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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303화 (303/375)

나 빼고 다 젊은이 303화

제303화

늦은 밤.

해가 저물고 달이 머리 위에 걸려있을 때쯤이 되어서야, 나는 메테우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헬레나는 아렌과 함께 사라의 무덤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냈고, 아렌은 헬레나에게 모든 진실을 얘기해주었다.

그때쯤 나는 서로를 알아보게 된 두 부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메테우스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온 것은 나와 케레노스. 그리고 풍희였다.

김수정은 남아서 헬레나와 있겠다고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영감님."

"너도 고생했다. 들어가 쉬어라."

"예. 그럼."

케레노스는 내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기사단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등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떼고, 빠르게 풍희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춘자와 솔라는 서로 포개져서 잠이 들어 있었다.

안 본 사이에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다.

"허허. 녀석들도 참."

나는 곧장 구름 침대에 몸을 뉘었고, 무척이나 푹신한 것이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아, 그래. 이게 행복이지.

"흐아아. 좋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옆에서 멀뚱거리며 서 있는 풍희가 보였다.

풍희는 얼굴을 붉힌 채 나를 보며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풍희야."

"…응. 아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거라."

그러자 풍희는 검지를 맞대며 꼼지락거리더니, 한참을 머뭇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빠랑 같이 자도 돼?"

"음?"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사실 풍희가 이렇게 여자 아이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난 후 우리는 서로 따로 자곤 했었다.

귀여운 족제비와 함께 자는 것과 여자 아이와 함께 잠드는 것은 내겐 완전 다른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풍희는 그게 무척 서운했던 모양이다.

"…싫으면 말구. 난 아빠가 자꾸 날 피하길래…. 흐윽."

갑자기 풍희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니다. 풍희야. 그런 게 아니야."

"정말?"

"그럼! 널 피하는 게 아니란다."

나는 세상 자상한 표정으로 어린 풍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내가 많이 무심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지금 외양처럼 어린 아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아직 풍희는 보살핌이 필요할 나이였다.

"이리 와라.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자자꾸나."

"응!"

그렇게 풍희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풍희에게 팔베개를 해주었고, 자장가도 불러주었다.

풍희는 얼마지 않아 쎅쎅거리는 소릴 내며 잠에 빠져들었고, 잠든 풍희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나는 손등으로 그녀의 볼을 살짝 문지르며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말년에 막내딸을 얻으니까 고생이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지 않아 나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창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었다.

***

드넓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땅.

하늘 위의 하늘인 이곳에 지어진 거대한 궁전은 그 외양이 무척이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신성했다.

이곳은 '천궁'이라 불리는 신들의 거처.

그 이름은 '우라노스'라 불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 구름은 이곳이 신들이 사는 곳이라는 걸 증명하는 듯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구름의 땅 한가운데.

천궁 우라노스가 있었다.

"이봐, 성좌들 좀 조용하지?"

그리고 그런 천궁에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성좌들을 타박하는 여인.

황금빛의 머릿결과 온몸에 칭칭 감은 황금 양털은 그녀의 신분을 증명해주었다.

그녀의 별명은 '성급한 희생자'.

신들의 심부름꾼으로서 모험심이 강하고, 의협심이 투철하며, 약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선두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칠성협의 일원이자 황도 12궁의 현 대장이었다.

'아리에스'라는 진명을 가진 그녀는 배신한 '레굴루스'의 뒤를 이어 현 궁좌들을 통솔해 천궁을 호위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뒤로 양털 기사단이 무척이나 위압적인 기세로 성좌들을 위협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런 아리에스를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별과 자비의 신이라 불리는 '루페온'.

현재 성유계를 지키고 있는 신이자, 성좌들의 왕이라 불리는 신이었다.

"죄송합니다. 루페온 님."

[괜찮다. 그보다 오랜만에 보니 여전하구나. 그 성급한 성미는.]

"부끄럽습니다."

백양궁, 아리에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리에스는 루페온을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루페온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네~]

그 순간. 루페온의 뒤로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달과 마법의 신 헤카티아나.

루페온이 그런 헤카티아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또 그 부엉이를 타고 온 건가. 정말이지 편리한 부엉이군. 옷은 또 그게 뭐야? 입은 거야 만 거야.]

미간을 찌푸린 루페온의 말과 동시에 헤카티아나의 어깨에 있던 레추자가 모습을 바꾸었다.

초승달의 동공을 한 흑발의 남자.

남자의 뒤로 넘실거리는 달의 마력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마. 그래도 얘가 얼마나 날 충직하게 따르는데. 안 그래? 크레센트.]

"영광입니다. 헤카티아나 님."

레추자의 이름은 '크레센트'였다.

루페온은 그런 '크레센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소문으로는 과거 유피테르 님도 저자가 탐이 나서 길들이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진실은 헤카티아나와 유피테르만이 알 것이었다.

[성좌들이 무척이나 많구나.]

[그러네. 풍요로운 날이야.]

[여긴 언제와도 새롭군.]

그리고 이어서 들어온 것은 바람과 소생의 여신인 후에라.

그리고 비와 풍요의 신 마야.

그 옆에는 눈과 시련의 여신 카디아가 나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루페온은 그런 세 여신을 보며 말했다.

[너흰 언제나 붙어 다니는군. 사이가 좋은 건가?]

루페온의 물음에 후에라가 답했다.

[우리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단다. 루페온.]

[질투가 난다면 끼워줄까요?]

[나보다 차가운 남자는 싫은데.]

