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17화
제317화
저물었던 해가 다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새벽녘.
불어오는 바람이 차디찬 새벽의 이슬을 머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바람의 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굳게 닫힌 철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나는 다시금 철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저 문 너머에 있을 풍희와 케레노스가 걱정되어서였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어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케레노스의 스승인 뮤겐은 플로라와 친했던 하이엘프였다고 한다.
뮤겐은 그중 특이하게 창을 고집하던 독특한 녀석이었고, 우연히 누군가에게 폭풍창을 사사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뮤겐에게 폭풍창을 사사한 것이 개람의 4대 장군 중 하나인 서풍 장군 제피로스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이 풀려도 이렇게 풀릴 줄이야.
"정말이지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깊은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풍희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나는 다시금 철문을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제피로스는 케레노스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제피로스가 다른 4대 장군들을 설득해 케레노스가 풍희에게 폭풍창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중요한 건 과연 풍희가 개람의 병사들을 뛰어넘어 4대 장군을 이길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아까 보았던 풍희의 끈기와 노력이라면 분명히 이뤄낼 수 있겠지.
"그래. 우린 우리의 일을 하면 되는 거니까. 이만 돌아가볼까."
* * *
에레보스, 제우스 길드 근거지.
기나긴 고통과 치료가 반복되던 밤이었다.
카미유의 극진한 보살핌과 그녀가 고안한 신성 형화 침술은 마이클의 고통을 덜어내 주었고, 마침내 카미유는 마이클과 연결된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기운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옆에서 김수정이 함께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쨌든 고생한 둘은 옆방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고, 그런 마이클의 곁을 지키는 건 백무열과 이누무시키.
그리고 마이클의 절친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뿐이었다.
그들 셋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이클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으음…."
그리고 마침내 마이클이 깨어났다.
"정신이 좀 드나?"
[역시 카미유의 치료는 최고군.]
"마이클 괜찮아?"
백무열, 이누무시키, 데미안이 동시에 말했고, 마이클은 그런 셋을 슥 쳐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병실이야. 카미유가 널 치료했어."
데미안의 말에 마이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분명 카미유가 침을 놓아 자신을 잠들게 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분명….
"…성공했나?"
그 물음의 뜻을 모르지 않는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마이클의 상실감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 네 몸에 있던 마기는 모두 제거됐어."
"……."
그리고 마이클은 아무 말 없었다.
그저 허무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은 스타 프루츠 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제 남은 건 추락하는 것일까?
"…너무 상심하지 마라. 사람은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머물 순 없는 법이지.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야.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냐."
마이클은 자신을 위로하는 백무열을 보았다.
어째선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이클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이나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 또한 지나간다라….'
하나는 사람이 잘 나갈 때, 이 또한 지나가니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로 들렸고, 또 하나는 사람이 힘들 때 이 또한 지나가니 참고 버티어 다가올 행복을 만끽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마이클은 백무열이 후자의 뜻으로 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이클은 그런 백무열의 말을 가슴 깊이 되새겼다.
앞으로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말 같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음, 그래. 다시 눈빛이 돌아왔구나. 이제야 너 다워."
백무열이 그런 마이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이제 마이클은 자신과 대련을 하지 못할 터였다.
이토록 재능있는 젊은이가 힘을 잃어 축 늘어진 모습이 백무열은 가슴이 아팠다.
마이클은 간만에 본 손자와 같은 재능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이누무시키가 허리춤에 찬 검에 한쪽 팔을 걸친 채, 견족 특유의 귀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혹시 내 성애자(星愛者)가 되지 않겠나?]
"……!"
"……!"
마이클과 백무열이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이른 아침부터 나는 오랜만에 식칼을 잡았다.
케레노스와 풍희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자극을 받아서였다.
그동안 요리에 너무 손을 놓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쨌거나 내 본질은 요리사였기에 초심을 되찾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어쨌건 나는 메테우스의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얼마 전 얻은 구름의 레시피를 이용해 날씨를 요리에 표현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따뜻한 햇살과 푸근한 구름과 시원한 바람이 뒤섞여 하나의 요리가 되어 접시에 올라갔다.
그것은 진정한 날씨 요리사로의 첫걸음 같은 것이었다.
"와, 저 구름 좀 봐!"
"저 태양은 무슨 맛일까?"
"접시에 부는 바람의 냄새가 여기까지 나!"
어마어마한 버프까지 걸려버리는 날씨 요리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심지어 주변에선 갑작스레 경매가 시작되어 내 요리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
참고로 경매는 지나가던 헬레나가 시작했는데, 우연히 날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며 이건 팔아야 하는 거라며 무척이나 눈을 빛냈다.
어쨌든 내가 만든 요리들은 정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헬레나의 상술은 아렌과의 만남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여 엄청난 후려치기로 유저들을 호구로 만들어버렸고, 그것은 내게 가히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끙, 이젠 좀 쉬어야겠다."
그리하여 지금은 머리 위로 태양이 내리쬐는 열두 시 정각.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유저들이 몰려들며 사진 찍어달라며 달려들었다.
한 사람씩 찍어주기 귀찮아서 그냥 단체 사진 한 방으로 해치웠다.
어쨌든 이젠 쉬어야 할 때였다.
"후우. 아크스타그램이나 들어가 볼까."
[아크스타그램에 접속 중입니다….]
접속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내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춘택(69세)[한국]
[게시물3]
[팔로워100,897]
[팔로잉 139]
-염병하네.
"흐미, 벌써 10만이 넘어부렸네."
얼마 전에 보았을 때 만해도 분명 5만 언저리였는데, 어느새 내 팔로워는 10만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게 다 미도가 올리라고 했던 그 실시간 라이브 방송 영상 때문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엄청나긴 하네."
