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99화
제299화
불칸 화산지대 서쪽, 신성한 둥지.
주변은 온통 용암이 들끓었다.
그것은 오로지 피닉스 이그누르가 분노라는 감정만으로 변화시킨 광경이었다.
진홍빛을 띤 피닉스의 날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황금빛의 꼬리는 그 남은 잿더미마저 용서치 않을 것처럼 휘둘러져 눈앞의 적을 공격했다.
[죽어라! 타락한 성좌여!]
끼오오오-!
피닉스 이그누르가 온 힘을 끌어모아 허공에서 날갯짓 했다.
수백의 불덩이가 아래에 자리한 적에게 쏟아져 내렸다.
재앙과도 같은 불의 비가 나태의 사도를 향해 쇄도했다.
화아악-!
자욱한 연기가 나태의 사도를 뒤덮었지만, 나태의 사도는 끄덕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왕 '벨페고르'의 힘.
폭염을 뛰어넘어 옥염이 된 그의 힘은 이제 신에 비견될 정도였다.
애초에 불과 불이 만났으니 상성이 맞지 않는 것도 컸다.
단지 누가 더 강한 불이냐.
그것이 승패를 가르는 쟁점이었다.
"옥염의 사슬."
촤르륵-!
벨패고르가 마계와 연결된 지옥을 오가며 개발한 옥염 마법 중 하나인 옥염의 사슬이 이그누르의 몸통을 옭아맸다.
푸른 불꽃의 사슬에 묶인 이그누르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놈…!]
촤륵. 촤르륵.
거센 이그누르의 몸부림이 옥염의 사슬을 끊으려 애썼다.
나태의 사도는 그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또 다른 옥염 마법을 준비했다.
"옥염의 주박."
[으윽…!]
나태의 사도가 뻗은 손에서 푸른 화염이 넘실거리더니, 거대한 고리가 되어 이그누르의 양 날개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다.
이그누르가 분한 눈빛을 억누르며 나태의 사도를 노려보았다.
[죽음에 취한 어리석은 이여. 대체 금제를 깨서 어쩔 속셈이냐!]
"하하하하! 과연 서쪽을 수호하는 사계절의 성좌다운 패기로군. 정말이지 '여름의 균형자'라는 별명에 걸맞은 성격이야. 으하하하-!"
나태의 사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염열계 최강이라 불리는 피닉스 성좌를 무너트리는 벨페고르의 힘은 나태의 사도를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타락한 성좌의 졸개 따위가 감히 나를 비웃느냐!]
"호오. 그 타락한 성좌의 졸개 따위에게 당하고 있는 네 꼴도 무척이나 우습지 않나?"
[판도라의 힘만 아니었다면 네놈은 죽었을 것이다!]
이그누르가 또 한 번 분한 듯 소리쳤다.
사실 이그누르는 이토록 쉽게 당할 성좌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존재는 타락한 성좌의 힘.
이젠 마왕이라 칭해지는 존재의 힘은 물론이고, 죽음과 어둠의 상징인 과거 라그나로크의 재앙이라 불리던 판도라의 힘을 섞어서 쓰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 뚫렸던 한쪽 날개가 아직도 아려왔다.
재생의 불꽃이라는 힘을 지닌 피닉스의 권능으로도 회복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마왕, '벨페고르'가 이를 드러내며 광소를 터트립니다.]
허공에 넘실거리는 푸른 화염이 악마가 웃는 것처럼 형상을 맺었다.
이그누르는 분노했다.
인간계와 하늘을 수호해야 할 황도 12궁 중 하나인 금우궁 알데바란이 마왕이 되다니.
"후후. 너무 그러진 말라고. 우린 그저 플루토 님의 뜻을 좇을 뿐이거든. 판도라의 힘으로 다시금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일 거야. 으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 좋지 않나? 그만 순순히 죽어줘야겠어."
쌍도끼를 든 나태의 사도가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그것은 '옥염화'라는 최강의 옥염 마법.
