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02화
제302화
한편, 나와 아렌은 상왕 키리우스와의 면담을 모두 마치고,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귀환석의 포탈을 이용하니 금방이었고, 키리우스가 내게 했던 또 다른 부탁은 멸망한 파르타 공국에 남아있을 무기들의 확보였다.
마침 오르카 왕국의 토벌령이 내려졌다는 건 키리우스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것을 핑계 삼아 내게 뒤로 파르타 공국의 각종 무기고를 터는 데 도움을 줄 것을 부탁했다.
쉽지 않은 부탁이라서 나는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키리우스도 더는 강요하지는 않았고, 그저 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부탁한다고 했기에 그 정도는 나도 수긍하며 알았다고 했다.
어쨌든 그렇게 나와 아렌은 함께 저택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님!"
그런데 난데없이 김수정이 저택 입구에서 달려왔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아, 저 그게…."
김수정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차분하게 말해봐라."
그러자 김수정은 심호흡을 몇 번하더니, 숨을 고르고는 눈빛을 다부지게 만들며 나와 키리우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고해성사를 하듯 있었던 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전 헬레나랑 여기에 왔었어요. 같이 쇼핑을 하려고 했는데, 잠깐 만날 분이 있다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헬레나가 울면서 뛰쳐나오는 거예요. 제가 잡으려니까 뿌리치고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급하게 어디로 가야 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멍을 때렸다.
울면서 뛰쳐나갔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다.
어딜 가야 한다니.
대체 어딜 간 것일까.
옆에 선 아렌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김수정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 겁니까?"
"아, 네. 전 바깥에 있어서 아무런 이유를 몰라요."
"…음."
나직한 아렌의 한숨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아렌 님!"
아렌의 집사 알프레드가 세상 놀란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우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렌에게 다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헬레나가 이걸…."
그렇게 말하며 알프레드가 건넨 것은 자그마한 책이었다.
그것은 내게도 익숙한 '세인트 헬레나'라는 제목을 가진 낡은 책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시집일 텐데?
"아, 이런…."
그러나 옆에 선 아렌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책을 펼친 상태였다.
아무래도 아렌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런 내 물음에 아렌은 슬쩍 날 보더니, 낭패감이 어린 표정으로 천천히 책을 펼쳐 보여주었다.
그것은 책에 숨겨진 마지막 장이었다.
"이건…."
그것은 자그마한 집 앞에서 찍은 한 가족의 사진이었다.
한 사람은 젊은 시절의 아렌이었고, 아마 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사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어린 여자아이는….
"어린 시절의 헬레나입니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설마 여기서 헬레나가 알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됐군.
"아무래도 여기 사진에 있는 집으로 간 모양입니다. 책에 지도를 접어서 넣어놨었는데 지도랑 열쇠가 없군요. 하아. 이걸 가져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아렌이 다시 한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아렌을 나는 천천히 다독였다.
우선 지금 중요한 것은 헬레나를 찾는 것.
지금은 그저 혼란스러운 그를 다잡아주는 것이 필요할 때였다.
"진정하게. 헬레나의 행방을 알았으니 찾는 건 시간문제 일게야."
"…후,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우선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 아렌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헬레나는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대륙 최대의 무역을 자랑하는 도시 포트렌은 무척이나 넓었다.
그녀는 포트렌의 서문으로 나가 남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아까 '세인트 헬레나'라는 책에서 가져온 지도가 표시된 지역이었다.
분명 이 부근에 사진 속에서 보았던 작은 오두막이 있을 터였다.
"허억. 허어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드넓은 포트렌과 산속을 뛰어다니며 숲을 뒤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헬레나는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그늘진 나무 아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진 속에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맞았다.
분명 그런 기억이 있긴 했다.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무척 행복했던 기억.
처음엔 아버지인 '아이노'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이름과 얼굴을 물어볼 때마다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헬레나는 아버지인 '아이노'에게 어머니에 대해선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얼굴도 몰랐던 어머니는 '사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과 같은 붉은 머리에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설마…."
아닐 것이다.
쓰레기촌에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컸던 '아이노'는 자신을 극진히 보살피고 키워주었다.
그런데 정작 진짜 아버지가 따로 있고, 그게 그동안 자신이 믿고 따르던 '아렌'이었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란 말인가.
"흐으."
헬레나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움직여 숲을 뒤졌다.
