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5화
제275화
20분이 지나서야 나는 간신히 캡슐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응급의료팀이 다가오더니, 내 상태를 보고는 들 것을 가져왔다.
"허억. 헉. 후우…."
"조심히 일어나십시오.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어이, 들것 좀 가져와."
그런 그들을 나는 제지할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 내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미도는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울먹거렸다.
다른 팀원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히잉. 할아버지 괜찮아요?"
"그래. 괜찮으니 걱정마라. 후우."
나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브라질과의 경기는 나의 압승으로 끝났다.
남은 것은 두 번의 싸움뿐이었고, 사실 끝나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무두르로 변신한 내가 로그아웃하지 않고 날뛰었다는데 있었다.
…망할 무두르 놈.
나는 무두르를 통제할 수 없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무두르는 맵의 이곳저곳을 부수었고, 그런 무두르는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마주한 것처럼 날뛰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광기가 온몸을 휘감았던 감각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다행히 무두르는 오늘 더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까 전처럼 또 한 번 살아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나는 아까 로그아웃하기 직전 보았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제한 시간이 지나 변신이 풀립니다.]
[블러디 오크화는 24시간에 딱 한 번만 가능합니다.]
[다음 변신까지 남은 시간 24:00:00]
[현재 무두르와의 동화율 5%]
[동화율이 올라가면 지속시간 또한 늘어납니다.]
동화율은 아마 추측하건대 무두르로 변신한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증가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 셋을 세면 들자고. 하나, 둘, 셋-!"
그렇게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사방에서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사진을 찍어댔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일단 수건을 하나 빌려서 눈을 가려버렸다.
* * *
1시간 뒤, 유니온 스퀘어에 마련된 치료실.
다행히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저 가벼운 기력소진.
월드 대항전에는 닥터 스톱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의사의 판단으로 경기를 진행하지 못할 정도라면 나는 게임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심 속으로 4강전에 나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와, 난 아까 할아버지가 그때 딱 변신을 하는데-."
"난 진짜 심장이 다 벌렁거리더라니까?"
"크으. 진짜 화끈했었지."
하하하하-! 깔깔깔깔-!
그리고 지금 나는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다.
팔에 꽂힌 링거 수액이 반절 정도 남았다.
정작 아픈 건 난데 왜 이놈들이 앞에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구는 게야.
에잉.
"시끄러워. 이놈들아!"
잠깐의 정적이 일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쫑알쫑알 떠들기 시작했다.
순간 울컥해서 이마에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담배를 피고 싶었는데 차마 피지도 못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네가 참아. 다들 걱정되서 온 거니까."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던 백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옆에는 마석두 또한 함께 있었다.
늙은 곰이랑 젊은 곰 두 마리가 떡 하니 병실을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근데 석두 이 녀석은 왜 온 게야.
그것도 수정이랑 함께.
"쯧. 시끄러워서 쉴 수가 있어야지."
"다들 네가 들것에 실려 갈 때 얼마나 걱정했는데. 누가 옆을 지킬지 가위바위보로 정하길래 정신 사나워서 내가 그냥 다 오라고 그랬다."
이 자식이 지금 자기가 이 상황을 초래했다는 걸 빙 돌려서 말하고 있네.
하여튼 일 벌리는 데는 선수라니까.
망할 놈 같으니라고.
에휴. 내 팔자야.
"석두 넌 어쩐 일이냐. 그것도 수정이랑 같이."
"아, 나요? 얘가 자꾸 경기 보러 가자고 귀찮게 하지 뭡니까. 배고파 죽는 줄 알았소. 형님. 푸흐흐. 여긴 병원 밥 안 줍니까?"
마침 마석두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김수정이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마석두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등을 긁으려고 팔을 뒤로 돌렸는데, 팔뚝이 너무 굵어서 닿지가 않는다.
하여간 곰탱이 같은 놈.
"풉. 미안. 내가 긁어줄게."
김수정은 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으며 등을 긁어주고 있다.
잠깐만.
그런데 수정이가 같이 보러 오자고 했다고?
설마 얘가 석두 놈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잠깐만. 이러면 안 되는데….
둘째인 정현이와 이어주려 했던 내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
이 자식은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수정이가 이러고 다니는 것도 몰라?
이 녀석은 만나면 확 그냥….
드르륵-.
"할아버지-! 가족들 데려왔어요."
마침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나갔었던 미도가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산소가 되어주는 손녀의 존재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아버님!"
"아버지!"
"할아버지!"
소리치며 다가온 것은 첫째인 강현이네였다.
이어서 둘째인 정현이가 들어섰….
이놈의 자식이!
"왜, 왜 그렇게 보세요…? 혹시 화나셨…어요?"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삭히며 최정현을 노려보았다.
녀석의 품에 둘째 손녀인 서희가 들려져 있었기에 그나마 참는 것이었다.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할방!"
최정현의 품에서 내려온 서희가 침대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안아달라며 손을 뻗었다.
역시나 난 헤실헤실거리며 서희를 안았다.
정현이 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서희 때문에 참는 거니까.
"할방. 이제 괜차나?"
"그래. 허허허. 괜찮고말고."
"아푸지마. 할방-."
괜스레 마음이 찡해진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서 서희의 재롱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서희가 결혼하는 것도 보고, 다시 그 손녀를 봐서 난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그런….
"서희야. 할아버지라고 해야지."
난데없이 최정현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여튼 이놈은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게 틀림없다.
