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09화
제309화
로믈라나와 펜릴이 등장하자, 하늘은 흑야와 백야가 번갈아 나타나는 기상천외한 날씨를 만들어내었다.
이어진 것은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서 일어나는 흑야랑과 밝은 백야에서 튀어나오는 백야랑들이 저 멀리 있는 마족들을 물어뜯기 위해 내달리는 것이었다.
"가자!"
"다 쓸어버려!"
로믈라나와 펜릴이 가세한 뒤부터 토벌군의 사기는 한층 더 충만해졌다.
유저와 NPC를 가리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뛰쳐나갔고 저 멀리 보이는 우로보크가 뿜어내는 마기 따위는 이미 잊은 듯이 보였다.
콰자작-!
가장 앞서 달리던 로믈라나가 최전방에 있던 마족 하나를 씹더니, 가볍게 찢어발기며 던져버렸다.
로믈라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냉독이 실린 이빨과 발톱으로 우로보크가 이끄는 마족들을 쓰러트렸다.
펜릴도 그 기세를 몰아 들이닥쳤고, 이어서 흑야랑과 백야랑들이 뒤섞이며 전장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
그리고 나는 그런 전장의 한복판에 서서 한 사람을 불러냈다.
그동안 수련에 매진하고 싶다고 해서 부르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녀석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만큼 눈앞의 우로보크와 소처럼 생긴 타우루스 마족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솔로몬의 반지를 사용합니다.]
[스킬: '우정의 동반자'를 사용합니다.]
[유저 '백무열'님이 소환됩니다.]
슈와아악-!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백무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백무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자 나는 다짜고짜 녀석의 등을 툭 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백무열이 깜짝 놀란 듯 흠칫거리며 소리쳤다.
"너,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바람의 길을 타고 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무열이 그런 내 속도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
"네놈만 강해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감히 날 그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넣어? 이 망할 놈의 자식. 넌 이따가 회초리 좀 맞을 줄 알아."
그렇게 백무열은 다짜고짜 내게 매질을 예고하며, 새로 얻은 회초리를 시험하겠다는 듯.
전방으로 거대한 횡베기를 그었다.
사아아아-!
무속성의 예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실선이 전방으로 뻗어 나가더니, 옥염의 타우루스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콰콰콰쾅-!
그 기세가 마치 태산과도 같았다.
* * *
불칸 화산지대, 벨페고르의 둥지.
벨페고르가 인간계에 강림한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그가 죽인 피닉스 이그누르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벨페고르는 그 피닉스의 둥지를 빼앗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주변의 화산들은 마기로 물들어 푸른 옥염이 넘실거렸고, 그가 일으킨 옥염의 군세는 주변을 집어삼키며 또 하나의 작은 마계를 만들어냈다.
[흐음, 따분해. 따분하다고.]
과연 나태를 관장하는 마왕답게 벨페고르는 무척이나 게을렀다.
그는 언제나 둥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바깥의 인간들이 토벌군이란 것을 만들어 몇 번 쳐들어온 적도 있었지만, 그가 만들어 낸 옥염의 군세는 이곳에서 천하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온통 뜨거운 화산이 가득했기에 그의 힘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피닉스 이그누르가 이곳을 둥지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루시퍼는 대체 뭐하고 있는 건지. 원.]
후욱.
벨페고르의 콧김에서 푸른 옥염이 뿜어져 나왔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밀고 내려가 인간계를 멸망시키며 짓밟고 싶었지만, 루시퍼가 그런 자신을 만류하였다.
아직 약속한 열흘이 아직 안 지났다나 뭐라나.
어쨌든 벨페고르는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자신의 아들 미노타를 죽인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잊어서도 안 되고, 절대로 잊을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벨페고르 님."
[으음, 우로보크.]
"인간들이 또 쳐들어 왔습니다."
벨페고르가 이끄는 옥염의 군세 2인자.
마계 장군 우로보크가 벨페고르에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벨페고르는 귀찮은 듯 귀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또 그 인간들이냐?]
"예. 같은 인간들입니다."
[끈질긴 놈들. 가서 밀어버려라. 이번엔 아예 화산지대 바깥으로 쫓아내버려. 이젠 상대하기도 귀찮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우로보크가 고개를 숙이더니 쿵쾅거리며 나갔다.
그는 언제나 벨페고르가 귀찮아하는 일을 해치우는 성실한 마계 장군 중 하나였다.
벨페고르에겐 다른 마계 장군들도 있었지만, 이번에 마계에서 먼저 넘어온 것은 우로보크 뿐이었다.
'흐음.'
벨페고르가 턱을 매만졌다. 어쨌든 이번에도 인간들은 옥염의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것이었다.
벨페고르는 언제나처럼 신경 쓰지 않고 낮잠을 청했다.
그렇게 잠에 빠져든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쿠구구구-!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며 한바탕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서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낮이 된 것처럼 하늘이 밝아졌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벨페고르가 눈을 떴다.
