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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80화 (280/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80화

제280화

폐허가 되어버린 성벽과 무너진 돌무더기.

주변에 듬성듬성 패인 구덩이는 치열한 싸움의 흔적들을 짐작케 했고, 바위에 새겨진 서슬 퍼런 칼자국이 그간의 싸움이 쉽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들판의 한 가운데서 견소룡은 눈을 감은 채 지난 콜로세움의 싸움을 떠올렸다.

'쉽지 않을 테지.'

당시의 백무열은 정말 불세출의 영웅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백발의 노인이 휘두르는 목검은 눈앞의 적을 용서치 않았다.

누구라도 덤비면 목검에 두들겨 맞거나, 마력 이발기로 머리를 밀리는 굴욕을 당하곤 했다.

조금 웃기는 구석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웃기만 하기엔 그의 목검술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곤성이라.'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곤성(棍聖)이라고 불렸다.

백무열은 싸움을 거듭할수록 강해졌고,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견소룡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한계가 없이 성장하는 괴물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백무열이 자신의 상대라는 것이, 견소룡은 기꺼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호승심이라는 감정이었다.

[유저, '백무열' 님이 입장하였습니다.]

우우웅-.

그리고 맞은편에서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음, 이렇게 단둘이 보는 건 처음인가? 반갑네. 백무열일세."

견소룡이 그런 백무열이 건네는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맞잡았다.

두툼하고 투박한 손.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녹아든 것 같은 거친 손바닥은 그가 오랜 세월 수련을 거듭해온 한 분야의 장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견소룡은 내심 감탄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또 다른 최춘택을 만난 것만 같은 느낌에 견소룡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 자신은 나라의 자존심을 등에 업고 있는 남자.

중국을 대표하는 견소룡은 당당히 한국의 백무열에게 자신을 소개할 것이었다.

"견소룡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의 사이로 카운트다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둘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

백무열이 허공에 목검을 힘차게 내리긋자, 난데없이 봄이 찾아왔다.

휘날리는 꽃잎 사이로 백무열은 내심 속으로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으음, 과연 춘택이가 칭찬을 할 만해.'

직접 마주한 견소룡의 기도는 무척이나 고강한 무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마치 20년 전의 최춘택을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처음 악수를 했을 때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걸 말이다.

'이거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해야겠는걸.'

삐이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백무열이 목검을 전방으로 휘두르며 몽둥이의 가호를 펼쳤다.

더욱 강대해진 힘의 파동을 느끼며, 백무열이 패도적인 검기를 앞으로 쏟아냈다.

슈슈슈슉-!

무속성의 검기가 신기루 같은 유려한 환상을 낳으며, 견소룡의 위와 아래.

그리고 양옆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다.

콰콰콰쾅!

흩날리는 먼지가 풀과 흙을 만나 색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비치는 것은, 어느새 백색의 뇌전을 개방한 아수라.

견소룡이 뇌기가 어린 눈을 번들거리는 것이었다.

'진짜 쉽지 않겠군.'

그런 그의 뒤로 십이지의 뇌수들이 똑같이 눈빛을 번들거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 * *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어느 병원.

부릉-.

고급스러운 세단이 병원 주차장 구석에 세워졌다.

유민석은 곧장 차에서 내려 넓은 듯하면서도 세련된 한적한 병원을 둘러보았다.

저녁이라 그런지 주변은 한산하고 고요한 것이 나이가 들어 귀농을 한다면 아주 좋을 만한 곳이었다.

'…여기가 재성 병원인가.'

이곳은 유민석이 조셉과의 통화 직후.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유민석에게도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아크스타를 개발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강재성 박사가 재단을 운영해 세운 병원.

그의 이름을 딴 '재성'이라는 병원은 이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강재성 박사를 보듬고 있었다.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민석이 정장의 깃을 여미며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건너편 카운터에는 1년 전 보았던 간호사가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802호 강재성씨 면회를 왔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셨나요?"

"네. 확인 부탁드립니다. 유민석이라고합니다."

"잠시만요."

간호사는 익숙하게 수화기를 들더니 802호와 통화를 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통화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호자 분이 허락하셨으니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잠시만요."

그렇게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출입증 비슷한 것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곳엔 면회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8층으로 올라가시면 되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민석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8층을 눌렀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뒤엉키기 시작했다.

'과연, 그 말이 정말일까.'

전화로 조셉에게 상세히 물어볼 수 있었으나, 유민석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조셉이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유민석은 직접 보고 듣고 느끼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청춘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으니 당연했다.

띵-!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익숙하게 802호를 찾았다.

재작년쯤 직원들이 단체로 병문안을 왔던 곳 그대로였다.

똑똑-.

유민석은 지체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에선 "들어오세요."라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 마주한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남편에게 찾아오실 거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강미성.

강재성 박사의 여동생이자, 조셉의 아내인 여자.

