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19화
제319화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 허허벌판이었다.
휘오오오-!
이어진 강추위가 온몸을 강타하며 지나갔다.
"오오미, 이 망할 추위는 뭐시여. 시방!"
우레와 같은 박막순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재빨리 솔라 피닉스를 불러내 주변의 추위를 차단했다.
그제야 박막순은 오들오들 떨던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제대로 도착한 거 같기는 한데, 어딘지는 알 수가 없네."
박막순이 솔라 피닉스 곁에서 손을 녹이며 말했다.
"미안혀. 나도 북극은 처음 온 거라. 정확한 공간이동이 안 되부렸어."
그런 그녀에게 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할 만큼 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건 뜻밖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괜찮아. 여기 길을 아주 잘 아는 놈이 있으니까."
"잉? 그려? 그게 누군데."
"펜릴."
고오오오!
나는 곧장 흑야의 마력을 이용해 펜릴을 소환했다.
소환된 펜릴은 무척이나 조용하게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두 발로 일어선 웨어울프가 우리를 내려보자, 화들짝 놀란 박막순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옴마야! 이건 또 뭐시여! 갑자기 개새끼가 왜 나타나!"
"…난 개새끼가 아니라 웨어울프다, 인간. 무례하군."
펜릴이 박막순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자 나는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쯤 해라. 여기가 어딘진 알고 있겠지?"
"흥. 당연하다. 내 고향인데."
"그럼 길 안내 좀 부탁하자."
"어머님께 가면 되나?"
"그래. 우선 로믈라나를 만나야겠어."
펜릴이 손짓하자, 흑야랑 두 마리가 그림자에서 솟구쳤다.
나와 박막순은 각각 한 마리씩 등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다. 꽉 잡아라."
나는 갈기를 손으로 꽉 붙잡았고, 박막순도 양손으로 흑야랑의 갈기를 꼭 붙들었다.
펜릴이 가장 앞서서 차디찬 북극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진 흑야랑 두 마리가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잠시 뒤, 우리는 로믈라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오메, 야는 엄청나게 예쁜 강아지여!"
감탄 어린 박막순의 말에 로믈라나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만난 로믈라나는 그 털 색깔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순백색의 곱디고운 눈을 닮아 있었다면, 지금은 약간의 탁기가 어린 회백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자네 털 색깔이…."
[저번 벨페고르와의 일전에서 조금 무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빛과 어둠의 힘을 동시에 쓰고 나서부터 이렇게 바뀌더군요.]
그런 로믈라나의 말에 맞장구를 친 건 의외로 박막순이었다.
그녀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빛과 어둠은 원래 서로 상극이여. 마법에도 빛과 어둠을 함께 쓰면 혼돈의 마법이 되지. 무척이나 파괴적인 마법이지만, 시전자도 서로 상극의 기운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부담이 상당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에게 이 정도의 마법 지식이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 성좌가 그렇게 알려주더라고."
아아, 그럼 그렇지.
[…혼돈이라.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지난번 일전에서 혼돈의 힘을 끌어다 쓴 후. 제 몸이 천천히 망가지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제 선택이었으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일지라도, 선택은 어차피 로믈라나가 한 것이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로믈라나는 벌써 그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음, 이보게 로믈라나."
[네. 말씀하세요.]
"갑자기 이런 안 좋은 소식을 먼저 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유감으로 생각하네."
나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작게 운을 띄웠다.
지금부터 내가 그녀에게 전할 말은 성유계에 있던 레무스의 소식에 관한 것이었다.
무언가 직감을 한 것처럼, 로믈라나의 얼굴은 천천히 굳기 시작했다.
* * *
잠시 뒤, 나와 박막순은 함께 로믈라나의 거처를 나왔다.
펜릴은 그런 로믈라나를 위로할 수 있도록 그녀의 곁에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예상대로 로믈라나는 약간이지만 슬픔에 잠긴 것 같았고, 그래도 아직 생사가 확인된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해주었다.
어쨌든 그래도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는 사실에, 나는 무거운 납덩어리가 앉은 것처럼 표정이 무거웠다.
박막순이 위로의 말을 건넨 건 그때였다.
"뭘 그렇게 뚱하고 있고 그려. 이런 모습은 오라버니 답지 않어."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날 본 지는 얼마 안 됐으면서.
"이 할망구야. 옛날의 내가 아니다."
"지랄."
"쩝."
괜히 본전도 못 찾았다.
"퍼뜩 손 안 줘? 마을에 가야 한다면서."
"아, 그랬지 참."
나는 황급히 박막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목을 낚아채서는 반대 손으로 산 아래에 있는 환한 야경을 빛내는 마을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면 되지?"
"그래."
그곳은 낮의 마을 '디야'.
로믈라나의 말에 의하면 조만간 낮의 마을 '디야'와 밤의 마을 '누체'는 통합이 될 것이라고 한다.
