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9화
제279화
칠호권의 고수 양범은 한없이 미도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양범은 내심 속으로 놀랐다.
자신의 칠호권을 이토록 작은 땅인 한국의 소녀가 피해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놀랍군!'
그러나 미도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는 커뮤니티의 동영상을 통해 중국의 선수들을 열심히 분석했고, 저번에 정신을 잃으며 팀원들을 위험에 빠트렸던 것을 떠올리며, 가장 이를 악물고 지옥 훈련을 견뎌왔다.
[성좌 스킬, '구도의 예술'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그림자를 짧은 시간 속박해 구도를 비틀어버립니다.]
저번 훈련에서 깨닫게 된 '구도의 예술'이라는 스킬.
화가는 언제나 창조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며 공간지각능력을 이용해 대상을 다양한 구도에서 봐야 한다는 다빈치의 조언으로 깨닫게 된 스킬이었다.
"……!"
놀란 양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미도에게 쇄도하던 자신의 주먹이 짧은 시간이지만 속박되는 느낌이 들며, 옆을 살짝 빗기며 땅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도는 놓치지 않았다.
"하압-!"
재빨리 양범의 품으로 파고 든 미도가 그제야 발검을 하며 검을 뽑았다.
핏빛의 날카로운 '피의 도살자'가 이를 드러내며 양범의 앞섬을 베었다.
하지만 양범은 왼팔을 들어 가까스로 검을 막았다.
피슛!
양범의 왼팔에 검상이 길게 남았다.
"하앗!"
미도는 틈을 주지 않으려 더욱 빨리 검을 휘둘렀다.
양범은 지지 않겠다는 기세로 양팔에 마력을 둘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파괴적인 칠호권의 권격을 다양한 각도로 쏟아냈다.
까앙! 깡! 까앙!
검과 권이 만나 작은 불꽃이 튀었다.
'아직 어린 친구가 대단해…!'
정말이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검술을 지닌 소녀였다.
양범은 호적수를 만난 것처럼 웃으며 크게 오른발을 굴렀다.
쿠웅!
날카로운 땅의 파편들이 미도의 사각에서 튀며 위협하듯 날아들었다.
"…흡!"
미도가 재빨리 튕겨냈지만, 양범의 손은 그녀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내질렀다.
퍼억!
양범이 미도의 오른쪽 어깨를 때렸고, 검을 든 그녀의 팔이 살짝 떨리며 빈틈이 드러났다.
살짝 밀려난 미도에게 양범은 빠르게 돌진했다.
"잉크 병사들!"
바로 그때.
부름에 답하듯 일어난 잉크 병사들이 양범을 포위하듯 감싸며 검과 창을 내질렀다.
양범은 마력을 끌어올려 칠호권으로 한방에 한 명씩 잉크 병사들을 다시 그림으로 돌려보냈다.
퍽! 퍼퍽! 퍽!
크어어엉!
호랑이의 기운을 닮은 파괴적인 권법이 양범의 손에서 다시금 펼쳐졌다.
잉크 병사들이 사라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미도는 스케치 마인드를 이용해 이미 자신에게 버프를 걸고 달리고 있었다.
그런 양범의 빈틈을 노리며, 미도가 사각에서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눈앞에 도달한 미도를 보며 양범이 씩 웃었다.
"…나쁘지 않은 한 수였소."
양범의 입에서 살짝 피가 흘러내렸다.
"…고맙습니다."
미도는 자신을 칭찬해주는 양범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러나 양범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양범의 손이 미도의 검을 움켜쥐려 했고, 여기서 잡힌다면 미도는 꼼짝없이 최단거리에서 그의 칠호권을 정면에서 맞게 되는 것이었다.
"흐읍!"
하지만 미도는 방심하지 않았다. 당황한 양범의 낯빛을 보던 미도가 씩 웃었다.
또 한 번 구도의 예술을 사용해 그를 잠깐이지만 속박한 것이었다.
"상대가 되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촤악!
양범의 배에 꽂힌 검을 미도가 비틀어 뽑아냈다.
이어지는 그녀의 검로가 양범의 전신을 빠르게 베었고, 지나가듯 반대편에서 나타나 검에 묻은 피를 흩뿌렸다.
"…쿨럭. 이번엔 훌륭한 한 수였소."
양범이 털썩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 * *
"으음, 훌륭하다."
이번 훈련에서 미도를 직접 지도했던 백무열의 고개가 연신 끄덕였다.
지난 시간 동안 그렇게 미도를 굴리며 소리치더니, 한층 더 날카로워진 미도의 검술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미도의 재능이 어느 정도지?"
"솔직히 말해줘?"
"그래."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백무열이 "흐음."하며 턱수염을 쓸더니, 눈알을 위로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잠깐 사이에 생각을 마쳤는지 대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능을 일찍 깨우쳤다면 아마 지금 성찬이와 동급이었을 게야."