"시꺼-! 서희는 할방이란 말이 조타구! 할방! 할방!!"
"…끙."
최서희가 둘째 녀석을 아주 혼쭐을 냈다.
나는 내심 그런 손녀를 응원했다.
옳지! 잘한다. 우리 손녀.
좀 더 혼내라.
저놈은 좀 혼나야 돼.
"할바아아아앙-!"
껄껄! 듣기만 좋구만.
* * *
다시금 시간은 흘러, 병문안 왔던 이들이 모두 돌아갔다.
그 사이 8강전이 모두 치러졌고, 미국과 러시아의 경기는 당연하게도 미국의 승리였다.
그리고 스페인과 아랍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토레즈가 있는 스페인이 이겼다.
독수리 성좌 호루스를 뒷배로 두고 있는 무하마드도 토레즈와 데우칼리온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긴 원체 두 성좌 사이에는 격의 차이란 것이 존재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나는 3등성이고 하나는 1등성에 궁좌의 자리에 있으니까.
그리고 바로 지금.
- 지금부터 4강전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4강전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미국과 스페인.
결승에서 만나야 했던 두 팀이 4강전에서 맞붙어버린 꼴이었다.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두 팀 모두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는데요. 여기서 만나다니 이것도 참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한국이 예상 밖의 선전을 하는 바람에 대진표가 무척이나 꼬여버렸지요. 과연 누가 이길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 전 개인적으로 이번엔 미국이 이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생각에는 나도 동의했다.
토레즈가 궁좌인 데우칼리온과 함께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너무나 강했다.
마이클을 비롯해 선수들 개개인의 수준들이 무척이나 높았고, 그 마이클 또한 궁좌인 안타라스와 함께하지 않던가.
거기다가 얄밉지만 스타피스를 가진 제임스 놈까지.
"…하여간 이래나 저러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구나."
두 팀 중 누가 올라오더라도 정말 쉽지 않은 대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경기가 끝나면 한국과 중국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이젠 권왕이라는 별명을 넘어 뇌신이라 칭해지는 견소룡은 사실 나로서도 감당하기 벅찬 상대였다.
아마 녀석을 상대하려면 내가 가진 힘을 전부 쏟아내야 할 터.
- 경기 시작됐습니다!
"흠."
나는 팔짱을 낀 채 미국와 스페인의 대결을 감상했다.
미국은 바로 팀 내에 에이스 중 한 명인 제임스를 보냈고, 스페인은 토레즈를 보내지 않고 다른 선수의 힘을 빼놓는 전략을 택한 듯 보였다.
하여간 미국의 전략을 짜는 놈이 누군지 영악하기 그지없다.
"뭐, 나라고 해도 저런 전략을 썼을 테지."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으면 그게 바보인 거다.
하여간 코쟁이 놈들은. 쯧.
- 제임스의 속사가 어김없이 펼쳐집니다!
- 순식간에 끝나버렸습니다! 미국의 승리입니다!
- 스페인의 알바레즈 선수는 제임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군요!
띠룩-.
나는 곧바로 TV를 꺼버렸다.
볼 것도 없는 경기다.
이건 무조건 미국의 승리다.
"음."
나는 곧장 왼팔에 꽂힌 링거 줄을 뽑았다.
수액은 이미 거의 다 맞은 상태라서 더 맞을 이유도 없었다.
기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읏차."
그렇게 바늘을 뽑아 자리에서 일어서며 슬리퍼를 신는 순간.
드르륵-.
별안간 병실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섰다.
"엇, 벌써 가십니까? 조금 더 누워있으시지 않구요."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민석이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나무랐다.
"사람이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넌 또 어쩐 일이냐. 너도 시끄럽게 쫑알거리려고?"
그 말에 유민석이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병문안이 꽤 시끌벅적했었던 모양입니다."
"별일 아닌 일로 호들갑들 떤 게지."
"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거 같던데요?"
"뭔 소리야?"
그때 유민석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인터넷 기사들을 여럿 보여주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은 내가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수건에 박혀있는 태극기가 절묘하게 클로즈업되어 마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헌신을 아끼지 않은 백전 용사처럼 찍힌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 기사들은 다 뭐야?"
"아무래도 어르신께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하필이면 수건에 태극기 문양이 박혀있어서 더 그런 것 같더군요.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퓰리처상 후보에 오를 것 같습니다."
"퓰리처는 개뿔."
퓰리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예전에 조셉이 대강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퓰리처상이 뭔지 아십니까?"
"대충."
"그렇군요. 아무튼 커뮤니티의 여론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재벌들이 감동을 받아서 너도나도 유니온으로 전화해 어르신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며 기부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정치권도 분주하더군요. 어르신의 헌신에 감동해 한번 뵙고 싶다는 연락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어떤 병원에서는 평생 건강검진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연락이 오는 곳도 있더군요."
"흥.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호들갑이라니까. 괜히 내 유명세를 이용해먹으려는 놈들일 테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나저나 넌 여기 왜 온 게야? 그딴 시답잖은 얘기를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아, 그게 사실…."
"잠깐만."
나는 손을 들어 유민석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옷장을 열어,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유민석은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담배 있지?"
"예?"
"아, 있어 없어."
그제야 유민석이 내 의중을 깨달았는지, 피식 웃었다.
"가지고 있습니다. 불도 있구요."
"나가자. 담배 말려 죽는 줄 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