나는 자연스레 구름 과자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찍었던 단체 사진을 아크스타그램에 올렸다.
몇 자 적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사진)염병할 것들과 한 컷.jpg]
@최춘택_ 염병하네.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하트와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미도 님이 당신의 글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음?"
나는 곧장 미도가 달은 댓글이란 걸 읽었다.
@미도_ 할아버지. 해시태그 하셔야죠….
아차,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해시태그란 것이 무척이나 귀찮은 것이다.
뭔 놈의 쓸 말이 이렇게 많은지 원.
"에이, 귀찮게 뭔 해시태그여. 안 해 안 해."
나는 곧장 미도의 댓글에 답을 달았다.
@최춘택_ 귀찮어.
동시에 어마어마한 수의 댓글들이 내 밑으로 주르륵 달렸다.
└ㅋㅋㅋㅋㅋ 귀여우셬ㅋㅋㅋ
└세상 쿨하신 할아버지.
└두 분 사이 너무 보기 좋아요.
└오래오래 사셔요.
└만수무강하세요.
뭐, 대충 이런 댓글들이다.
그래도 좋은 말이 많이 달려서 다행이다.
"뭘 그렇게 헤실헤실 쪼개고 그려."
"……?"
갑작스럽게 다가온 목소리에 놀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도 없었는데 어떻게?
"뭐야, 너 언제 왔냐."
"아까 왔지. 요리에 엄청 빠져있드만. 시방."
그녀는 박막순이었다.
박막순은 타고 온 빗자루에서 내려오더니, 지팡이를 짚으며 내게 걸어왔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빙긋 웃으며 내가 만든 요리를 내밀었다.
"한 입 할 텨?"
"안 줬으면 서운했을 거여."
"그럼 조용한데서 먹자."
"좋지."
나는 그녀를 영주성으로 데려왔다.
내가 요리를 접자 주변의 유저들은 금세 사라졌고, 어느새 그녀와 나는 구름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함께 날씨 요리를 먹었다.
와, 누가 만들었는지 기가 막히게 맛있다.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겄다."
"아따. 더럽게 맛있네."
"……."
더럽다는 건지 맛있다는 건지 모를 말이로군.
어쨌건 표정을 보아하니 맛있는 것 같으니 일단 다행이다.
그래도 그렇지 할망구가 말을 해도 꼭….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안 궁금혀?"
"궁금하지. 말 나온 김에 어떻게 살았나 얘기 좀 해봐라."
"끌끌끌. 하여간 오라비도 무심한 건 여전하다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박막순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참으로 오래된 옛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윈디아, 바람의 언덕.
바람꽃 아이올리아와 드넓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진 바람의 언덕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많은 유저들이 이곳을 지나 새로운 모험을 하기 위해 돌아다녔고, 또 반대로 어떤 유저들은 다시 뮬란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바람의 언덕의 꼭대기는 언제나 사람이 붐비며 호황을 이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아크 대륙에서 가장 노을이 예쁜 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월드 대항전으로 인해 그 인기가 한층 더해진 이곳은 반드시 아크 스타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봐야 할 명소로도 유명했다.
어쨌건 달과 별이 사이좋게 우애를 나누는 늦은 저녁.
한 커플이 야경을 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때였다.
우우웅-!
바람의 언덕 꼭대기에 갑자기 포탈이 열리더니, 뱉어내는 것처럼 무더기로 정체불명의 인영들을 쏟아내었다.
"뭐, 뭐야. 뭐야!"
"꺄악! 자기야 무서웡!"
연인을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아든 남자는 정체불명의 인영들을 경계하며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인영들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더불어 적도 아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성유계에서 도망쳐 나온 성좌들.
그 중엔 백양궁의 주인이자, 현 황도 12궁의 대장인 '아리에스'가 있었다.
[아으, 머리야….]
아리에스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리에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성좌들도 모두 머리를 부여잡으며 각자 신음을 내뱉고 있었고, 몇몇은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엔 웬 인간 남자가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눈빛이 겁을 먹은 것이 적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검을 거둬라. 우린 적이 아니니.]
"아, 네. 죄송합니다."
인간 남자는 갑자기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더니, 마치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뒤섞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에스는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이곳이 바람의 언덕인가?]
대답한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인간 여자였다.
"맞아요. 이곳이 바람의 언덕이에요."
다행히 차원의 문은 제대로 된 장소로 보내준 모양이다.
아리에스는 다시 한번 아까 전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을 포함해 다른 성좌들이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건 바람의 신수인 아이올로스와 늑대 성좌 레무스가 마족들로부터 지켜줬기 때문이었다.
아이올로스는 분명 자신에게 이렇게 얘기했었다.
날씨를 요리하는 자를 찾으라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성좌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지금 상황에서 그 뿐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날씨를 요리하는 자는 아리에스도 알고 있었다.
과거 라그나로크가 일어나기 전, 성좌들에게도 무척 유명했던 날씨 요리사 '알렉서스'는 한때 궁좌의 지위에 오를 뻔 했던 인간이었다.
"……."
잠시 생각에 잠긴 아리에스는 날씨를 요리하는 자를 찾기로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이올로스와 레무스가 남긴 마지막 의지를 아리에스는 지킬 의무가 있었다.
[날씨를 요리하는 자는 어디에 있지?]
아리에스가 다짜고짜 묻자,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가 동시에 서로의 눈을 보며 마주쳤다.
이곳 아크 대륙에서 날씨를 요리하는 건 단 한 사람.
더군다나 유저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었기에 두 사람은 모를 수가 없었다.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최춘택 할아버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