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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83화 (283/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83화

제283화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것은 지금 내가 휘감은 태양으로 인해 느끼는 뜨거움이 아니었다.

건너편에서 꿰뚫을 것처럼 달려오는 백색의 뇌전.

벼락이 내 살갗을 태우는 감각이었다.

"으윽."

강했다.

견소룡은 정말로 강해져서 내 앞에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극에서 등을 지켜줘야 했던 애송이는 이제 없었다.

지금은 온전히 바로 선 한 명의 무인이 내 앞에 있었다.

그래. 그의 이름은 견소룡이다.

쿠르릉-!

멀거니 들려오는 천둥소리.

그것은 견소룡의 주먹에서 나는 소리였다.

"흐읍."

좀 더 강해진 벼락의 권격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양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견소룡의 스승에게 말로만 들었던 경지.

번개가 아닌 천둥이 되라는 유언을 동생이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형과 동생의 관계가 아닌 남자 대 남자로서 기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축하해주고 싶었다.

치지지지직!

좀 더 날카롭게 벼려진 백색의 뇌전이 태양룡의 입속을 꿰뚫고 들어왔다고, 들어올 때마다 천둥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견소룡에게도 지면 안 될 이유가 있겠지만, 내 이유도 그 못지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오오오!"

내지르는 고성과 함께 뻗어진 오른발에 날카로운 벼락이 휘감기며 살갗이 벗겨졌다.

옷의 끝부분이 찢어져 너덜거리며 타들어 갔다.

불어오는 벼락과 태양의 폭풍에 머리 뒤로 백발이 휘날렸고,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와 마력의 파동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쳤다.

"오오오!!"

견소룡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질렀다.

치지직!

그는 아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꿰뚫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림자놀이는 아까 한 번 썼기에 쓸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풍희와 춘자를 부를 수도 없었다.

아직 그 둘은 벼락을 견딜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그래. 이거라면...!

[솔로몬의 반지가 '판결의 눈'을 준비합니다.]

[반지가 유저 '견소룡'을 관찰합니다.]

반지에서 뻗어 나온 고고한 마력이 견소룡의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속으로 '됐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여전히 견소룡의 눈은 무심했다.

이 얼마나 올곧은 신념을 가진 동생인가.

적을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팔지 않는 정신력이라니.

[유저, '견소룡'이 좋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음?

[유저 '견소룡'이 좋아하는 대상은 '수련'이라는 단어입니다.]

뭐시라고라.

[당신은 대상을 커플로 판결내리지 못했습니다.]

[스킬의 사용이 취소됩니다.]

그 순간 견소룡을 휘감던 반지의 마력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런 미친.

설마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호감을 가졌던 이성이나 NPC가 없었다고?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숫제 노총각 놈이? 뭐 이런….

"아…."

하지만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오로지 수련만을 했다.

나를 이기기 위해.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지키고 싶은 신념을 위해.

오로지 한 우물만을 파고 또 판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지금처럼 스승의 말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콰아아아!

눈앞이 번쩍였다.

한줄기 섬광이 몸통을 꿰뚫는 감각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 * *

- …….

- …….

- …….

숨 막히는 긴장감이 경기장을 천천히 휘감았다.

장장 1시간에 걸친 처절한 혈투.

그것은 진정한 강자.

또는 무인들의 신성한 결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태양룡이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필살의 발차기를 사용한 최춘택.

그리고 어마어마한 벼락이 실린 주먹 하나로 태양룡에 맞서는 견소룡.

처절한 싸움 끝에 마지막으로 화면이 번쩍였고, 아무도 승자가 누가 될 것이라 꼬집어서 얘기하지 못했다.

과연 누가 이긴 것일까.

누가 진정한 강자일까….

꿀꺽-.

숨 막히는 긴장감 속.

옆에 선 미도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긴장감에 온몸의 힘이 빠진 백무열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

옅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백무열은 진정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마 견소룡이 최춘택을 상대로 저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견소룡은 싸우면서 오히려 더 강해졌고, 백무열은 다시금 견소룡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 싸움을 즐길 줄 아는 무인이었다.

설마 춘택이를 여기까지 몰아세울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다.

"누가 이겼을까요…?"

미도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아, 제발. 할아버지가 이겨야 하는데…."

미도는 양손을 끌어모아 쥐며 기도하는 것처럼 맞잡았다.

그만큼 미도는 할아버지가 이기길 간절히 기도했다.

비록 믿는 신은 없을지라도 혹시라도 듣고 있다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으면 싶었다.

이제 할아버지가 없는 한국 대표팀은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니까.

그만큼 할아버지의 존재감은 크고 넓었다.

그것은 아마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겠지.

푸쉬이익-!

바로 그때.

"아."

"아!"

