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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81화 (281/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81화

제281화

"……."

싸늘한 정적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나는 홀로 서서 아래에 있는 견소룡을 굽어보았다.

안승현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

그들은 백무열이 지던 그 순간.

마지막을 내게 부탁하며 자리를 떠났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나와 견소룡.

그리고 한 자락의 긴장감뿐이었다.

"…강해졌구나. 소룡아."

그리고 그런 내 혼잣말에 대답하듯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더욱 강해진 레이트라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 한눈에 보아도 그렇지. 이제 레이트라는 1등성에 올라도 무리가 없을 게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어쩌면 모든 것을 던져야 할 싸움이 될 지도 몰라. 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혹시나 내가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후회가 남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에게 사도 버프를 부여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온몸을 휘감는 신격의 힘이 느껴졌다.

과연 사도 버프는 대단한 권능이었다.

내가 레벨이 오르고 강해질 때마다 더욱 많은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니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길안내를 할 준비가 됐다고 말합니다.]

"가자."

나는 하늘을 향해 백색의 뇌전을 방출하는 견소룡을 보며 허공을 조작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을 땐, 이미 눈앞에 견소룡의 등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는 견소룡.

"오셨습니까."

"그래. 많이 강해졌구나."

"다 형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우리 둘은 동시에 "허허." 웃었다.

누가 멀리서 본다면 마치 우애가 좋은 형과 아우처럼 보일 만한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

[10초 뒤, 경기가 시작됩니다.]

"음."

"시간이 되었군요."

견소룡이 자세를 잡았고, 나 또한 곧 있을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비장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견소룡은 백무열을 상대하느라 무척이나 지친 상태.

이런 상대를 싸워서 이겼을 때 내 기분은 과연 좋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또 후회는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갔다.

"잠깐만 소룡아."

"……?"

그렇게 경기 시작을 5초 남기고, 나는 견소룡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이건 불공평하다. 생명력을 회복해라.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의 너와 싸우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 잠깐만 쉬자."

삐이이이-!

그렇게 경기의 시작 음이 울렸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와 견소룡은 서로를 바라만 본 체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그 시각.

조셉을 만난 유민석은 그간에 있었던 사정들과 이건명의 계획.

그리고 최춘택의 정체를 비롯한 강재성이 남긴 증거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진정 사실입니까?"

조셉은 그런 유민석을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불신에 가득찬 그의 가슴에 대고 확신을 담아 말해주었다.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제가 믿는 신께 맹세합니다."

원래 조셉은 무교였지만, 눈앞의 유민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없는 신도 만들어내야 했다.

원래는 이걸 최춘택에게만 말하려 했던 것이지만, 최춘택은 언젠가 벌어질 재앙에 대비해 한 명 정도는 유니온에 사람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옳은 말이었기에 조셉은 반드시 눈앞의 유민석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재앙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것이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매형의 뜻일 테니까.

"후우…."

유민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는 손에 쥔 강재성이 남긴 증거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추악한 이건명의 실험에 희생된 실험자들의 명단.

그중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고아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죽어서 불법적인 생체 실험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엔 최춘택 어르신의 부인인 유선영도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름 옆엔 실패라는 단어가 적혀있었으나, 유선영의 옆엔 선명하게 '성공'이라는 글자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이아가 최춘택 어르신의 부인일수도 있다는 겁니까?"

유민석이 조셉에게 따지듯 묻자 조셉이 대답했다.

"일단 제 추측에는 그렇습니다. 보고서에 적혀있는 사람 중 최초로 실험에 성공한 것은 그분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야 앞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르신이 튜토리얼에서 일곱 별의 선택을 받은 이유. 그것이 어르신의 부인이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됩니다."

"……."

유민석은 이마의 주름을 만들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에 어르신이 정말 우연히 손녀 때문에 아크스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정말 이건명이 이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무언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유민석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증거들은 분명 이건명이 그러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알면 알수록, 파내면 파낼수록, 재성이 형님이 저에겐 보내준 자료들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지금 이건명이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막아달라구요."

진중한 조셉의 말에 유민석이 아무 말 없이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입안이 씁쓸해서 품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피워도 됩니까?"

"괜찮습니다. 피우십쇼. 저는 아이들 때문에 끊어서요."

"그럼 죄송하지만 피겠습니다. 너무 혼란스럽네요."

치익!

유민석의 라이터가 담배의 끝을 태웠다.

재빨리 한 모금 머금고 목을 타고 내려온 알싸한 멘솔 연기가 폐를 타고 올라오더니, 다시금 코로 내뿜어졌다.

