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85화
제285화
그 시각.
나는 대기실에서 게임접속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한 대가 더 있어서 뒤따라 들어온 백무열도 함께 접속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바로 백무열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 잭슨: 어디냐.
- 백무열: 저번에 우리 훈련했던 곳.
- 잭슨: 기다려. 금방 갈게.
나는 곧바로 영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뒤편엔 자그마한 영주성이 있었다.
아직은 남작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꼴에 영주라고 성이 하나 있긴 했다.
다만 너무 사치를 부리는 건 싫어해서 일부러 작게 지으라고 지시했을 뿐.
"그나저나…."
주변이 무척 떠들썩하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어둡게 내려앉은 밤 아래.
환하게 치솟은 빛이 세상을 밝히는 별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저건 아마….
- 크리스탈: 아버님!
바로 그때.
난데없이 김수정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딱히 피할 이유는 없었다.
저번에 병문안 와준 것도 고마웠기에 나는 반갑게 대답했다.
- 잭슨: 그래. 잘 지냈니?
- 크리스탈: 큰일 났어요!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김수정에게 큰일이란, 얼만큼 심각한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기에.
- 잭슨: 왜 그러냐.
- 크리스탈: 아, 진짜! 이 미련한 곰탱이가 스타 프루츠를 먹어버렸어요! 아버님께 먼저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아오!
미련한 곰탱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나저나 스타 프루츠를 먹었다니.
역시 예상대로 벌써 먹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한 거구나.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 크리스탈: 어디세요? 제가 이 곰탱이 데리고 그리로 갈게요.
- 잭슨: 나야 메테우스지. 그럼 이리 와서 다시 연락하거라.
- 크리스탈: 네. 금방 가요!
뚝-.
그리고는 김수정의 귓속말이 끊어졌다.
그녀는 지금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아니, 대체 곰탱이가 누구야?
머릿속엔 의문만이 남았다.
흐음. 이대로 백무열에게 가볼….
- 조셉: 어르신.
제길.
- 잭슨: 왜.
- 조셉: 속보 보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이거 혹시….
조셉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어쩐지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강재성이 말했었던 그 재앙의 징조가 바로 이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전조가 시작되었다고.
- 잭슨: 혹시 그곳에서도 스타 프루츠의 빛이 솟고 있냐?
- 조셉: 역시 어르신도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아렌님께 연락해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빛이 나는 곳에 스타 프루츠가 있다면 반드시 확보하라구요. 그리고 어두운 빛은….
- 잭슨: 판도라의 조각이겠지.
- 조셉: 걱정이군요. 유저들이 그것의 힘을 알게 된다면….
- 잭슨: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자.
- 조셉: 알겠습니다. 스타 프루츠와 판도라의 조각을 확보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잭슨: 그래.
그렇게 조셉과의 귓속말도 마무리되었다.
그제야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째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나는 황급하게 백무열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백무열을 만날 수 있었다.
"뭐가 이리 굼떠? 굼벵이를 삶아 먹었어?"
"잔소리하지 마. 지금 머리 아프니까."
"괘씸하긴."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백무열의 잔소리를 무시하며 지나쳤다.
뒤편에서 백무열이 쫄랑쫄랑 따라왔다.
"오자마자. 어딜 가?"
"케레노스를 만나려고."
"아, 그 창잽이 놈?"
케레노스는 윈디아에 있다가 얼마 전 메테우스로 돌아왔다.
그러니 케레노스는 지금 당연히 메테우스에 있었다.
"그래. 그리고 너 이왕 온 김에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갑자기 어딜?"
"이따 보면 알아."
"짜증 나는 놈. 맨날 두루뭉술이야."
그렇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케레노스를 만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케레노스는 무척이나 바빴다.
"영감님? 어쩐 일이십니까? 안 그래도 지금…."
"됐고. 지금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야?"
나는 대뜸 케레노스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대충 한 어림잡아서 3천 명 정도입니다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눈이 살짝 뜨여졌다.
벌써 그만큼이나 병사가 모였다고?
메테우스가 발전하긴 발전했구나.
"놀라신 것 같군요. 큼. 이게 다 저와 실피드 기사단이 헌신을 다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길러낸 노고로써…."
"시끄럽다. 어딜 내 앞에서 자랑질이야. 됐으니까 병사들 풀어서 당장 대륙 곳곳에 빛을 뿜어내는 스타 프루츠를 모아와. 넌 윈디아에 연통 좀 넣어서 에드워드에게도 그렇게 전하고. 급하니까 서둘러라."
하지만 케레노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만 껌뻑거렸다.
내가 미간을 확 찌푸리자, 갑자기 엉뚱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중요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네가 도박에 건 돈이 몽땅 날아갈 만큼."
"…바람처럼 움직이겠습니다."
슈와악!
순식간에 바람을 운용한 케레노스가 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엔 옅은 마력의 잔상이 남았다.
순 녹색의 정순한 바람의 마력이었다.
