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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316화 (31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316화

제316화

윈디아, 실피드 기사단 연무장.

타는 듯한 주홍빛 노을을 등진 채 남자들이 단체로 가부좌를 틀고 좌선에 빠져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케레노스는 상의를 탈의한 몰골로 벌써 두 시간째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의 뒤로 다른 기사들 또한 같은 몰골로 함께 명상에 잠겨 있었고, 케레노스는 다리가 저려와 신음을 흘리는 다른 기사들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정신을 집중하였다.

"……."

케레노스는 지난번 벨페고르와의 싸움에서 있었던 일전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이렇게 전투 후에 자신을 되돌아보며 싸움을 복기를 해보는 것은, 무력 발달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케레노스는 다른 기사들에게도 이런 명상을 자주 종용했고, 지금 현재 스스로 실천을 하면서 다 함께 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으음…."

"윽. 다리가…."

"피가 안 통해…."

뒤에서 계속해서 기사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케레노스는 그런 기사들의 고통을 무시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참아라. 이것 또한 수련의 일부다."

"으음…."

"으윽. 제길…."

하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불만 어린 신음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그런 케레노스의 바로 뒤에 앉아있던 부단장 베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장님. 이건 가혹 행위입니다."

"응, 아니야."

"제 나이 이제 마흔입니다."

"나도 서른 중반이야."

"제가 단장님보다 네 살이 더 많습니다만."

"그래서 혼자만 빠지겠다고…?"

베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다.

다른 기사들이 무척이나 따가운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다.

베커는 순간 케레노스에게 말렸음을 깨닫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크흠."

그렇게 베커는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명상에 집중했다.

케레노스는 속으로 고소를 삼키며 웃었다.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던 베커가 오랜만에 꼼짝 못 하는 모습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저나 더 강한 힘이 필요한데….'

케레노스는 지난 싸움에서 벨페고르에게 폭풍창의 제3식인 태풍을 썼었다.

지금은 모두 수복되어 다시 활기를 되찾았지만, 한때 윈디아의 절반 가까이를 날려버렸던 기술이었다.

그런데 벨페고르는 그것을 맞고도 끄떡없었다.

케레노스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마, 생채기 하나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앞으로 더 강한 적들이 튀어나올 텐데, 내가 너무 안이했던 건가….'

케레노스가 폭풍창의 묘리를 다시금 되짚어보며, 스승인 뮤겐을 떠올렸다.

어머니인 플로라의 오랜 지인이었던 뮤겐.

그는 어머니와 같은 하이엘프 출신이었다.

엘프들 중에서도 특히 괴짜였던 그는 아무도 창이란 무기를 파지 않을 때 혼자만 창술을 팠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에게 폭풍창을 사사 받았고, 그렇게 오래도록 대륙에서 창신이라고 불렸었다.

케레노스는 이제야 스승의 경지 가까이 올라섰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스승의 창술이 아닌 자신만의 폭풍창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무척이나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뮤겐은 하이엘프라서 수명이 길었기에 오래도록 창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케레노스는 인간이었기에 창에만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급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스승님이 살아계셨으면 좋으련만….'

케레노스가 다시금 스승인 뮤겐의 얼굴을 떠올리던 바로 그때.

갑자기 강한 돌풍이 몰아치더니, 자신의 목이 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큭!"

이미 발은 땅에서 떨어진 지 오래.

무언가 붕 뜨는 느낌이 드는 것이, 벌써 하늘에 떠올랐음을 깨달은 케레노스가 눈을 부릅떴다.

"…누, 누구. 케엑!"

"시끄럽다. 이놈아."

퍼억!

엉덩이가 아릿한 것이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케레노스는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다.

부단장 베커를 비롯한 실피드 기사단들은 갑작스러운 돌풍과 함께 사라져 버린 케레노스의 빈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가장 먼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선 것은 부단장인 베커였다.

"…밥 먹으러 가자. 보나 마나 영감님한테 붙잡히신 모양이다."

기사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케레노스의 생사는 관심이 없었다.

* * *

잠시 뒤, 나는 케레노스를 데리고 개람들이 있는 바람의 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케레노스는 갑작스러운 납치가 불만스러운 듯 무척이나 짜증이 나 있었다.

풍희가 케레노스를 보며 비명을 지른 것은 그때였다.

"꺄악!"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풍희는 인간이 아닌데 왜 비명을 지르는지 모르겠다.

일단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마침 남아있는 가죽 갑옷이 하나 있구나. 입어라."

케레노스는 또 한 번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내가 준 가죽 갑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풍희는 연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훔쳐볼 거면 왜 가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니, 영감님.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갑자기 이렇게 사람을 납치하는 법이 어딨습니까?"

"어딨긴 여깄지."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미 말로는 내게 안 된다는 걸 아는지, 케레노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체념을 했다.

나는 축 늘어진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어깨동무를 했다.

"갑자기 왜 친한 척이십니까?"

"우리 원래 친했다만."

"아닌데요. 이제 좀 덜 친해지려 합니다."

"새삼스럽게 그러지 말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케레노스의 옆구리로 두툼한 돈뭉치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케레노스의 입꼬리가 씰룩 씰룩거리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태세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어흠, 험험, 뭘 이런 걸 다…. 그래서 절 데려온 용건이 뭡니까?"

하여간 이놈은 돈 없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게 틀림없다.

나는 곧장 케레노스에게 이곳으로 데려온 경위를 설명했다.

케레노스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풍희한테 창술을 좀 가르쳐 달라구요?"

