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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76화 (27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76화

제276화

나와 유민석은 베란다 옥상에 마련된 실내 흡연실에 도착했다.

"불, 여기 있습니다."

"음."

유민석은 담배를 꺼내 내게 주고는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가상의 세계에서만 피다가 오랜만에 현실에서 피는 담배는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넌 안 피냐?"

"하하, 아무리 그래도 맞담배는 좀…."

"펴라.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네가 그러고 서 있으면 내가 더 무안해."

"아, 예. 그럼…."

유민석은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긴장을 풀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그래. 용건이 뭐냐."

"그게 실은 손녀분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미도?"

"예."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녀석이 갑자기 미도 얘기는 왜 꺼내는 건가 싶어서였다.

"손녀분이 저희 유니온 인턴십 프로젝트에 최우수 성적으로 뽑힐 예정입니다. 아마 조만간 집으로 통지가 갈 겁니다. 손녀분은 내년 3월 전에 다니시는 학교로 취업계를 내시면 학업에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아, 그래? 그 뭐시냐. 정직원인가 그거지?"

나는 유민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내가 팔에 알이 배길 정도로 미도의 숙제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거인 모양이다.

성좌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종이를 당시 나는 '다크 울프'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괜스레 미도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뿌듯했다.

"큼. 정직원은 아닙니다. 거기서 1년 정도 일의 성과를 지켜보고 저희 측에서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이지요."

"뭐야? 에이, 그럼 정직원도 아니구만. 뭐, 그런 걸로 생색을 내? 하여간…. 구시렁구시렁."

나는 유민석의 머리에 나사를 조이는 것처럼 무언의 압박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잘 먹혀 들어가는 듯했다.

"크흠.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흥. 손녀가 정직원 못되면 다 네놈 탓이야!"

사실 반은 협박이었다.

"아, 예. 하하…."

유민석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그러던 그가 난데없이 정색을 하더니,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게 말을 꺼냈다.

"저 혹시…."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예. 그럼 기탄없이 얘기 드리겠습니다. 혹시 손녀분의 보고서에 어르신의 도움이 있었습니까?"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괜히 내가 말을 꺼냈다가 미도에게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는 것도 컸다.

"손녀분에게 피해가 간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전 그런 것에 관심도 없구요. 애초에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거기에 적힌 내용들은 올해 나온 스타 프루츠 능력자들을 마치 꿰뚫고 쓴 것 같았습니다. 전 어르신께서 그것에 연관이 있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 사실들을 알고 계신 건지 알고 싶은 겁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과연 이것을 유민석에게 얘기를 해도 될 것인지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하염없이 흡연실 안을 맴돌았고, 그렇게 정적과 함께 1분가량이 흘렀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나는 손에 있는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머금고는 가운데 자리한 쓰레기통에 짓이기며 꺼트렸다.

"그래주시면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래. 민석아."

"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어디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조셉은 내게 아직 이 사실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의 말대로 게임 속에 재앙이 찾아온다면, 유니온에도 나를 도와줄 원군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기로 했다.

유니온이 만든 게임의 진실.

그리고 강재성 박사와 이건명 회장에 대해서.

"…넌 이건명을 어디까지 믿고 있냐."

이젠 말할 때가 되었다.

* * *

미국과 스페인의 치열한 공방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두 명의 에이스 중 가장 먼저 출격한 제임스는 스페인의 선수들을 차례대로 무너트렸다.

스타피스에서 얻은 그림자 탄으로 말미암은 속사와 연사는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아성을 그대로 무너트려 버렸다.

탱커 위주의 캐릭터로 강력한 수비진을 자랑하던 스페인의 선수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아크 스타 최강자 중 한 명이라고 불리는 토레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흥. 하찮은 재주로 날뛰는 망아지구나. 딸꾹-."

그렇게 다시 시합이 시작됐고, 그는 정말 손쉽게 제임스를 잡아버렸다.

그가 자랑하는 '수경 보르도'로 인해 만들어진 물의 분신이 제임스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다.