조만간 간단한 발족식만을 남겨두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내가 저기로 가려는 이유는 발족식이나 보려고 가는 건 아니었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
바로 눈의 레시피와 눈의 비각술을 얻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가 얼마 전부터 저곳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로믈라나에게 전해 들었다.
"어후, 얼른 후딱 해치우고 가자고 감기 걸리겄어."
박막순이 코를 훌쩍거리며 남은 손으로 삼각형의 마법진을 그렸다.
우웅-!
공간이동이 시작되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어째 지니보다 더 편한 것 같은데…. 이 마법 내가 배울 수 있으려나?
괜히 마법사로 전직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다시금 밀려왔다.
콰아아아-!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고, 내가 나타난 곳은 아까 보았던 야경이 무르익은 그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예전과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웠던 이곳은 이제 온기가 맴돌았다.
어린 수인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인간들과 수인들이 함께 어울려 놀고 있기도 했다.
간간히 야행성 수인들도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마을의 통합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린 지금 마을의 골목 어귀에 공간이동을 한 상황이었다.
"끙."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박막순의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박막순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공간이동을 연속으로 두 번 써서 마력 탈진이 잠깐 온 거야."
그 말에 괜스레 미안함이 밀려왔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왜 무리를 하고 그러냐. 힘들면 힘들다고 진작 말을 하지."
"아, 끄떡 없다니께. 괜찮어! 나 박막순이여. 박막순!"
하여간 이 고집불통을 누가 말려.
"그래도 다음부턴 너무 무리하지 마라. 내가 미안해지잖아."
"…흥. 알았다 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박막순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력 회복을 시작했고, 그때까지 나는 간간히 망을 보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나는 다른 유저들이 인식할 수 없도록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이제는 멸망해버린 파르타 공국의 마공학의 힘이 깃든 후드.
얼마 전 아렌의 집사인 알프레드가 손봐 준 것을 이제야 써보는 것이었다.
"다 됐어."
"그럼 가자."
그렇게 나와 박막순은 거리를 나섰다.
다행히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나도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박막순이 입은 로브에도 후드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천천히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나와 박막순은 만나고 싶었던 이를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호호호호! 착하게 살거라!]
"고맙습니다. 할아부지!"
빨간 모자에 빨간 털옷을 입은 흰수염을 가진 할아버지가 주변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진명은 세인트 니콜라스.
'12월의 침략자'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또 다른 이름이 더 유명한 가이아의 네 번째 사도.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다!]
"설마 찾던 게 저 양반이야?"
"…그래."
산타클로스.
나는 저 양반에게 눈의 레시피와 눈의 비각술을 얻어야 한다.
* * *
새벽닭이 울며 이른 여명이 세상을 밝히는 시각.
아리에스는 곧장 일어나자마자 메테우스에 있다는 바람의 신전으로 향했다.
다른 성좌들에겐 한 시간 뒤에 오라는 말을 남겨두었으니 알아서 잘 찾아올 터였다.
아리에스는 황금양을 타고 하늘을 날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에라를 만나 루페온의 비보를 전할 수 있었다.
후에라는 무척이나 깜짝 놀라며 슬프게 울었다.
[루페온이…. 흑. 다른 신들에겐 내가 전하겠단다. 흑흑…. 알려줘서 고맙단다. 흑….]
그것이 후에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신전을 나선 아리에스는 다시 메테우스의 영주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제 자신과 성좌들을 데려다준 인간 헬레나가 이곳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엔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도착해 있었다.
[뭐야. 아리에스? 네가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캣 베이커. 칠성협의 일원인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마왕들을 상대하기 위한 선발대로 먼저 인간계로 향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리에스가 슬쩍 옆으로 곁눈질을 했다.
옆엔 팔짱을 낀 티아루도가 함께 있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그는 정말이지 말이 없는 성좌다.
"그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바로 그때. 뒤편에서 헬레나가 싱긋 웃으며 나타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갑주를 입은 인간들이 함께 있었다.
헬레나는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실피드 기사단을 소개했다.
"여긴 여러분들의 안내를 맡을 실피드 기사단의 부단장이신 베커 님이라고 해요."
"베커라고 하오. 성좌들을 만나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오."
베커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아리에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헬레나에게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안내하다니. 우릴 대체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냐.]
헬레나가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그건…."
바로 그때.
척. 척척. 척.
하늘에서 성좌들이 한 명씩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성유계에서 넘어온 대부분의 성좌들이 영주성 안에 있는 정원을 가득 메웠다.
켓 베이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항상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티아루도는 간만에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너, 너희들이 모두 다 넘어온 거야…? 언제?]
켓 베이커가 물었고, 헬레나는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간단히 얘기할게요.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오르카 왕국에 있는 마왕 사탄을 잡으러 갑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