세 여신의 개성이 어린 대답을 들으며 루페온은 또 한 번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때. 한 손엔 커다란 집게를, 그리고 반대 손엔 가위를 든 채 걸어온 남자가 다가왔다.

무척이나 깔끔한 외양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는 결벽증이 의심이 갈 정도로 정갈했다.

"아름다운 세 여신께 바칩니다."

남자의 집게손에 쥐어진 꽃이 세 여신에게 내밀어졌다.

세 여신은 반색하며 각자 마음에 드는 꽃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대표로 마야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키르키노스.]

"좋아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그는 거해궁이라는 자리에 있는 키르키노스라는 남자였다.

그는 천궁의 정원사이자 신들의 이발사이기도 했다.

키르키노스가 뒤로 물러나며 아리에스에게 다가갔다.

"양털이 많이 자랐네. 정리해줄까? 아리에스."

"저리 꺼져. 키르키노스."

"이런. 정말 싫어? 여기만 자르면 좀 이쁠 거 같은데…."

"저리 꺼지라고 했다. 지금 호위 중인 거 안 보여?"

불같은 아리에스의 말에 키르키노스는 그저 싱긋 웃었다.

키르키노스가 들고 있는 가위를 찰칵거리며 말했다.

"후후. 언제든 불러. 난 네 양털을 정리하는 걸 가장 좋아하니까."

키르키노스가 다시 한번 가위를 찰칵거리면서 멀어졌다.

아리에스는 그런 키르키노스의 뒤통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 짜증나."

아리에스는 늘 키르키노스가 못마땅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아리에스도 키르키노스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에스는 루페온을 더 좋아했다.

더군다나 저런 변태 같은 녀석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좋아하다니.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저 변태 자식이 가위질을 조금만 못 했어도 좋았을 텐데…."

하지만 천궁에서 가장 자신의 털을 잘 정리할 수 있는 것 또한 키르키노스 뿐이었다.

그는 천궁의 정원사이자 신들의 이발사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리에스는 다시 루페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귀공자 같은 미모를 뽐내었고, 마치 별의 아우라가 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별들의 왕이기에 그런 것일까.

'잘생겼다….'

그렇게 아리에스가 한참이나 루페온의 외모에 빠져든 그때.

찌이이잉-!

난데없는 빛이 천궁의 하늘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천궁을 밝게 비추었다.

앉아있던 신들과 성좌들이 빛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리에스도 마찬가지.

대표로 나선 루페온이 공손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빛과 하늘의 신. 유피테르 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모두가 "유피테르 님을 뵙습니다."하고 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리에스도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어도 유피테르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것은 태초의 신이시자, 만물과 창조의 신이신 가이아님이 최초의 3신들에게 내린 위엄의 빛 때문이었다.

위엄의 빛은 유피테르의 얼굴을 철저하게 가려주었고, 함부로 올려다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 없는 나머지 3신들인 땅과 바다의 신 넵튠과 죽음과 어둠의 신 플루토도 이런 위엄의 빛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3신들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본 이는 없었다.

[음, 오랜만이구나. 루페온. 성유계는 지금 누가 지키고 있지?]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걸걸한 목소리의 유피테르가 물었다.

루페온은 즉각 대답했다.

[현재 인마궁의 키론, 전갈궁의 안타라스가 각 일군씩 이끌고 성유계로 밀고 들어오는 마족들을 막는 중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늑대성 레무스가 죽고 성혼이 되어 성유계에 정착 중입니다. 저 또한 곧 그리로 갈 예정이고, 수병궁 데우칼리온은 바다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바람의….]

[그 정도면 되었다.]

유피테르가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루페온의 말을 끊었다.

루페온은 뒤로 '아이올로스'가 있다는 말을 삼켰다.

루페온도 최근 '아이올로스'가 성유계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놀라운 건 그가 명계를 거쳐 한 인간 여자와 함께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메꾸고 있던 자리는 현재 공석이 아닌 그의 딸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뭐,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지.'

루페온은 굳이 유피테르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이유는 없다고 느꼈다.

전지전능한 빛과 하늘의 신은 알려고 한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는 유일하게 가이아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유피테르가 태초신 가이아님의 말씀을 전하는 날.

마침내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모두 듣거라.]

그 순간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위엄의 빛은 유피테르를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신으로 만들었다.

하늘 위의 하늘.

신들의 신인 유피테르의 신위는 천궁을 지배했다.

오히려 더욱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 과연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유피테르에게 어울리는 빛이었다.

그의 손에 쥔 벼락이 하얗게 울었다.

쿠르릉-!

[타락한 궁좌들이 인간계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터. 현재 마왕이 된 그들과 마계의 군대가 인간계로 일부 넘어갔다.]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유피테르의 벼락이 울부짖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며 장관과도 같은 그 모습에 공포에 잠겼다.

그들 모두 과거 있었던 라그나로크를 겪었던 이들이었기에 잘 알았다.

저 벼락이 다시금 울었다는 건 그가 전쟁을 각오했다는 것임을.

[나 빛과 하늘의 신 유피테르는 오늘부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인간들을 도와 다가올 라그나로크에 대비할지어다! 판도라의 조각을 모아 가져오라! 이것이 위대하신 태초 신 가이아님의 뜻일지니!]

모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지는 것은 유피테르를 향한 찬사.

우렁찬 목소리에 신과 성좌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기나긴 전쟁에 나가기 전 함께 외쳤던 구호.

50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울려 퍼지는 함성이었다.

"천궁의 위엄을 만천하에 보이겠나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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