"흠. 저놈은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현이랑 참 많이 닮았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백무열이 대뜸 꺼낸 말이었다.
딱히 부정할 말도 아니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는 짓이 꼭 둘째 놈이지."
"저놈은 도박 잘하냐?"
"둘째 놈보다는 잘하는 거 같더라."
"그래. 뭐, 돈만 안 잃으면 됐지."
"옆에서 부추기지 말어. 서희 덕에 다잡은 마음 흔들릴라."
"쯧. 그놈이 도박하면 내가 몽둥이로 때려줄 거다."
"그래. 그건 좀 부탁하자. 나이가 나이인지라, 날아 차기 한 번만 해도 허리가 욱신거린다. 요즘."
"크하하하! 천하의 최춘택이도 늙었구만, 늙었어! 하하하!"
호탕한 백무열의 웃음이 훈련장 가득 만연하게 퍼져나갔다.
하여간 이놈의 웃음소리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뭐 저리 목청이 좋은지 원.
아마 이놈은 가수를 했었으면 참 잘했을 거다.
성격도 그렇고, 잘 노는 것도 그렇고, 딴따라 기질이 다분한 녀석이다.
"아, 귀청 떨어지겠다! 화통 삶아 먹었어?"
나는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아까 굼벵이를 삶아 먹었냐는 으름장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나는 굼벵이를, 백무열은 화통을 삶아 먹은 것이다.
"…싱겁긴. 근데 우린 이제 어디가?"
그제야 백무열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지정 귀환석을 꺼내 포탈을 열었다.
슈우욱!
맞은편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푸른 소용돌이가 맺혔다.
"뭐야. 그 불구덩이로 다시 가려고?"
"그래. 이왕 가는 거 혼자 가기 심심하잖냐."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네. 거긴 왜 다시 가는데?"
"구름의 정령을 찾으러."
그리고 나는 곧장 소용돌이 너머로 몸을 던졌다.
백무열도 이어서 따라 들어왔다.
마치 태엽 시계가 되감기듯 시계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가 휘돌며 포탈이 흩어졌다.
그곳엔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앉아 있었다.
* * *
서울 강남, 유니온 본사.
월드 대항전 PVP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속보로 인해 알려진 것은 유니온에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것으로 무마되었다.
지금은 결승전을 보며 열광하느라 저러고 있지만, 조만간 관객석의 유저들도 알게 될 것이다.
저 빛이 스타 프루츠를 뜻하는 것임을 말이다.
"후우. 오늘 무슨 날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야심한 시각에 조셉을 만나고 돌아온 유민석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지금 자신의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만큼 오늘은 무척이나 피곤한 날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이가 없군.'
유니온이 모르는 오류가 발생했다.
그것도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말이다.
운영자가 모르는 게임 속의 일이 지금 유민석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파르타 공국에 올라온 빛이 올라왔습니다! 8개입니다!"
"북극에선 12개가 올라왔습니다!"
"동대륙에선 총 16개의 빛이 생성되었습니다!"
"마법 도시 오즈에선…!"
"바다에서…!"
이건 정말 미쳤다.
이 게임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
어째선지 유민석은 불안한 마음이 더 깊어졌다.
어쩌면 조셉이 말했던 재앙의 징조가 벌써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순간.
뒤편에서 들어온 이석준 부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그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마와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것이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원인 불명입니다. 그게 갑자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난데없는 고함에 정적이 일며 잠깐이지만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되었다.
너무 시선을 끌었다고 생각한 이석준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심신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유민석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했군."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흐음. 그래 원인 불명이라고? 확실한가?"
"…예.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스타 프루츠로 추정되는 빛이 계속해서 하늘로 치솟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유저들이 저 빛을 둘러싸고 싸우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유민석이 말을 흐렸다.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 것이다.
"또 뭔가 있나?"
"그게…."
"기탄없이 얘기해봐."
유민석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스타 프루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판도라'라고 명명된 조각에 대한 이야기.
이것은 최춘택이 조셉에게 말하고, 조셉이 다시 유민석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건명의 행방이었다.
"그 전에 지금 회장님과 연락이 되십니까?"
"아버지? 아니. 얼마 전부터 연락이 안 되시는데. 왜? 아버지께 급하게 할 말이 있나? 원체, 전화를 잘 안 받으시는 분이라 나도 연락이 자주 안 되긴 한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유민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이건명 회장이 이번 일을….
"일단 아버지께 연락은 남겨놓지."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할 말이 뭐야? 내게 뭔가를 숨기는 게 있으면 곤란해."
그제야 유민석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석준에게 모든 것을 얘기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어야 언젠가 예기치 못한 상황이 터졌을 때 유민석의 움직임이 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부장님."
"그래."
"지금부터 제 얘기를 가볍게 듣지 말아 주십시오."
어쩌면 미친놈의 망상이 될 수도 있음 직한 이야기가 유민석의 입에서 천천히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이제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군분투했었던 한 노인에 관한 이야기.
그 서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