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08화
제308화
"아, 나 막순이여. 막순이. 진짜 모르겠어?"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막순이? 막순이가 대체 누구야?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
"뭐시라. 처음 듣는다 고라? 아이고, 박막순 65년 인생 헛살았네. 헛살았어. 어렸을 때 그렇게 험한 곳에서 의지하면서 같이 자랐는데, 그런 동생을 몰라보네. 시방. 아이고 내 신세야-!"
아까 전 파괴적인 광선을 쏟아내던 그 할망구는 어디 갔냐는 듯.
눈앞의 박막순은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난데없는 땡강 부리며 울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런 나와 박막순에게로 향했다.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이 무안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 이미지가 할머니를 울려버린 못된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잠깐만. 박막순?
바로 그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이었다.
분명 몇 달 전 꿈에서 끔찍한 피 냄새와 뒤섞인 흙탕물이 코를 찔렀고, 눈을 매섭게 뜬 교관이 새끼 돼지라고 소리치며, 채찍을 휘두르는 고약한 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분명 파도가 치는 절벽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매달려 있을 때였을 것이다.
내 옆에는 추위에 떠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같은 고아였던 난 그녀와 여러모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었던 기억났다.
그리고 그 여동생의 이름이 아마….
그 순간 눈앞의 박막순과 꿈에서 보았던 여동생의 얼굴이 겹쳐졌다.
"설마, 그때 절벽에서 떨어졌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막순은 갑자기 뚝 울음을 그치더니, 손을 털고 일어서며 구시렁거렸다.
"시방. 이제야 기억이 났나보구먼."
방금까지 울었던 건 분명 가짜 울음이었을 것이다.
정말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자유자재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내심 놀랐다.
아니, 근데 진짜 막순이라고?
걔는 분명 그때….
"너 죽은 거 아니었…."
"살아났지! 아, 지금 보고도 몰러?"
"아…."
나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당사자가 살아났다는데 뭐라고 하겠나.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지금 내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인간 놈들의 발악이 제법이구나-!"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등장한 존재가 있었다.
온몸이 푸른 옥염으로 둘러진 거대한 소.
그 생김새는 언젠가 내가 죽였던 미노타와 쏙 닮아 있었지만, 조금 기괴한 것이 달라 보였다.
"마계의 장군 중 하나인 우로보크라더군요."
어느새 다가온 데미안이 내 옆으로 오더니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함께 미노타 레이드를 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방심하지마라. 저놈은 미노타만큼 강한 것 같으니까."
"예. 아주 잘 알고 있죠."
데미안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저 멀리 있는 우로보크를 노려 보았다.
우로보크는 무척이나 큰 몸집을 자랑해서 마치 하나의 건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격 자체가 주변의 마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입니다. 후우. 저 녀석 때문에 계속 연전연패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지원군으로 와주신 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도 벨페고르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 녀석은 더 크거든요."
데미안이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벨페고르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로보크가 건물이라면 벨페고르는 산이었다.
"……."
나는 데미안의 착잡한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박막순의 얼굴을 보았다.
주름이란 주름은 몽땅 우그러트리며 우로보크를 노려보는 박막순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설마, 그 광선 한번 쐈다고 쉽게 이길 줄 알았던 건가?
아무튼 그렇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우선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일단은 눈앞의 우로보크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데미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지원군을 데려왔다."
"예? 지원군이 또 있습니까?"
"있지."
그리고 나는 동시에 흑야의 힘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이 지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더니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나는 머릿속으로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쿠구구구-!
검은 먹구름 사이로 하얀빛이 번쩍이며 작은 천둥이 번쩍거리더니, 그런 흑야를 가로지르며 나타난 하얀 빛줄기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혜성처럼 나타나 이곳 토벌군의 진영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네 발로 선 그것은 무척이나 고고하고 아름다운 늑대였다.
[…드디어 찾았군요.]
백색의 갈기를 가진 로믈라나가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옆엔 펜릴이 함께 서 있었다.