제임스는 그런 토레즈와 분신의 공세 속에서 토레즈가 만들어낸 수중 감옥에 속절없이 갇히고 말았다.

마무리는 수룡 블라쉬의 몫이었다.

"아쿠아 브레스."

크오오오-!

처절한 수룡의 포효가 제임스의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이윽고 블라쉬의 입에서 푸르고 맹렬한 기운이 쇄도하며 뻗어가더니, 제임스를 통째로 집어 삼켜버렸다.

콰아아아-!

그렇게 눈 녹듯 사라져버린 제임스의 자리엔 오로지 토레즈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가히 위풍당당했다.

[유저 '제임스'가 로그아웃되었습니다.]

[서둘러 다음 선수를 내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제임스의 분전을 지켜보고 있던 데미안을 비롯한 미국의 선수들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제임스가 선전을 펼치며 3승을 먼저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다른 선수들도 예상했던 바였다.

문제는 제임스가 토레즈의 상대하며 생명력과 체력을 얼마 깎지 못한 데 있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데미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예상보다 제임스와 토레즈의 상성이 안 좋았어. 그렇게 되면 역시 플랜B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러나 데미안은 이런 상황 또한 내다보고 있었다.

뛰어난 전략가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토레즈를 상대할 원군 또한 부른 상태.

물론 엄청 나오기 싫어했지만, 그는 봉사활동을 하며 실력을 썩히기엔 아까운 재야의 인재였다.

데미안은 봉사활동에 매진하느라 잠적해 있던 그를 삼고초려를 해서 데려왔다.

"카푸치노."

"음? 내 벌써 차례야?"

마침 원형의 탁자를 마법으로 소환해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던 카푸치노가 빙그레 눈웃음 지으며 일어섰다.

희귀 등급의 낮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오로지 컨트롤 실력만으로 제우스 길드의 부길드장의 자리에 오른 남자.

본디 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던 그가 본색을 드러낼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흐음. 갔다 올게. 약속 잊지 마."

"그래. 이미 변호사와 얘기를 진행 중이야. 난 한 번한 약속은 지키는 편이고."

"알지. 알아. 하하하-."

카푸치노가 호탕하게 웃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데미안은 곧장 경기장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어느새 나타난 카푸치노와 토레즈가 서로를 노려보며 몸을 풀고 있었다.

'하여간 독특한 녀석이야.'

데미안은 카푸치노를 데려오기 위해 평생 한 번 해보지도 못한 기부를 하게 되었다.

그를 데려오는 조건은 까다로웠다.

카푸치노의 이름으로 미국의 고아원에 카페를 차려주는 것이 첫 번째였고, 매달 익명의 이름으로 세이브 더 칠드런에 정기적인 후원을 하는 것이었다.

평소 헌신과 봉사.

그리고 정의를 외치던 카푸치노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그럼에도 독특한 녀석인 것은 틀림없었다.

바로 그때.

마이클이 입을 열었다.

"…난 내키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그와 싸우고 싶었는데 말이야."

데미안은 그런 마이클을 보았다.

마이클은 정정당당하게 토레즈와 싸우고 싶어 했지만, 아까 보았듯 상성의 문제가 컸다.

마이클의 모래는 애초에 토레즈의 물과는 상성에서 지고 들어갔다.

자신은 마이클을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이 꺼려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이것도 존중해주면 좋겠어. 이게 나의 방식이니까."

그렇기에 데미안은 카푸치노를 데려왔다.

빙결의 지배자라 불리는 카푸치노의 실력이라면 분명 토레즈에게 멋진 한방을 선사해줄 수 있으리라.

"흠…."

"너무 그렇게 보지 말아줘. 이래봬도 카푸치노를 데려오려고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됐다고. 난 반드시 미국을 우승으로 이끌 거야. 그게 주장으로서 내 책임이니까. 어차피 넌 그 영감님이랑 싸워야 하니 힘도 아끼면 좋잖아? 듣자 하니 그분이 토레즈를 묵사발을 냈다던데."