"그래. 저놈들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바람의 탑 꼭대기를 가리키자, 케레노스의 눈빛이 진지해지며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케레노스는 아까부터 저쪽이 신경 쓰여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윈디아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묘한 표정의 케레노스는 눈앞의 개람(鎧嵐)들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전에 우선 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봐야겠군요."

바로 그때.

개람의 4대 장군 중 하나인 남풍 장군 노토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재밌군. 인간이 우리 개람의 수준을 확인하겠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말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지."

노토스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뒤편에 있던 개람의 병사 하나가 흩어지며 케레노스의 건너편에 나타났다.

케레노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숫자가 너무 적은데?"

"하하하하! 재밌는 인간이잖아!. 이봐! 좀 더 보내보도록 하자고!"

"오랜만의 여흥도 나쁘지 않겠지."

"후후. 아주 재밌는 대결이 될 것 같군요."

차례대로 북풍의 보레아스, 동풍의 에우로스, 서풍의 제피로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케레노스의 건너편엔 10명의 개람의 병사가 서게 되었다.

온통 바람으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그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강한 바람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최강이었고, 또한 최고의 친위대였다.

"와라."

낮은 케레노스의 음성과 동시에 개람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나와 풍희는 살짝 뒤로 물러나 그런 케레노스를 보았다.

케레노스의 손엔 어느새 바람의 창이 들려져 있었다.

"폭풍창, 제1식. 돌풍."

바람의 창끝에서 퍼져나간 돌풍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며 전방의 개람의 병사들을 때렸다.

퍼퍼퍼퍼펑-!

맞바람이 만나 강렬한 폭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승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당연히 승자는 케레노스였다.

개람의 4대 장군들은 모두 입을 꾹 닫은 채, 그런 케레노스를 보았다.

그 순간.

서풍 장군 제피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너, 뮤겐과 무슨 관계지?"

* * *

아크 대륙의 동쪽, 어둠의 대지. 다크문.

사시사철 어둠만이 가득한 이곳은 '다크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각종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흑색 안개는 태양을 가렸고, 뱀파이어들은 그런 차가운 어둠의 땅 아래서 피를 마시며 살아갔다.

그리고 이곳은 뱀파이어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동대륙 근처였기에 도깨비들이 무리 지어 살기도 했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무두르와 같은 태초의 존재인 도깨비 왕이었다.

뱀파이어와 도깨비들은 언제나 서로를 적대하며 대치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이 차가운 다크문의 패권을 다투며 몇백 년 동안이나 싸우다가 간만의 휴전으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슈와아악-!

그런 다크문의 가장 중앙에 자리한 땅.

난데없이 차원의 포탈이 열리며 뱉어낸 것은 전갈의 갑주를 몸에 두른 남자였다.

한때 '욕망의 파라오'라는 별명을 지녔고, '안타라스'라는 이름을 가졌었으며, 이젠 '아스모데우스'로 타락해버린 마왕이 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하아….]

아스모데우스가 진땀을 흘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팔에 꽤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망할 루페온…! 죽어서까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간신히 루페온의 심장을 루시퍼의 발톱으로 찌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루페온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무시할 수 없는 상처를 루페온에게 입었고, 그것은 차원의 문을 넘어 인간계, 이곳 다크문으로 오는 동안 그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통증이 그의 팔을 휘감았다.

[끄응.]

아스모데우스는 이를 악물며 통증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다크문의 서쪽인 뱀파이어들의 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고, 그동안 천궁의 세작 노릇을 했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아스모데우스는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한 인간을 떠올렸다.

'마이클. 아주 재밌는 장난감이었지. 후후.'

사실 아스모데우스는 마이클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방금 느꼈다.

결국, 자신은 마이클을 버렸고, 마이클도 자신을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된 건 운명이었을 것이었다.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지만, 아스모데우스는 마이클을 자신의 권속으로 삼지 못한 것이 내심 아까웠다.

하지만 권속이야 다시 구하면 될 일.

지금 중요한 건 그녀를 만나는 것이었다.

'스피카, 아니, 릴리스. 내가 왔다…!'

욕망의 여왕, 마왕 릴리스는 과거 처녀궁의 주인이었던 '스피카'였다.

스피카는 당시 라그나로크에서 배신한 궁좌들의 편에 섰고, 그렇게 스피카는 마기에 물들어 마왕이 되었다.

어느 누구보다 순결했던, 단 한번도 흡혈을 하지 않았던 뱀파이어였던 그녀는 결국 마기에 물들었고, 현재 그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 되어 뱀파이어들의 여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라스는 그런 스피카의 모습도 좋았다.

순결했던 지난 모습도 좋았지만, 타락한 지금 모습마저도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 되건 안타라스는 그저 그녀만을 바라볼 것이었다.

안타라스는 마침내 릴리스가 있는 오래된 성에 들어섰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잘 시간이지만, 릴리스는 깨어 있을 것이었다.

안타라스는 대전으로 들어섰고, 주변엔 온통 고풍스러운 화풍의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타라스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와요. 나의 사랑. 마침내 숙원을 이루셨군요.]

[아아, 릴리스. 무엇을 하는 중이었소.]

[장난감이 있어서 잠깐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있으니, 치워 둬야겠군요.]

릴리스가 눈에서 안광을 발하더니, 장난감이라 불린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는 어딘가에 앉더니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였다.

안타라스는 릴리스를 품에 안아 침대에 뉘었고, 남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런 둘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 스슷. 슷.

그의 붓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나는….]

남자의 이름은 모네트 다빈치.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던 화가 성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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