후우.

이제야 좀 뭔가 트이는 기분이다.

"재앙의 정체는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검지와 중지로 담배를 거머쥔 유민석이 조셉에게 물었다.

"예. 아직은 어느 것도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재앙을 이건명이 계획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요. 재성 형님이 남긴 좌표만이 지금 희망입니다."

"흐음."

유민석은 생각했다.

눈앞의 조셉 또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는 식물인간으로 죽어가는 매형이 남긴 부탁을 붙잡고 늘어져,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치열하게 혼자 싸우고 있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온전히 당신의 말이 다 믿기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과연 유니온의 추악한 면이 드러나고, 그것을 마주했을 때. 자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지금 유민석의 마음은 아직 온전히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의 말이 사실이고, 재앙의 징조가 만약 드러난다면, 당신을 비롯해 어르신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을 약속합니다. 그것이 비록 추악한 진실이라도, 당당히 마주보고 서겠습니다."

조셉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무척이나 불안했는데, 최춘택 어르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니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하하…."

조셉이 허탈하게 웃으며 유민석의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유민석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저도 하나만 주십쇼. 이거야 원, 오늘은 담배가 없으면 허전해서 안 되겠습니다."

* * *

서울, 유니온 스퀘어 경기장.

-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 최춘택 선수의 아량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보통 선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국의 이익을 생각했을 텐데,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하는 두 형제간의 우애가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하하,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군요.

-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데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애' 또한 국경이 없군요.

누군가 본다면 맥이 빠질 수도 있는 광경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응원단은 두 사람을 향해 연신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한국의 응원단도 화답하듯 파도타기를 먼저 시작했다.

관객석이 물결치듯 요동치며 들썩였다.

한국의 위상이 또 한 번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이게 뭔 짓거린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런 한국의 관객석의 한 가운데.

맥 빠진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최불룡은 누구보다 맥이 빠지는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이번에 가까스로 월드 대항전의 마지막 표를 암표로 구했더니, 이런 힘 빠지는 경기라니.

"영감탱이가 가면을 벗었다길래. 실물이나 볼까 했는데, 이건 뭐 맥빠지는 경기만 하고 있고. 이건 뭐 재미가 하나도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크스타에 접속해서 게임이나 좀 더 할 걸 그랬다고 최불룡은 생각했다.

요즘 최불룡은 한창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다크울프의 정체가 밝혀지고, 메테우스의 보안이 허술해진 지금.

영감이 한창 월드 대항전으로 바쁠 사이에 최불룡은 메테우스에 몰래 들어가 에일린과 사랑을 꽃피우는 중이었다.

'아, 에일린이 보고 싶다.'

불룡파의 동생들에게는 폐관 수련을 할 테니 당분간 게임 속에서 찾지 말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고기 스튜 끓여놓을 테니까 오라고 했는데.'

최불룡은 메테우스의 꽃집에 있는 에일린을 찾아갔고, 에일린은 그런 자신을 받아주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면의 평화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저질렀던 자신의 모든 죄악이 에일린의 앞에만 서면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 같달까.

어쩌면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최불룡은 생각했다.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에일린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좋으리라.

불룡파의 동생들도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고 돌아갔을 때.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행복이었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최불룡에겐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토록 집착하며 살았던 돈도 에일린의 앞에선 무용했다.

"…흠."

최불룡은 팔짱을 낀 채 별처럼 빛나는 천장의 조명을 올려보았다.

무척이나 눈부셨다.

듬성듬성 있는 조명은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았다.

늘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던 자신은 이제 앞을 밝혀줄 빛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읏차."

최불룡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으로 나가는 계단을 올라 경기장을 나가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도착한 출구의 통로는 조금 어두웠다.

예전이라면 깊은 어둠의 고독을 마주하며 쓸쓸하게 걸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이제 자신의 옆엔 에일린이 있다.

'…에일린.'

그렇기에 어둠을 마주해도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

'금방 가리다.'

와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함성에 최불룡이 문득 뒤돌았다.

화면 속의 최춘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견소룡 또한 마찬가지.

둘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런 둘을 향해 최불룡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보기 좋소. 영감님. 오래오래 사쇼. 난 갑니다."

저벅저벅.

이제는 쓸쓸함을 넘어 당당하게 걷는 최불룡의 등 뒤로 요란한 굉음이 터졌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경기장의 함성이 최불룡의 등을 기분 좋게 찌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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