마이클의 볼이 꿈틀거렸다.

그건 마이클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최춘택이 저번 스타필드 종목에서 토레즈와 단신으로 맞붙었던 것은 커뮤니티에서도 아직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베스트 동영상에 자리해 있었다.

데미안은 아마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넌 그런 영감님을 이기면 되는 거야. 그럼 명실공히 네가 아크스타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거고. 토레즈는 우리에게 맡겨줘. 나는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도 미국의 국가대표야. 물에 대한 내성 인첸트를 하느라 돈 좀 썼지만. 뭐, 이 정도는 해야 우승하지 않겠어?"

데미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제야 마이클은 얼굴에 어린 불쾌감을 지울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자신의 오만함을 돌려서 지적해준 데미안이 고맙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부탁한다."

"그래. 맡겨줘."

마이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데미안은 그런 마이클을 향해 역시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건너편의 경기장으로 향했다.

마침 카푸치노와 토레즈의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매서운 눈보라를 동반한 얼음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휘오오오-!

카푸치노의 특기인 블리자드가 경기장을 집어삼켰다.

* * *

한편, 최춘택과의 이야기를 마친 유민석은 곧바로 본사에 자리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유민석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곧장 목에 매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털썩.

"후우…."

유민석은 멍하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최춘택은 어디부터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를 이야기들을 자신에게 해주었다.

어쩌면 열지 말아야 했던 금단의 상자였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들을 믿기엔 자신의 가슴이 부정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

초창기에 입사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생각한 유니온이, 세계의 위인으로 우뚝 서며 모두에게 존경을 받으며 추앙받는 이건명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실험들을 자행하고 또 세상을 위험에 빠트릴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와르르!

갑작스레 치밀어오르는 화에 유민석이 책상에 놓인 물건들을 흩트렸다.

그러다 문득, 떨어진 자신의 명패에 시선이 갔다.

유민석은 그것을 들었다.

[유니온 전략기획 1팀장, 유 민 석]

"……."

초창기 자신이 다니던 대기업에 신물이나, 새로 입사를 하기 위해 아직 중소기업이었던 유니온에 면접을 보러갔을 때.

당시 이건명 회장은 자신의 면접관이었다.

이건명은 자신의 프로필을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굳이 볼품없는 중소기업에 지원한 이유가 뭔가. 다니던 대기업보다는 낯선 환경이고, 낯선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리고 그런 이건명에게 유민석은 이렇게 답했었다.

'낯선 환경이고,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이 의외의 도움이나 기쁨을 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남자라면 평생의 지기가 될 수도 있고, 여자라면 평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낯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알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제가 알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이건명은 자신을 따로 불러 기대가 크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면접장에서 들었던 자신의 말을 들으며 큰 감명을 받았다는 말도 해주었다.

늘 혼나기만 했던 대기업의 일상과는 달리 유니온과 이건명은 자신을 항상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었다.

그렇기에 유민석은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보다 유니온을 다녔을 때가 더 좋았다.

그곳에서 차진철을 만났고, 그의 누나인 차애리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그렇게 당시 클로즈베타를 준비 중이던 아크스타를 이건명이 자신에게 일부 맡겼고, 유민석은 지금의 이석준 부장과 함께 아크스타를 세계화 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한국 내에 뿌리 깊게 자리한 성신그룹을 제치고 유니온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던 순간을 유민석은 잊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연기고 허상이라고…?'

유민석의 손에는 어느새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다.

어르신은 자신에게 '조셉'이라는 남자의 번호를 전해주었다.

미리 그에겐 연락을 해둘 테니, 좀 진정이 되면 전화를 걸어보라는 최춘택의 말.

하지만 최춘택의 성정을 아는 유민석은 그가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숨겨진 진실을.

자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뚜르르르-.

유민석이 핸드폰을 몇 번 조작하자 통화음이 들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 여보세요.

"…조셉 씨? 전 유민석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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