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88화
제288화
아이글레, 에리테리아, 라레투사의 아버지는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구름을 훔쳤던 '아틀라스'였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아틀라스의 형.
즉, 다시 말하자면.
이 세 자매는 프로메테우스에겐 조카가 되는 것이었다.
"큰아빠, 큰아빠. 그럼 그동안 잠을 잤던 거야?"
[그래. 500년 가까이 잤다. 아이글레.]
헤스페리데스 세 자매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큰아빠를 무척이나 기쁘게 맞아주었고, 나와 백무열은 그런 세 자매의 안내를 받아 구름의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잠꾸러기였어. 큰아빠?"
[너도 어렸을 땐 잠꾸러기였다. 에리테리아. 그건 라레투사 너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이 잠이 제일 많았지.]
"전 이제 그런 게으름뱅이가 아닙니다. 에리테리아는 게으르지만요."
"라레투사 너무해! 흥-!"
세 자매는 프로메테우스와 기쁨의 재회를 만끽하듯 수다를 떨었다.
아까 전 있었던 헤라클레스와의 일도 잠시지만 잊은 듯했다.
하지만 백무열은 여전히 불안에 떨었다.
"…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 그렇다니까. 큰아빠가 있는데 조카가 어쩌겠냐."
"후우. 이거야 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구만."
백무열은 연신 한숨을 푹 내쉬었고, 헤라클레스는 여전히 간접 메시지로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웃기는 건 헤라클레스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라레투사가 눈빛을 번들거리며 백무열을 보았는데, 그럴수록 백무열은 어깨를 움츠러트리며 모른 척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이 썩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환영의 만찬을 준비하자. 얘들아-!"
그렇게 갑작스런 외침으로 시작된 환영회.
아이글레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선물을 하겠다며 난데없이 솔라의 모습을 닮은 구름을 만들기 시작했고, 에리테리아는 몬스터들을 시켜 주변의 과일과 먹을 것들을 조달했다.
그리고 라레투사는 조달된 재료들로 요리를 시작했다.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맛있는 재료를 듬뿍 넣고, 고기도 구웠다.
라레투사의 요리는 수준급이었고, 그 많은 세월 동안 홀로 세 자매의 요리를 담당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실력이었다.
"후우, 맛있다."
"배부르네."
나와 백무열이 볼록 튀어나온 배 위에 손을 올리며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는 것 같다.
현실이 아닌 이곳 세상에선 나만큼 요리를 잘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이렇게 요리를 잘할 줄은 몰랐다. 라레투사.]
솔라의 모습을 한 프로메테우스도 부른 배를 움켜쥐며 만족감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라레투사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바로 그때.
구름을 주물럭거리던 아이글레가 솔라를 닮은 구름 조각을 내밀었다.
조각은 무척이나 작고 세밀했다.
저 커다란 손이 이토록 섬세할 줄이야.
"큰아빠! 큰아빠 주려고 만들었어!"
[어? 어, 그래. 고맙다. 근데 지금 내가 모습이 이래서….]
프로메테우스가 곧장 내 쪽으로 눈을 흘겼다.
나는 바로 아이글레에게 다가갔다.
이제 우리 둘은 눈만 마주쳐도 무슨 뜻인지 알 정도였다.
곧장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글레가 만들어준 [솔라 구름 조각상]을 챙겼고, 프로메테우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제 슬슬 아틀라스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볼….
[※긴급 공지※ 곧 점검이 있을 예정입니다.]
"으잉?"
"뭐시여."
나와 백무열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저분들께서는 5분 안에 접속을 종료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유니온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 곧 긴급 점검이 실시가 될 예정입니다.]
[유저분들께서는….]
난데없이 뜨는 긴급 점검 메시지.
그것은 유니온에서 유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나와 백무열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아틀라스의 행방을 묻는 건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 * *
서울 강남, 유니온 본사.
"모든 유저들에게 긴급 점검 공지 실시했습니다."
"5분 뒤에 해당 서버 셧다운 들어갑니다."
"현재 접속해 있는 유저들의 숫자는 총 1,245,680명입니다."
"접속 종료를 하는 유저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모든 유저가 안정적으로 로그아웃을 하게 됩니다."
전략 기획실을 비롯한 모니터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셧다운 명령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석준 부장의 말에 부응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
"……."
그리고 이석준과 유민석은 전략 기획실 안에서 모든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그저 나지막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석준이었다.
"…솔직히 자네 말이 다 믿기지 않아."
이석준의 얼굴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민석은 그런 그에게 이건명에 관한 이야기만 쏙 빼고 말했다.
강재성 박사가 쓰러졌고, 그가 치명적인 버그를 막기 위해 쓰러지기 직전 좌표를 남겼다는 사실까지.