"아…!"

적막을 깨는 소리가 경기장을 메아리쳤다.

그것은 캡슐이 열리는 소리였다.

또한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는 선언.

주변에서 일제히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것엔 감탄과 아쉬움이 반씩 섞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이구야…."

마침내 먼저 캡슐을 빠져나온 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백발이 성성한 미노년의 할아버지.

최춘택.

푸쉬이이!

그리고 바로 이어진 캡슐을 나오는 소리.

그곳에서 나온 것은 견소룡이었다.

먼저 나온 패자.

나중에 나온 승자.

그리고 그것을 선언하듯 화면 속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중국팀이 승리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

빗발치듯 쏟아지는 함성.

지금껏 들어왔던 함성중에 가장 커다란 것이었다.

최춘택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고무줄로 머리를 뒤로 묶었다.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승부는 졌고, 많은 이들 앞에 서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형님."

바로 그때.

왼편에서 견소룡이 걸어왔다.

그 또한 이마에 땀이 범벅이었다.

그만큼 치열했다는 반증이리라.

최춘택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형님."

견소룡은 두 손으로 공손히 맞잡으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허허. 이러지 마라니까."

최춘택은 그런 견소룡을 일으켜 세우며 가볍게 포옹을 했다.

이것은 형이 아우에게 축하를 담아서 보내는 찬사.

그리고 앞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는 남자로서의 바램이었다.

견소룡은 그런 최춘택이 좋았다.

견소룡은 곧장 포옹을 풀고, 최춘택의 손목을 잡고 높이 치켜들었다.

이번엔 승자가 최선을 다한 패자에게 보내는 존경과 찬사였다.

와아아아-!

들불처럼 함성이 번졌고, 주변에선 연신 '최춘택'과 '견소룡'을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웃고 있었다.

한국 응원단은 울고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한 우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깨듯.

"할아버지-!"

수만 관중의 함성 속에서도 귓가에 꽂히는 또렷한 손녀의 외침이 들렸다.

최춘택은 고개를 돌렸다.

미도를 비롯한 한국 대표팀 전원이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도착한 미도가 자신의 품에 폭 안겼다.

"흐에엥!"

미도의 눈물이 옷자락을 적셨다.

"허허."

최춘택은 그저 웃으며 손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갑작스레 소리친 임창용의 외침에 이은 헹가래.

순식간에 둘러싸인 최춘택은 괜히 투덜거리며 짜증을 냈다.

"에잉. 뭐하는 짓거리야!"

"자, 하나, 둘, 셋 하면 든다. 하나, 둘, 셋!"

"으라샤!!"

한국팀 사이에 핀 웃음꽃 속에서 최춘택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표정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 * *

유니온 스퀘어, 미국 대표팀 대기실.

"…결국, 영감님이 졌네."

데미안이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한국은 언제나 변수가 많은 팀이었다.

늘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었고, 그렇기에 데미안에겐 오히려 한국이 좀 더 까다로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상대라면 조금 다르다.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해 전략을 짤 수 있으리라.

"아쉽진 않아? 마이클."

데미안이 팔짱을 낀 채 구석에 몸을 기대고 선 마이클에게 물었다.

마이클은 TV로 가 있던 시선을 옮겨 잠깐 데미안을 봤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장을 보았다.

지금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섭섭? 시원?

아니다.

어째선지 마이클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왜 그래. 아쉬운 게 아니야?"

"아니. 그냥…. 모르겠다. 나도."

"음, 뭐 그래. 아무튼 나는 잠깐 전략 좀 짜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이 안방으로 가버렸다.

반면 마이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분명 아쉬운데 시원하기도 하다.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에는 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어쩌면 속으로 최춘택이 올라오길 바랐던 것일까.

견소룡보다는 그와의 접점이 더 많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승자는 견소룡이 되었고, 그렇다면 자신은 그런 최춘택을 이긴 견소룡을 이기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이 아크스타의 최강자임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공허함은 무엇인가….

마치 뭔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은 어째서 드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도대체 최춘택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자신의 가슴에 담기는 걸까.

- 으쌰! 읏차! 으랴아!

한국 대표팀에 둘러싸인 채 헹가래를 당하는 최춘택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았다.

마이클은 자신이 왜 이런 공허함과 아쉬움이 섞인 짜증을 내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대체 뭐야, 이 감정은….'

굳이 표현하자면 '질투'라고 표현하는 게 옳으리라.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질투는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것에 대한 질투인지 마이클은 알 길이 없었다.

'…후우. 드디어 내가 미쳤나 보군.'

마이클은 애써 감정을 털어내듯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은 경기에 집중할 때였다.

이 묵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대회가 끝나고 확인해도 늦지 않으리라.

바로 그때.

- 속보입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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