"그럼 지금은 성찬이보단 못하단 소리야?"
"그래. 내 손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냉정하게 스승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야. 그래도 지금부터 꾸준히 수련을 한다면, 용은 못 되어도 이무기 정도는 가능할 테지."
백무열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사실 처음 본다.
이 정도로 그에게 칭찬을 받은 인물을 내가 못 본 탓이다.
그렇다면 미도가 그만한 재능이 있다는 건데.
과연 다빈치를 미도에게 짝지어 준 것이 잘 한 일이었을까….
고민이 깊어 갔다.
"혹시 미도의 성좌 때문에 그러냐?"
"……."
이놈이 그건 또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하여간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건 이놈밖에 없다.
이 녀석 앞에선 거짓말도 못 하겠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무열이 피식 웃었다.
"흐음. 미도에게 들었다. 원래 그 아이에게 짝지어줄 성좌가 있었는데, 네가 지금의 다빈치인가 뭔가 하는 놈을 주장했다고 말이야."
"……."
"하지만 미도는 널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 조언을 무시했다가 벌어진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더군."
"책임감이라…."
무거운 짐을 미도의 어깨에 짊어지운 것 같아,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왔다.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훈련을 했었던 것일까.
"네가 말한 그 성좌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다만, 만약 미도가 그 성좌를 골랐어도 어떤 형태로든 미도는 책임감을 느꼈을 거다. 원래 힘이란 그런 거니까 말이야. 원래 꽃을 피우려면 어쩔 수 없이 흙을 손에 묻혀야 하는 법이야."
나는 괜히 퉁명스레 콧방귀를 꼈다.
좀 더 자상하게 할 순 있겠지만, 우리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고맙고, 감사하고 이런 말 따윈 필요 없는 거다.
40년이나 봐온 우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미도 잘 부탁한다."
"흥. 걱정 붙들어 매라. 이래봬도 스승 노릇 제대로 하고 싶게 만드는 제자니깐 말이야."
그제야 나는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내 시선은 저 너머 경기장 아래에 있는 미도에게로 향했다.
휘날리는 머릿결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나부끼고 있었다.
* * *
경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결과만 놓고 따진다면 호각이었다.
중국에선 벌써 5명의 선수가 죽었고, 우리 한국은 3명의 선수가 죽었다.
스코어는 5대3.
한국이 간신히 2승을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이긴다면 한국은 결승전에 진출할 것이었다.
[유저 '김현우'가 로그아웃되었습니다.]
그러나 방금 김현우가 지고 말았다.
스코어는 다시 5대4.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건너편에 있는 남자는 중국의 뇌신이었으니까.
츠츠츠츳!
유피테르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번개의 신을 마주한 것과 같은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짜릿하게 훑었다.
잠깐이지만 모골이 송연했다.
…과연. 만만치 않군.
TV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 견소룡에게서 느껴졌다.
과연 아까 악수를 나눌 때 느꼈던 자신감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내가 나갈 차례인 것….
"춘택아."
바로 그때.
팔짱을 낀 채 견소룡을 노려보고 있던 백무열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불렀다.
"왜."
"저 녀석. 저번에 나랑 싸우고 싶어 했었지?"
"그랬었지. 근데 그게 왜?"
"한 번 물어봐주라. 내가 나가도 되는지."
사실 견소룡과는 경기 전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녀석의 상대는 무조건 내가 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뭐,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의견을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하여간 이 싸움광 놈이 또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으니, 안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강제로라도 나갈 것처럼 보였다.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렇게 나는 견소룡에게 귓속말을 했다.
서로가 적인 상황이라고 귓속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잭슨: 소룡아.
- 견소룡: 예. 형님.
- 잭슨: 무열이가 너랑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잠깐의 사이를 두고 견소룡의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아래쪽에 있는 견소룡이 호방한 웃음을 흘렸다.
- 견소룡: 저야 좋지요. 안 그래도 저번에 콜로세움에서 자웅을 겨루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 잭슨: 정말 그래도 되겠냐?
- 견소룡: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백무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백무열도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번들거리는 눈을 하며 물었다.
"뭐라디?"
그런 그에게 나는 그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하하하!"
백무열이 만족스러운 듯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허공을 조작했다.
그의 신형은 어느새 경기장에 올라가 있었다.
"괘, 괜찮을까요? 그래도 중국의 뇌신인데…."
아직 경기에 나가지 못한 안승현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안승현은 참 소심해서 어떻게 국가 대표가 되었나 싶다.
뭐, 서포터로 쓸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같은 PVP에서 안승현은 사실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잘 할게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견소룡이 각성한 백색의 뇌전은 본디 유피테르의 힘이었으니까.
…그리고.
백무열이 거머쥔 목검을 허공에 털었다.
목검에 붙어있던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며 봄이 되었다.
휘황하게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듬직한 노인 하나가 세상을 굽어보듯 등을 내비쳤다.
"…헤라클레스는 유피테르의 아들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