그녀는 하버드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병문안을 왔는데, 제가 급하게 오느라 빈손으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 먹을 게 부족한 건 아니라서요."

강미성이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사실 맞는 말이다.

강재성 박사는 아크스타를 만들었던 핵심인물이었던 만큼 주식을 비롯해 유니온에서 받은 돈이 천문학적일 정도로 많았다.

즉,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거다.

삑-. 삐익-.

"……."

"……."

유민석과 강미성의 시선이 동시에 강재성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재작년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새삼 그때 본 강재성과 지금 마주한 강재성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당시엔 그저 갑작스러운 사고였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르신의 말과 조셉의 증거를 대조해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드륵-.

바로 그때.

다시 한번 병실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재작년엔 보지 못했던 남자.

유민석은 한눈에 그가 조셉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조셉도 마찬가지.

"유민석 씨?"

"네. 제가 유민석입니다. 조셉 씨?"

"…맞습니다. 따라오시죠. 여보. 나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강미성의 인사를 받으며 유민석은 병실의 문을 나섰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함을 느끼며, 유민석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강재성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내려앉은 달빛이 창을 넘어 강재성의 얼굴을 맑게 비추고 있었다.

* * *

서울, 유니온 스퀘어 경기장.

"아, 안 돼…!"

한국 팀의 벤치에 앉아서 화면을 지켜보던 미도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경기는 그야말로 과열 양상을 띠고 있었다.

파죽지세의 위력을 보여주는 견소룡과 백색의 뇌수들.

백무열은 그런 뇌수들을 소환한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로 막아내고 있었다.

- 콰앙! 콰아앙!

엄청난 힘의 격돌이 화면 너머에서도 느껴졌다.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도 이렇게 긴장을 느끼며 침을 삼킬 정도인데, 정작 치열하게 싸우는 두 사람은 어느 정도일까.

미도는 자신도 모르게 쥐어지는 두 주먹을 떨며 가볍게 숨을 죽였다.

"무열이 할아버지가 저렇게 강했어?"

"미쳤네. 뇌신이랑 막상막하라니."

"대체 젊었을 땐 어떤 모습이셨을지 상상도 안 간다."

각각 김현우, 은정혁, 임창용의 말이었다.

세 사람은 중국의 선수들과 훌륭하게 싸우고 전사했다.

물론, 그것은 미도 또한 마찬가지.

이긴 선수들도 있고 진 선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백무열을 응원하고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거센 응원전이 물결치듯 관객석을 메아리쳤다.

- 대단합니다. 백무열 선수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한국엔 최춘택 선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은 백무열입니다. 중국의 뇌신과 이토록 막상막하를 이루는 실력이라니요.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 진정 곤성(棍聖)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선수입니다. 응원합니다! 백무열 선수! 조금만 더 힘내주십시오!

해설자들도 손에 땀을 쥐는 듯한 격한 음성으로 백무열을 응원했다.

그만큼 두 사람이 보여주는 대결은 차원이 달랐다.

특히나 나이가 지긋한 백무열이 젊은이들 보다 훨씬 잘 싸우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도는 알고 있다.

지금 백무열이 약간이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승님!'

그리고 아까 백무열은 목숨을 하나 잃었다.

저번처럼 되살아나는 스킬 덕에 다시 살아나 강해졌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미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

바로 그때.

짧은 비명이 미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주변에서도 마찬가지.

방금 백무열이 또 한 번 목숨을 잃었다.

그의 등 뒤에 맺혀있던 뱀의 형상 중 머리 하나가 또 사라졌다.

총 8개의 머리 중 7개가 사라진 것이다.

아마 저것이 그가 되살아날 수 있는 횟수임을 미도는 물론이고, 해설자와 관객들도 대충이지만 짐작하고 있었다.

"어어. 안 돼!"

"아악-! 할아버지!"

"제바아알!"

그러나 그것조차 예상했다는 듯 견소룡은 곧이어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색의 뇌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뇌기 덩어리가 되살아난 백무열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콰르르르르릉!

"……."

화면이 새하얗게 물들고, 괴물 같은 정적이 경기장에 내려앉았을 즈음.

승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판명되었다.

이어지는 화면에 패자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유저, '백무열'이 로그아웃되었습니다.]

와아아아아-!

쏟아지는 중국 응원단의 함성.

치열했던 결투의 승리자는 견소룡이었다.

그는 마치 이곳을 보고 있을 관객에게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란 듯 승리의 세레머니로 오른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 쿠르릉!

주먹에서 뻗어 나온 백색의 뇌전이 한줄기 섬광처럼 하늘로 솟구치더니, 몰려든 먹구름을 꿰뚫고 맑은 햇살을 한가득 불러왔다.

그 사이로 비친 견소룡의 미소는 세상 모든 번뇌를 털어버린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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