* * *
"헉. 허억…."
"이긴 건가…?"
"물러난 거지. 그냥."
"그래도 다행이야. 더 이상의 피해는 없는 것 같아."
제우스 길드원들은 모두 지친 기색으로 땅바닥에 '大'자로 드러누웠다.
그들은 가까스로 아슈타르를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는데, 그렇다고 죽였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아슈타르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아슈타르는 만화 영화에서나 할 법한 "두고 보자."라는 악당의 대사를 남기며 다음을 기약했고, 이렇듯 아슈타르를 돌아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중간에 나타나 도움을 준 각양각색의 외양을 한 성좌들 덕분이었다.
그 중엔 견소룡의 성좌인 '레이트라' 또한 함께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레이트라.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우끼-! 아니다! 클라우드 산에 들러 일족들을 모두 이끌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내가 더 미안하다!]
지지직-!
레이트라가 하얀 뇌전으로 이루어진 털을 벅벅 긁으며 말하자, 견소룡은 그런 레이트라를 보며 빙긋 웃었다.
과연 레이트라는 사내다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이렇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저들이 네가 말한 그 바라나 일족인가?"
[그래! 모두 한가락 하는 친구들이지!]
견소룡은 레이트라의 뒤편에 서 있는 커다란 원숭이들을 훑었다.
춘택이 형님의 말에 따르면 바라나 일족은 전투를 숭상하는 일족이라고 했었다.
레이트라는 그런 바라나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었다고 했었지.
[이제 잡담은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야 해. 냥!]
두 발로 일어선 검은 고양이 성좌가 말하자, 레이트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참고로 고양이 성좌는 긴 생머리를 기른 여자처럼 보였다.
물론, 얼굴은 고양이였지만 말이다.
[흥. 뒤에서 피리나 불어대는 고양이가 뭘 알겠냐.]
[뭐라구. 냥! 조금 세졌다고 자랑하는 거냐! 캬아아악-! 힘자랑은 마족들한테나 해라!]
남자 원숭이와 여자 고양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둘을 중재한 것은 양팔에 거대한 얼음 방패를 낀 채 하얀 몰골을 한 사내였다.
그 또한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그만해라. 칠성협끼리 이 무슨 추태냐.]
하얀 몰골의 사내가 한 말에 이어 뒤에서 순백의 로브를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여인의 주변엔 온통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견소룡은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카미유인가.'
언젠가 북극에서 김수정과 함께 동행 한 일이 있었던 견소룡이다.
그때 김수정의 반딧불 능력을 많이 보았기에 견소룡은 단박에 그녀가 카미유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 반가운 느낌이 드는 건 그 탓일 거다.
[흠. 개도 가만히 있는데 고양이가 왜 저러나 몰라.]
[…이보게 데스페라도. 견족일세.]
[시끄러! 이 해골바가지야! 그리고 강아지 넌 왜 가만히 있어!]
[견족은 고양이들처럼 항상 날카롭지 않다네.]
[아오, 말을 말아야지 진짜!]
견소룡은 눈앞의 성좌들이 예상과는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높아 보였던 그들은 겉모습만 다를 뿐.
행동하는 건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선입견을 가졌던 건 자신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마이클이 다가왔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 넌 그 전갈 아저씨 성애자(星愛者)구나? 뭐, 고마우면 생선이라도 좀 내놔. 혹시 가진 생선 있니?]
"아뇨. 없습니다."
[하여튼 인간들이란…. 준비성이 없어요. 준비성이.]
[좀 비켜봐.]
[으악. 이 해골바가지가 냥-!]
이름 모를 고양이 성좌는 계속 투덜거리다가, 뒤편에서 나타난 스켈레톤에게 밀려났다.
그 또한 성좌였다.
물론, 생김새가 사막에서 독수리에게 살점을 파먹힌 카우보이 같았지만 말이다.
[네가 마이클이로군. 제임스에게 얘기 많이 들었지.]
"당신은…."
