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22화
제322화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꿰뚫린 가슴 너머로 루시퍼의 발톱엔 툰드라 드래곤의 얼음 심장이 혹한의 마력을 띤 채 뛰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무뎌지며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파창-!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부서져 버렸다.
하얀 눈가루가 그의 손끝에서 흩어졌다.
툰드라 드래곤의 눈은 천천히 생기를 잃었다.
거대한 몸이 흩어지며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작은 알이었다.
[이노오오옴!]
바로 그때.
산타클로스가 노호성을 터트리더니 입고 있던 빨간 옷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나이에 맞지 않게 울긋불긋한 근육질의 몸매.
산타클로스는 손을 앞으로 쭉 뻗더니, 각종 얼음 마법들을 루시퍼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날카로운 얼음송곳을 동반한 눈보라와 매서운 눈 폭풍이 루시퍼에게 들이닥쳤다.
아니, 몸으로 싸울 것처럼 해놓고는 왜 마법을 쓰는 건데.
이 양반이 지금 장난하나.
[흥. 툰드라 드래곤보다 약한 그대가 감히 내게 어쩔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러나 루시퍼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허공에 강력한 불을 만들어 내더니, 산타클로스의 공격을 모두 상쇄시켜 버렸다.
[뭣이…!]
놀란 산타클로스를 뒤로한 채, 나는 곧장 바람의 비각술을 펼쳐 루시퍼의 사각으로 달려들었다.
박막순은 그런 루시퍼를 막기 위해 손가락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각종 마법들을 날려댔다.
콰콰콰쾅-!
자욱한 연기가 얼음성 내부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역시 루시퍼는 끄떡없었다.
"…빌어먹을."
"흐미, 저놈은 강철을 씹어먹었나. 겁나 딴딴허네."
나를 이를 악물었고, 박막순은 닳지도 않은 루시퍼의 생명력 게이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지금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도망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선 옳을 것이었다.
루시퍼의 상상의 실체화는 신들 조차도 두려워했었던 능력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가 걸리는 건 툰드라 드래곤이 남긴 알.
피닉스 이그누르가 그랬던 것처럼 툰드라 드래곤 또한 저 알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 알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했다.
문제는 루시퍼가 눈치채기 전에 저걸 빨리 낚아채야한다는 건데….
[호오. 이걸 노리고 있던 건가?]
"……!"
"……!"
[……!]
우리 셋은 동시에 움찔거렸다.
[후후후. 난 작은 희망을 부수는데 희열을 느끼지.]
그렇게 말한 루시퍼가 넘실거리는 죽음의 마력을 움직여 도망치려는 툰드라 드래곤의 알을 붙잡았다.
결국, 알은 루시퍼의 손에 쥐여졌다.
그리고는 약간의 힘을 가하자….
"안 돼!"
"저, 저런!"
[……!]
나와 박막순이 노호성을 터트렸고, 산타클로스가 막으려는 듯 재빨리 다시 얼음 마법을 전개하였으나, 콰아앙-! 툰드라 드래곤의 알에 실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얼음성 내부에 조용한 정적이 잦아들었다.
[네놈이 감히 무슨 짓을-!]
결국, 폭발한 산타클로스가 마법을 내팽개치고 직접 몸을 내던졌다.
산타클로스는 온몸에서 어마어마한 기를 뿜어내며 재빠른 움직임을 선보였다.
루시퍼의 사각지대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잔상이 나타나는 것도 보였다.
루시퍼의 눈이 빠른 속도로 좌우로 움직였고, 그렇게 산타클로스가 루시퍼의 뒤를 잡았을 무렵.
[죽어라-!]
산타클로스의 주먹이 갑자기 거대해지며, 루시퍼의 등을 향해 집어삼킬 것처럼 돌진했다.
콰콰콰쾅-!
얼음성 내부의 땅이 패일만큼 어마어마한 권격이었다.
재빨리 나도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여의초를 꺼내 들었다.
"커져라. 여의초."
나는 허공의 구름을 밟으며 뛰어올라 루시퍼의 머리를 향해 여의초를 내리쳤다.
박막순은 삼각형 두 개를 겹쳐 육망성을 만들어 내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 셋이 합심한 협공이 루시퍼에게 닿으려는 찰나.
[우습군.]
딱!
루시퍼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작은 크기의 흑색 구슬.
그러나 그 구슬에선 어마어마한 인력과 바람이 휘몰아치며 부근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박막순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이놈이 당장 이거 놓지 못해! 에라이 썩을 놈아아악!"
박막순이 지팡이로 루시퍼의 몸을 때리기 위해 휘둘렀지만 전혀 닿지 않았다.
사실 별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나와 산타클로스는 근처에 떨어진 무거운 얼음 덩어리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루시퍼가 박막순을 우리에게 던졌다.
"옴마야. 아아악-!"
턱!
나는 간신히 박막순의 로브를 낚아채서, 얼음 덩어리를 잡도록 만들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루시퍼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또 보자고. 물론,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아, 참고로 그 안에 들어가면 아무리 불사의 인간이라도 살아나올 수 없을 거다. 영원히 세상과 분리된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거거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시퍼는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 시벌…."
