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18화
제318화
박막순과의 수다가 한창 무르익으며 이야기꽃을 피워갈 즈음이었다.
똑똑.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헬레나가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냐."
"……?"
헬레나는 뛰어왔는지 연신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들이 떼로 몰려왔어요."
"뭐? 누가 몰려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성좌들이요! 지금 밖에서 떼거지로 몰려와서 영주님을 찾고 있다구요!"
헬레나의 외침과 동시에 놀란 박막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흐미, 이게 무슨 일이여. 시방."
"그러게나 말이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 갑자기 성좌들이 왜 여기로 몰려왔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밖에서 다수의 성좌들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밖으로 나가보라고 말합니다.]
나와 박막순과 헬레나는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꽤 멀지 않은 곳에서 성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예 영주성 안에 들어와서는 야유회 온 것처럼 퍼질러져 있었다.
"……."
"……."
"……."
우리 셋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변에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감히 그들을 어찌하진 못했다.
성좌들이 뿜어내는 별의 힘이 무척이나 위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아틀라스가 존재감을 발산했다.
그 순간 퍼질러져 있던 성좌들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들도 프로메테우스와 아틀라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물었다.
"왜 날 찾아왔지?"
[그대가 날씨를 요리하는 자인가?]
"그렇다면?"
성좌들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몇몇은 상처도 입은 것 같았다.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있다가 바로 이곳으로 온 것처럼 그들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휴우, 다행히 잘 찾아온 모양이네.]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방금 내게 말을 건 여인의 정체를 알곤 속으론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황도 12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백양궁 '아리에스'가 분명했다.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온 거지?
아니, 어째서 성좌들을 우르르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인지 그 저의가 궁금했다.
그때. 아리에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쉴 곳이 필요하다.]
* * *
북극, 툰드라 드래곤의 얼음성.
시린 눈보라가 짙은 어둠을 몰고 오는 늦은 저녁.
툰드라 드래곤은 오랜만에 북극의 하늘을 바라보며 오로라의 전경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늘의 선물과도 같았다.
색색으로 물든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그 사이로 비치는 별빛은 지금까지 모은 그 어떤 반짝이는 것보다도 휘황찬란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다면 바로 옆에 가져다 두고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반짝이는 것을 모으는 취미가 생긴 것이 말이다.
[…하아,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툰드라 드래곤이 취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릿발 같은 눈을 하늘로 고정시켰다.
바로 그때.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대전 너머로 들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무척이나 거침없었다.
어쩌면 겁이 상실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히 이 성이 누구의 성인 줄 알고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오는 것인지.
'누구지?'
오랫동안 이 성은 황제펭귄 말고는 누구의 방문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찾아온 인간에 이어 또 누가 찾아왔는지 그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툰드라 드래곤은 저 문 너머로 들어올 존재가 궁금했다.
그래서 천천히 얼음으로 된 옥좌에 다리를 꼰 채 기다렸고, 끼익- 잠시 뒤, 문이 열리며 흑색의 갈기를 자랑하는 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오만의 마왕 루시퍼였다.
[호오. 그대는 왠지 낯이 좀 익군. 우리 구면이던가?]
툰드라 드래곤이 흑사자에게 물었다.
루시퍼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순간.
찌이잉-!
옥좌에 앉은 툰드라 드래곤의 손끝에서 냉동 광선이 쏘아졌다.
루시퍼는 웃으며 냉동 광선을 맞았다.
콰드드득!
루시퍼의 몸이 겉에서부터 천천히 얼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시퍼는 그저 웃었다.
천천히 그의 권능인 상상의 실체화를 사용하였고, 루시퍼는 어느새 온몸에 뜨거운 불이 피어오르며 차가운 얼음을 녹여냈다.
툰드라 드래곤의 눈이 살짝 뜨여졌다.
[놀랍군. 이곳에서 불을 피워내다니. 용건이 뭐지?]
[날 모르겠나. 툰드라 드래곤이여.]
[흐음…?]
툰드라 드래곤이 턱을 매만지며 눈앞의 흑사자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툰드라 드래곤은 눈앞에 있는 흑사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유피테르의 친위대였던 황도 12궁의 전 대장이었던 레굴루스와 닮아 있었다.
[살아 있었나? 마계로 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루시퍼가 씩 웃었다.
그저 긴말은 필요 없이 루시퍼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툰드라 드래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너였구나. 피닉스 이그누르를 죽인 자가.]
[…글쎄.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지.]
[오늘 얼음 사자상 하나를 얻을 것 같구나.]
드드드드-!
툰드라 드래곤의 마력과 루시퍼의 마기가 공명하며 동시에 들끓었다.
* * *
무역도시 포트렌, 어느 고풍스러운 여관.
"그럼 쉬세요."
[고맙군.]
"아니에요."
탁.
헬레나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또각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아리에스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침대는 무척 불편했다.
[흐음….]
