감각.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형님은 이런 놈 앞에서 그토록 당당했던 것인가….'
견소룡 또한 아크스타그램을 하고 있었기에 루시퍼와 당당하게 말을 주고받았던 화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형님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냉정했으며 카리스마 또한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견소룡은 처음 보는 루시퍼였기에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루시퍼가 너무나 강했다.
베르제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마기였다.
[카미유인가. 오랜만이군. 칠성협들은 잘 지내고 있나?]
[싸우러 온 건가요?]
[후후. 그 본론부터 말하는 말투는 여전해.]
[싸우러 온 거냐고 물었어요.]
[흠, 글쎄…. 어떨 거 같나?]
고오오오!
루시퍼의 어깨너머로 커다란 죽음의 마기가 넘실거렸다.
그것은 마치 넘을 수 없는 파도와 같은 기세였다.
몇몇 병사는 버티지 못한 채 토악질을 하기도 했고, 아예 기절을 하기도 했다.
그때. 루시퍼의 눈에 견소룡이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군. 그것으로 베르제브를 쓰러트린 것이었나? 차원 가위라…. 잘도 아슈타르 녀석의 팔을 잘도 잘랐더군.]
루시퍼가 천천히 견소룡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견소룡은 도망치기 위해 뇌보법을 전개했지만.
따악-!
루시퍼는 너무나 손쉽게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온몸을 감싼 뇌전이 오히려 루시퍼의 수족이 되어 오히려 견소룡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어설픈 벼락이군. 그 정도는 그저 흉내에 불과하지.]
루시퍼가 점점 가까워졌다.
견소룡은 저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루시퍼는 손을 뻗었고, 견소룡의 손에 있는 차원 가위를 빼앗으려는 바로 그 순간.
찌이이잉-!
[……?]
견소룡이 빛으로 변하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인간들 또한 차례대로 빛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드넓은 초원엔 루시퍼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
휘이이잉.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