"믿어주십시오. 저도 믿기지 않았습니다만, 오늘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겪고 보니 어쩌면 강재성 박사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이석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미간은 깊게 파였다.
지금 강재성 박사의 말만 들었음에도 이 정도인데, 정작 이건명의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면 나중에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진 유민석도 짐작하지 못했다.
'역시 그 얘기는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게 낫겠어.'
유민석은 다시금 이석준을 보며 다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재앙을 계획 중이고,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한 나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최악의 한 수나 다름없었다.
당장 말했다가 이석준이 반발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작 최악의 순간에 유민석이 유니온에서 퇴출을 당해 도움을 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은 자중하는 것이 모두에겐 좋을 것이었다.
"아니, 그럼 최춘택 할아버지의 정체가 대체 뭐란 얘기야? 그 치명적인 버그인가 뭔가를 막기 위해 강재성 박사가 남겨놓은 것을 그 할아버지가 얻었다는 거야? 뭐, 백신 그런 거?"
"예. 그런 셈입니다."
지금 이석준의 말을 들었듯 저것 또한 유민석이 대충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원래 거짓말은 진실과 거짓을 반반씩 섞어야 하는 법이니까.
이석준에겐 치명적인 버그를 재앙에 준하는 수준으로 말해두었다.
"그 치명적인 버그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스타 프루츠가 빛을 뿜어내는 것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고?"
"그렇습니다."
"이거야 원. 유저들이 난리 나겠구만."
이석준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도저히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우선 급하게 서버를 닫긴 했지만, 당장 유저들의 반발을 어떻게 억눌러야 한단 말인가.
'머리 아프네.'
치명적인 버그를 발견했고, 고쳐야 한다고 발표를 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아직 버그의 정체도 모르고, 어떻게 고쳐야할 지도 막막했기 때문이다.
"후우,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을 한다…."
당장에 아버지와 연락도 두절된 상태다.
잘못하면 차기 회장의 자리 또한 물 건너가고 말리라.
이석준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이건명에겐 어떻게 말을….
"부장님."
"……?"
이석준이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치우며 고개를 들었다.
"이참에 긴급 패치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버그를 발견할 수도 없고, 당장에 고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버그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최춘택 할아버지가 게임을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긴급 패치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저번에 말씀드렸던 SNS를 아크스타에 접목시키는 패치를 하고 싶습니다."
"SNS를?"
이석준의 눈이 살짝 뜨여졌다.
그건 최근 유민석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이름하야 '아크스타그램'.
유저들 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강화해 소통을 늘려 더욱 많은 이들을 가상 게임으로 불러들인다는 뭐, 대충 그런 프로젝트였다.
천문학적인 광고 수입은 덤.
"그걸로 어떻게 어쩌겠단 말이지?"
"정작 치명적인 버그가 발생한다면 유저들 간의 협력이 필요해질 순간이 올 겁니다. 우선 그것을 위해 SNS가 필요하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SNS를 통해서 더욱 빠르게 유저들의 소식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버그의 발견 또한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광고 효과로 인해 추가적인 수입은 덤이겠죠.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흐음…."
유민석의 말을 들은 이석준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지금 갑자기 닫힌 서버에 대해 둘러대기 좋은 것이기도 했다.
매체에는 아크스타 시상식을 모든 유저들이 보게 만들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고 떠들면 될 것이었다.
이어서 새로운 SNS 패치를 선보이며 모든 유저들의 이목을 그곳으로 집중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유민석이 말한 그 치명적인 버그가 정말 발생한다면, 유저들끼리 대처 방안을 모색할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지금 당장 SNS 패치를 허가하지."
"감사합니다. 부장님."
유민석이 황급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석준은 그런 유민석의 뒤통수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 * *
나와 백무열은 곧장 로그아웃해서 캡슐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
나오자마자 미도가 달려오더니 내 품에 폭 안겼다.
한국 대표팀 일행들도 다가와 한 명씩 인사를 했다.
그들은 TV를 틀어놓고 있었는데, 마침 유니온에서 띄운 속보가 화면 가득 나오고 있었다.
[속보, '아크 스타' 긴급 점검 실시.]
속보의 내용은 간단했다.
유니온은 월드 대항전의 시상식을 모든 유저들이 볼 수 있도록 긴급 점검을 실시한 것이란 내용과 함께 점검을 하는 김에 새로운 SNS 패치를 선보이겠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흠. 저거 때문이었나 본데."
"그러게 말이야."
나와 백무열이 TV를 보면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벌컥-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들어온 것은 유니온스퀘어의 직원이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저 친구는 왜 우리 대기실에만 들어오면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저기 시, 시상식 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근데 그 전에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