마이클은 눈앞의 성좌의 정체를 짐작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내 이름은 '데스페라도'. 황야의 무법자라고 불러도 좋아.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무슨…."
데스페라도가 집게손가락을 들더니, 살점도 없는 턱을 긁적거렸다.
[제임스가 좀 사고를 쳤어.]
* * *
헤스페리데스, 구름의 신전 밖 어딘가.
백무열은 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저 허송세월을 보내려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백무열은 강해지고 싶었고, 처음엔 라레투사를 상대하는 거도 버거웠지만, 이제 백무열은 전성기 시절의 날카로운 감각을 되찾은 것처럼 무척이나 날이 선 목검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무열의 목검은 라레투사와의 싸움 도중 부서지고 말았다.
라레투사는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새로운 목검을 주겠노라 선언했고, 놀랍게도 백무열은 이미 새로운 목검을 만들 재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는 인간이 함부로 자를 수가 없는 것.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도 라레투사가 구름의 공방에서 만든 구름 가위가 있어야만 자를 수가 있는 것이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였다.
그만큼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는 단단한 경도를 자랑했다.
라레투사는 구름의 공방에 들어가 밤을 새가며 황금 사과나무 가지를 깎으며 목검을 만들었고, 그렇게 시간은 훌쩍 4일이 흘렀다.
'무슨 목검 하나 깎는데 이리 오래 걸려?'
백무열은 팔짱을 낀 채 뭐 마려운 사람처럼 짝다리를 짚고 서서, 한쪽 다리를 떨었다.
누가 본다면 무척이나 거만한 양아치라고 할 만큼 불손한 자세였다.
'젠장. 혹시 눈치챈 거 아냐?'
사실 백무열은 일부러 라레투사가 목검을 부러트리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내구도가 거의 떨어진 목검이었기에 이미 부러지는 건 당연지사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백무열은 일부러 라레투사가 부러트리게 만들어서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든 것이었다.
목검이 부러졌을 땐 정말 슬픈 얼굴로 애도했고, 다행히 라레투사는 미안하다며 목검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혼자 힘으로 황금 사과나무 가지를 깎을 수 없었던 백무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만한 상황이었다.
'속이는 덴 성공했지만, 나중에라도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면 곤란한데….'
그렇게 백무열이 애타게 라레투사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
"……!"
저벅저벅.
기다리던 발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라레투사가 구슬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그녀의 한 손엔 구름 단검이 들려져 있었는데, 또 다른 한 손엔 백무열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황금 사과나무 가지로 만든 목검이 들려져 있었다.
라레투사가 다가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후우. 인간이 쓸 만한 크기로 만드는 건 무척이나 어렵더군. 도중에 나뭇가지를 몇 개나 부러트렸는지 모르겠다."
백무열은 그제야 라레투사가 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와 자신의 몸집은 다섯 배가 넘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라레투사의 입장에서 백무열이 쓸 목검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해야 했을 것이다.
'크흠, 괜히 미안해지게.'
그래도 백무열은 티를 내지 않았다.
"받아라. 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느니라."
"고맙구먼."
백무열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라레투사가 건네는 목검을 받아들었다.
쉭쉭-!
과연 목검은 훌륭했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타격감도 아주 좋았고, 무게감까지 훌륭했다.
라레투사는 검지를 들고 눈을 감으며, 목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잘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대가 이 나뭇가지의 성능을 살펴보기 전에 해주어야 할 말이 있느니라. 그것은 바로…."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슈와아악-!
"……!"
백무열의 몸이 하얗게 빛나더니 사라지기 시작했다.
라레투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이 만든 목검에 대해 연신 떠들기만 했다.
"그대가 쓰는 마력 발아를 이 목검에 쓰게 되면…. 응? 뭐야. 어디로 갔지? 잠깐만 어이, 이봐! 설마 도망친 거야? 내가 만든 목검만 들고 튄 거냐고-! 이 바보 멍청이 도둑놈 같은 헤라클레스 후인아-!"
라레투사가 목청껏 하늘을 향해 소릴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