이그누르의 발밑에 아직 봉오리를 맺지 못한 연꽃 모양의 옥염이 자리 잡았고, 나태의 사도는 그곳으로 옥염의 힘을 집중시켰다.
그런 옥염을 먹고 자라나는 옥염화는 끝내 최후의 꽃잎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그누르는 머릿속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함께 죽자!]
"……!"
이그누르가 최후의 공격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삼았다.
어차피 자신은 사계절의 성좌로써 태초 신 가이아에게 불멸이라는 힘을 얻었기에 다시 태어날 터.
쿠아아앙!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나태의 사도를 집어삼켰다.
"흐읍-!"
나태의 사도가 화염 폭풍에 휘말리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주변을 휩쓸었고, 잠시 후. 휘날리는 화산재 사이로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으윽…."
온몸에 옥염을 휘감아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나태의 사도는 피칠갑을 한 것처럼 온몸이 화상으로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엔 잿더미가 되어 버린 피닉스 이그누르의 잔해가 휘날렸다.
과연 염열계 최강의 성좌다운 최후의 공격이었지만, 결국 승자는 자신이엇다.
"으흐흐흐…."
나태의 사도가 낮게 웃는 바로 그 순간.
세상의 균형이 깨지려는 것처럼 작은 지진이 일었다.
드드드드-!
나태의 사도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이 과업을 완수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온몸이 마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주군이었던 벨페고르가 자신의 몸에 강림을 하려는 것이었다.
"오십시오. 벨페고르 님! 으하하하-!"
마기의 폭풍이 자신을 휘감음과 동시에 작은 공간이 열리더니, 수십의 마수와 마인들이 눈을 빛내며 인간계를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잿더미 속에 있던 피닉스 이그누르의 알은 조심스럽게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졌다.
***
멸망한 파르타 공국의 서쪽 항구.
쿠아아앙-!
내가 던진 여의초의 끝부분이 땅에 닿았을 때 보였던 것은 빛이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시고 뜨거워서, 어느 누구도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잠깐이지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어진 것은 태양과 구름이 뒤섞인 대폭발.
버섯구름이 하늘로 치솟았고, 폭발과 동시에 퍼져나간 구름은 적을 가차 없이 옭아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며 아군은 감싸듯 보호막을 씌워 뒤이은 태양의 폭발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쿠구구궁-!
광활한 태양 폭풍이 주변의 언데드들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갔다.
"꺄아아악-!"
"다들 고개 숙여-!"
미도의 비명과 데이비드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이어진 2차 폭발에 대비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나는 내가 노렸던 놈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언데드는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
얼마나 강력한 공격인지 펜릴과 목룡도 휘말려 사라진 것 같았다. 넓은 공간엔 오로지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죽은 건가…?
나는 확인해보기 위해 바람을 움직여 연기를 걷어냈다.
"……!"
그러나 내가 바람을 움직여 재와 연기를 치워냈을 땐.
그곳에 어떤 남자들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닌 둘.
그들은 기절한 것처럼 늘어진 코쟁이 놈을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띄운 채 방어막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그중 금발을 한 남자가 웃었다.
"제법이군. 과연 플루토 님이 말씀하신 날씨의 힘을 가진 자다워."
플루토…?
날씨의 힘을 알다니. 누구지?
드드드드-!
바로 그 순간.
옅은 지진이 일었다.
"음, 나태의 사도가 성공한 건가."
금발의 남자가 바닥의 지진을 느끼면서 웃자, 내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금발의 남자가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의 눈은 옅은 푸른색이었다.
"우린 판도라의 추종자들이다."
"판도라의 추종자…?"
"플루토의 뜻을 모시는 집단이라고 해두지.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고오오오-!
형용할 수 없는 마기가 금발의 남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주변 땅이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찢어진 공간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마족들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오만의 마왕인 루시퍼 님의 종."
슈우우욱!