"지랄도 풍년이네."
[크윽….]
각자 분함을 속으로 삼켰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어둠의 구슬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점점 주변의 구조물들이 뜯겨나가며 저 작은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것이 얼마나 지속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세라면 곧 얼음성 하나가 통째로 살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꽉 잡으세요!"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땅으로 꺼지며 사라졌다.
* * *
동대륙, 무림맹의 입구.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무림 맹주 남궁 운이 공손한 포권 지례로 검성과 그 일행들을 맞았다.
백무열과 마이클 역시 포권을 마주 취했고, 그런 그들을 향해 남궁 운이 빙긋 웃었다.
"동대륙의 예법에 익숙하시군요."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네. 허허허."
백무열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누무시키가 그런 일행들을 한명씩 가리키며 소개했다.
[음, 이쪽은 나와 같은 성좌인 카미유일세. 칠성협의 일원이지.]
[반가워요.]
"먼 길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쪽은 백무열. 성좌는 아니네만 대단한 무력을 지녔지.]
남궁 운과 눈을 마주친 백무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이누무시키가 잠깐 사이를 두며 남궁 운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기에 굳이 숨기고 싶진 않았다.
[새로 들인 내 제자일세.]
"……!"
그러자 남궁 운을 비롯해 뒤편에 자리해 있던 문파의 수장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검성의 제자…?"
"허허. 일평생 그토록 제자를 거절하시던 분이 거둔 제자라니…."
"이 무슨 해가 서쪽에서 뜨는…."
그러나 남궁운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마이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검성의 제자를 뵙습니다."
"마이클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스승님께 검법을 사사 받았습니다."
어느새 마이클은 자연스레 검성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이클 또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아까 있었던 싸움에서 더욱 진일보한 그의 검은 이누무시키마저도 수긍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이제 진심으로 이누무시키를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이누무시키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번뇌를 알아보았고, 모든 욕심과 집착을 버려내야만 새로운 검의 길이 보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방금 있었던 싸움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과연 그 길의 끝은 오로지 검이었다.
마이클은 이제야 검을 조금 더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바로 그때.
[당신에게 검성(劍聖)으로서의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검성(劍聖)이 된다면 자신만의 심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심상 구현과 동시에 당신은 검성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심상…?'
마이클의 눈이 살짝 뜨여졌다.
눈앞의 시스템 메시지는 마이클이 목표로 해야 할 새로운 경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랄 새도 없이 남궁 운이 말을 이었다.
"우선 안으로 드시죠."
* * *
무림맹 회의실 안.
이누무시키 일행이 동반된 무림맹 회의가 다시 재개 되었다.
역시나 회의를 이끄는 건 맹주인 남궁 운의 몫이었다.
"자, 기다리던 분도 오셨고 하니, 다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봅시다. 바깥에 있는 저 좀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남궁 운이 먼저 서두를 던지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각 문파의 수장들이 한마디씩 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 전 남궁 운에게 호되게 혼났던 폭매검이었다.
"당연히 쓸어버려야 하오!"
"허허. 이보오. 폭매검. 너무 급진적인 생각 아니오?"
"뭐라고? 무당의 도사들은 저 좀비들이 무서운 게요? 그런 게요?"
"음! 감히 우리 무당을 욕보이는가! 태극 선인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잊었단 말이오!"
그러나 역시 회의는 저번처럼 말싸움으로 치달았다.
나가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경파와 다른 방법을 찾아보며 최대한 희생을 줄여야만 한다는 온건파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중재한 것은 다름 아닌 카미유였다.
[제게 한 가지 묘안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남궁 운이 침착한 어조로 그녀에게 묻자, 카미유는 잠깐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오면서 아까 그 좀비라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과연 시체들의 흉악함은 두말할 것도 없더군요.]
"거 보시오! 역시 좀비들은 쓸어버려야…!"
[하지만 반대로 큰 상처 없이 좀비가 된 이들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시체가 아니라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겠지요. 무언가에 감염되었다는 말입니다.]
"어흠. 흠. 그래서 검성의 동료분께선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소?"
무당파의 수장이었던 태극 선인이 죽자, 임시로 수장을 맡고 있던 노장로가 물었다.
그는 폭매검을 힐끔거리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았다.
폭매검은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씩씩거리기 바빴다.
그러나 카미유는 개의치 않는 듯 얘기했다.
[제게 이틀의 말미를 좀 주세요. 해독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카미유의 말에 모두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남궁 운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아까도 겪으셨겠지만, 덤벼오는 좀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무림을 지키는 대부분의 병력들은 성벽을 튼튼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할 정도로 방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마 많은 시간을 드리기가 힘들 겁니다. 검성과 일행분들이 오셔서 그나마 좀 숨이 좀 트였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힘든 상황인 것은 사실입니다."
남궁 운이 못을 박듯이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말해주었다.
마이클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그렇다면 지원군을 더 부르지요."
"지원군이요?"
"마침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