[으음. 뭐야.]
벨페고르가 하품을 쩍 하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천궁에서 궁좌로 있을 적.
신들의 밭을 경작할 때마다 늘 자신을 괴롭혀왔던 늑대들을 말이다.
[레무스, 로믈라나. 그 하찮은 성좌들인가-!]
노기 어린 벨페고르의 외침이 둥지 너머 활화산들을 떨게 만들었다.
나태의 마왕.
옥염의 벨페고르는 그제야 자신의 나태를 버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나태의 마왕이시여…."
콰직!
로믈라나의 차가운 이빨이 마계 장군 우로보크의 목을 물어뜯었다.
우로보크는 속절없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와아아아-!
함성은 들불처럼 번져나가며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가 들고 있는 병장기를 치켜들며 승리를 만끽했고, 그동안 있었던 패배의 설움을 한 번에 씻어내려는 듯 우렁찼고 활기찼으며 드높았다.
"……."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싸움에 모두들 약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라면 옥염의 군세들은 다시 타오르는 불이 되어 되살아나야 했지만, 그것은 박막순이 데려온 마법사와 마녀들이 각종 빙결 마법과 물 마법으로 막아내었다.
짙푸른 옥염은 다시 타오르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흐미. 오라버니는 여전혀야. TV로 볼 때는 실감이 안 났는데 말이여."
박막순이 늙수그레하게 웃었고, 바로 내 옆에 있던 백무열은 '누구?'라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으니까.
"로믈라나. 이 부근에 벨페고르가 있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기세를 몰아서 쳐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랬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쇠뿔을 뽑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벨페고르의 뿔을 말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찾아 왔거든요.]
"…뭐?"
드드드드-!
그 순간 땅에 지진이 일어나며 곳곳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부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수처럼 솟아오른 푸른 용암은 마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늘로 솟구쳤다.
"이번엔 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이어서 솟구친 푸른 용암이 한곳으로 뭉쳐지더니, 거대한 형상의 타우루스를 하나 빚어냈다.
그 크기가 마치 거대한 산과 같았다.
쿠우웅!
벨페고르가 땅을 딛고 일어섰다.
푸른 용암으로 빚어진 거대한 소가 알 껍질을 깨는 것처럼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나태의 마왕을 앞에 두고 나태하느냐. 너희들의 나태함이 곧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크하하하-!]
벨페고르가 온몸에 들끓는 마기를 끌어올리더니, 이미 죽은 줄 알았던 타우루스 마족들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옥염이 실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나태의 지옥을 보여주겠노라-!]
그렇게 벨페고르에 의해 우리들은 다시금 옥염의 군단과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형세는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는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었다면, 이번엔 둘러싸인 것이 무척이나 불리한 형세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도저히 승산이 없어."
"아아, 이곳에서 죽는 건가."
급격히 사기가 저하된 아군들이 주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쉽사리 목을 내줄 순 없는 거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한다.
그래도 살아나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알데바란. 많이 변했군요.]
[음, 넌 로믈라나인가. 오랜만이군. 알데바란이라….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을 쓴 적이 있었지. 레무스는 함께 오지 않은 건가? 하긴 내가 한쪽 눈을 앗아가서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하하하하-!]
벨페고르의 마기가 담긴 웃음에 전신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짙은 마기였다.
바로 그때. 펜릴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아버지의 원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펜릴이 재빨리 벨페고르의 뒤꿈치를 물었다.
콰득!
벨페고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냉독인가. 너희들의 냉독은 언제나 몸서리처칠 정도로 싫었지. 하지만 이제 그런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라.]
"……!"
화륵!
벨페고르의 옥염이 펜릴의 냉독을 녹여버렸다.
펜릴이 재빨리 떨어지며 다시 그림자로 숨어들더니 로믈라나의 옆에서 솟았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뒤꿈치가 약점이 아닌 건가.
본디 알데바란의 약점은 뒤꿈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로믈라나도 알고 있었고, 아마 펜릴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젠 통하지 않는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마계 장군 우로보크. 다시 한번 목숨을 주신 나태의 마왕께 감사드립니다."
그때. 다시금 살아난 마계장군 우로보크가 벨페고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벨페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곳에 모여든 우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죽여라.]
"존명."
모오오오-!
다시금 타우루스 마족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일행들은 재빨리 다시 전투태세에 임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불리한 싸움이 될 터였다.
"…결국, 불러야 하나."
사실 아까 전 싸움에서 나는 이 녀석을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피닉스의 알을 깨우는데, 심력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이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으리라.
"솔라."
화아아악-!
이제는 좀 더 강해진 태양의 힘을 갖게 된 솔라가 허공에 휘몰아치듯 나타났다.
벨페고르는 그런 솔라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을 감지한 듯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나는 솔라에게 말했다.
"폭염의 군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