천궁은 모든 가구들을 구름으로 만들기에 무척 푹신한 느낌이었는데, 인간들은 이런 딱딱한 침대를 잘도 쓰는구나.
[잠도 안 오네.]
아리에스는 몇 번 잠을 뒤척이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무척이나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달과 마법의 여신이 본다면 무척이나 좋아할 만한 달빛이었다.
[…좋네.]
지저귀는 벌레 소리와 은은한 야경은 아리에스를 간만에 휴식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최춘택이라는 인간은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라며 아예 건물을 통째로 마련해 주었다.
다른 성좌들도 각자 방에 배정받은 상태였고, 지금은 모두 쉬고 있을 터였다.
[…루페온 님.]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보며 아리에스는 루페온을 떠올렸다.
하지만 별과 자비의 신 루페온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그것이 아리에스는 무척이나 슬펐다.
하지만 아직 울 수 없다.
아리에스는 그의 복수를 하기 전까지 울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후우….]
크게 숨을 한 번 내뱉은 아리에스는 내일 할 일을 떠올렸다.
아까 그 최춘택이라는 인간에게 루페온 님이 죽었다는 얘기를 한 직후.
그는 자신에게 날이 밝으면 바람의 신전에 들러 후에라 님께 그 사실을 전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난데없이 북극으로 가야겠다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때였다.
당장 천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지금은 차원의 문이 막혀 있어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아, 털이 또 엄청 꼬였네.]
황금의 양털을 닮은 아리에스의 머릿결은 악성 곱슬이었다.
그렇기에 자주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리에스는 이상하게도 그 변태 같은 키르키노스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후, 아무리 그래도 그 변태 같은 놈을 떠올리다니. 나도 미쳤지.]
아리에스가 다시 머리를 흔들며 강제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녀는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를 세는 꿈이었다.
* * *
그 시각.
나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북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동수단은 지니였고, 지금 내게 지니보다 좋은 이동수단은 없었다.
참으로 편리한 구름의 정령이 아닐 수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좀 더 빨리 얻을 걸 그랬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이 정도로 편리할 줄이야.
쏴아아아-!
밑에선 큰 파도가 철썩거렸다.
어느새 나는 불칸 화산지대와 마계화가 진행된 마왕성 부근을 지나쳐 거대한 아틀란 해로 들어섰다.
바다에 비친 달빛이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는 북극행이라 그런지 기분이 묘했고, 나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루페온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만 기운들 차려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프로메테우스와 아틀라스는 아까 전 아리에스에게 루페온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계속해서 저런 상태를 하고 있었다.
하긴 스스로를 불사라고 믿었을 텐데, 루페온이 죽었으니 좀 충격이 크긴 하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루페온이 마왕이 된 루시퍼의 발톱에 심장이 찔렸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난 그녀에게 날이 밝으면 이 사실을 후에라에게 알리라고 말했고, 지금 나는 눈의 비각술과 눈의 레시피를 얻으러 갈 겸.
그곳에 있을 눈과 시련의 여신 카디아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오라버니도 그 성좌인지 뭐시기 하는 놈들이랑 얘기하는 거여?"
바로 옆에서 빗자루를 타고 쫓아오던 박막순이 묻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갑자기 생각난 듯.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모여든 성좌들 중에 막순이 네 성좌는 없던데?"
"잉? 내 성좌가 누군지 아는감?"
"피타고라스 아니냐?"
"흐미, 귀신 같은 거. 어떻게 알았는가 몰라."
"하하하하!"
나는 박막순의 반응이 웃겨서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박막순이 이어서 말했다.
"비타고는 지금 오즈에 있어."
"비타고?"
"시방. 발음이 어렵잖어."
"아…."
"아무튼 얘기 들어보니께 성유계인지 뭔지 거기 엄청 살벌했다던데, 잘못하면 비타고도 뒈질 뻔한 거 아녀. 시부럴."
"뭐, 그런 셈이지."
그때. 박막순이 뭔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할 말 있어?"
"근데 그냥 공간 이동해서 가면 편하지 않어?"
"뭐? 너 그거 쓸 수 있었냐?"
"시방. 날 뭘로 보는 거여. 이래 보여도 우리 비타고가 대마법사여. 대마법사!"
허 참.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얘기했어야지.
왜 이제 얘기하는 거야.
"…막순아 그런 건 진작 얘기했어야지."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하지만 박막순은 여전히 무언가를 머뭇거렸다.
"그게 조건이 하나 있는디…."
"조건? 그게 뭔데."
"같이 공간이동 하려면 손을 잡아야혀."
"…손?"
"그려. 손."
박막순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어디다둘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여간 어릴 때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 박막순은 여전한 듯했다.
"뭐 그런 것 같고 새삼스럽게."
나는 박막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메, 남사시러운 거!"
박막순이 반대 손으로 재빠르게 허공에 삼각형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짙은 마력이 우리 둘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슈우우욱-!
잠시 뒤, 우리 둘은 푸른 마력에 휩싸이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