검은 연기가 그를 집어삼켰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드러난 것은 검은 갈기를 가진 두 발로 일어선 사자였다.
크허어엉-!
흑사자의 포효가 전장을 공포로 물들였다.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눈앞의 적들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격에 공포를 느끼기도 하는 듯 주춤거렸다.
[오만의 권능이 주변을 억압합니다.]
[상태 이상, '공포'에 걸립니다.]
[적은 공포를 느끼는 대상에게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굴루스…?"
사자궁, 레굴루스.
눈앞의 사자는 분명 배신한 7궁좌 중 한 명이자, 궁좌들의 리더였던 레굴루스였다.
무서운 것은 그가 '신살(神殺)'. 즉,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유피테르는 신들이 배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호위로 있던 황도 12궁의 대장인 레굴루스에게 '신살'의 힘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어떤 신도 유피테르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레굴루스는 그런 유피테르의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오. 날 아는 인간이라니 흥미롭군. 레굴루스라…. 분명 그런 이름을 가진 적이 있었지.]
"……."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황금 갈기를 가졌던 레굴루스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 검은 사자는 분명 마왕이었다.
나와 일행들은 순식간에 마족들에게 포위당했고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리라.
[아아, 우리도 그런 이름이 있었지. 하지만 난 이제 아슈타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 안 그래?]
[난 마음에 안 든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
두 다리와 네 개의 팔을 가진 존재가 검은 사자의 옆에 있었다.
그 몰골이 무척이나 흉측하기 그지없어서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카스트로와 폴룩스…."
[뭐야, 우리들도 알아?]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대답하며 놀라는 기괴한 광경이 이어졌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로믈라나와 레무스를 잇는 또 하나의 쌍둥이 성좌이자, 궁좌였던 쌍아궁의 주인인데.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군.
카스트로는 마법에 능했고, 폴룩스는 권투와 무기술에 능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그 둘이 합쳐지다니.
이젠 마왕 아슈타르라고 불러야 하나? 머리가 아파다.
[저거 재밌는 인간이네.]
[저 인간의 머리가 갖고 싶어.]
아슈타르는 두 자루의 검을 든 팔과 두 개의 지팡이를 든 것이 검과 마법이 일체가 된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그만.]
[……?]
검은 사자 루시퍼의 다그침에 달려들려던 아슈타르가 멈칫했다.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루시퍼가 아슈타르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호전적인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과연 전 황도 12궁의 전 대장인가.
[…가라.]
"……?"
[우릴 알아보는 인간이 기꺼워서 보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것은 전 인류에 하는 경고. 앞으로 10일의 말미를 주겠다. 그때까지 모든 인간들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파괴와 살육이 가득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오만한 루시퍼의 웃음이 전장 가득 울려 퍼졌다. 동시에 주변 마족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 자체에 마기가 실렸는지 저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퇴각한다."
***
그로부터 5분 뒤.
나를 비롯한 미도와 이카루스의 일행들은 지니의 구름 위에서 쉬고 있었다.
데이비드와 다른 녀석들에겐 풍희를 소환해 이동속도 증가 마법을 걸어주었다.
지니가 본신의 힘을 되찾았다면 모두 태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 인원밖에 태울 수 없었다.
"와, 엄청 빠르다! 너 진짜 짱이구나. 지니야?"
미도가 아래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귀여운 지니를 칭찬했다.
지니도 기분이 좋은 지 방실거리며 웃었다.
"고맙구름! 너도 예쁘구름!"
…이 녀석도 분명 남자가 틀림없군. 하여튼 솔라나 지니나 똑같은 놈들이라니까.
"푸우웅~"
"해해햇-!"
솔라와 풍희는 정신없이 구름 위를 돌아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정작 아까 있었던 충격을 털어내지 못한 듯 이카루스 길드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러나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사실 이건 혼자 이겨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게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의 정경을 응시했고, 속도가 빠른 만큼 배경들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음?"
저건 뭐지?
갑자기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