이 근처였으니 곧 오두막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헬레나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진실을 확인하고 마주하고 싶었다.
그것이 분명 무섭고 충격적으로 다가올 진실이라도,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아."
헬레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눈앞에 사진 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산길을 헤매다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리엔 나뭇잎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여기다."
그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 작은 오두막인 것을.
"후우."
헬레나는 숨을 한 번 내뱉고는 사진 속 오두막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바로 옆에 굳게 잠긴 자물쇠가 보였다.
"아, 혹시…?"
순간 아까 책에서 보았던 지도와 함께 있던 열쇠가 떠올랐다.
혹시 몰라 챙겨 왔는데, 여기에 쓰는 건가?
달그락. 달그락.
헬레나가 자물쇠를 잡고 열쇠를 꽂았다.
탁!
열쇠는 정확히 자물쇠에 맞아 들어갔고, 열쇠를 돌리자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자물쇠가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헬레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끼익-.
"……."
집안은 예상외로 깨끗했다.
먼지가 많이 없는 것을 보면, 누군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 흔적도 보였다.
"……."
그녀는 말없이 집안을 거닐었다.
자그마한 집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분명 자신은 이곳을 와 본 적이 있었다.
끼익-
마음이 가는 데로 바로 옆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또 한 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건."
그곳엔 수많은 사진 속 자신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여덟 살 때의 헬레나.
열한 살이 되던 해의 헬레나.
성년이 된 헬레나….
쓰레기촌에서 커왔던 자신의 모든 성장 과정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렇게 헬레나는 천천히 액자 속의 자신을 마주하였다.
묘한 괴리감이 자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나씩 사진을 보던 헬레나는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
그것은 아렌과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처음 칼슈타인 저항군에 들어가 아렌을 보았을 때였던 것 같다.
단둘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때도 어색하지 않았었다.
왠지 편안한 느낌이었달까….
"흐읍."
그러던 헬레나가 갑자기 울컥했다.
사진 속 액자에 적힌 자그마한 글자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렌의 필체가 분명했다.
-사랑하는 딸과 처음으로 함께-
"흐으."
헬레나의 코가 시큰거려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슬펐을까.
또 얼마나 반가웠을까.
또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왜 자신을 딸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왜 부르지 못해서 이렇게 뒤에서 사진으로만 자신을 보아야만 했던 것인지 헬레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무슨 복잡한 사연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그리도 어려웠기에….
"흐어어엉!"
그제야 헬레나는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목이 찢어져라 대성통곡을 하며 집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
나와 김수정.
그리고 아렌과 알프레드.
이렇게 우리 넷은 곧바로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지니가 있었기에 우리 넷은 무척이나 편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고, 얼마지 않아 우리는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달빛이 우리를 비추는 저녁이었다.
"저깁니다!"
아렌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지니를 아렌이 가리킨 방향으로 틀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오두막의 근처에 내려섰다.
"또 필요하면 부르구름!"
슈와악.
그렇게 지니가 소환계로 사라졌다.
아렌과 알프레드. 김수정은 사라지는 지니를 무척이나 신기하게 바라보며 부러운 기색으로 보았다.
하지만 대놓고 좋아할 순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헬레나를 찾는 것이었으니까.
"흐어어엉-!"
그러던 바로 그때.
오두막의 안쪽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헬레나의 목소리였다.
눈을 마주친 우리들은 쏜살같이 집으로 달렸다.
벌컥!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앞장서 달리던 아렌이었다.
"헬레나!"
아렌이 소리치며 집안으로 들어섰고, 그는 곧장 또 다른 방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곳에서 주저앉은 채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헬레나를 볼 수 있었다.
헬레나는 처음엔 화들짝 놀라더니, 나와 김수정, 그리고 알프레드.
마지막으로 아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엉-!"
정말이지 서럽도록 울었다.
다 큰 처자가 저렇게 우는 건 마누라 이후로 처음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그때.
"…헬레나."
아렌이 주저앉은 헬레나의 손을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헬레나는 연신 훌쩍거리며 울지 않았던 티를 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1분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울음을 그쳐갈 때즈음.
"이제 괜찮니…?"
"…네."
아렌의 물음에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만남이 조금 달라졌지만, 두 부녀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도 본 적은 있겠지만, 아마 지금처럼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헬레나야."
"네."
아버지가 딸을 불렀고, 딸이 아버지를 불렀다.
"엄마를 보러 가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