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4화
제274화
유니온 스퀘어, 직원 전용 관람석.
경기장에는 꽤 오랫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는 다크 울프보다 본명이 더 유명한 최춘택이 나온 경기.
직원들은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았다.
처음 등장했을 때 보여주었던 강렬함 그대로, 카를로스는 최춘택의 화려한 발차기 향연에 쓰러지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경기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카를로스는 회심의 한 수를 준비했고, 최춘택은 그런 카를로스의 덫에 걸려 무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해설자들의 추측대로 카를로스는 스타피스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직원들이 숙연해진 것은 최춘택이 바위 더미 속에 파묻혔을 때부터였다.
아무도 그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 추측했고, 그것은 손에 땀을 쥔 채 경기를 지켜보던 유민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끝인가.'
이대로 최춘택이 진다면 한국팀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진다.
그만큼 최춘택은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크스타의 간판스타였다.
유민석이 짙은 한숨 소리와 함께 숨을 내뱉을 때였다.
"팀장님?"
다른 직원도 있는 공적인 자리였기에 옆에 있는 차진철은 자신을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유민석은 그런 차진철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노트북 화면을 띄우더니 자신에게 보여주었다.
'얘는 왜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간만에 직원들에게 생긴 휴가였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을 배려해 2층의 직원 전용 관람석을 예매해주었고, 그곳에서 유민석은 1팀의 직원들과 여유롭게 다리를 쭉 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와이프는 출장 중이라 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간만의 휴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녀석도 일 중독이라니까.'
그렇게 일개미 차진철의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순간.
"뭐야? 뭐야?!"
"와아아아-!"
"우와아아아악!"
"미쳤다-!"
"할아버지이이이-!"
방정맞은 직원들의 함성이 대기실을 가득 울렸다.
유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스크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헐?"
갑자기 생명력을 회복한 어르신이 바위 더미에서 일어나더니,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카를로스를 먼지 속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 뭐야. 다시 살아난 거야?"
유저의 사생활을 위해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그래도 이동하는 방향이라던가.
어떤 몬스터를 잡았는지와 어떤 스킬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알 수 있었다.
너무 가까이 붙는 것만 아니라면, 유니온 내에 있는 카메라로 최대 1Km 정도 거리를 두고 캐릭터를 감상할 수도 있었다.
물론, 동굴이라던가 어두운 곳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부활 계열 스킬이라도 배웠던 거야?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유민석이 멍한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
"어, 어어. 왜?"
유민석은 그제야 차진철이 내민 노트북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차진철이 보여준 것은 최춘택이 얻은 스킬에 대한 기록이었다.
[코드 #3142-082721800, 유저 '잭슨'님이 마벨의 히든 스킬 '블러디 오크화(헐크.ver)'을 얻었습니다. (현재 시각 14:38)]
"……."
유민석은 곧장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14:39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미친?"
* * *
[속옷을 제외한 입고 있던 장비를 모두 강제로 벗습니다.]
[해당 게임은 15세 이용가입니다,]
[그 어떤 물리적인 압력으로 인해 강제로 속옷을 벗을 순 없습니다.]
[당신은 죽음으로 인해 블러디 오크 '무두르'에게 몸의 소유권을 빼앗겼습니다.]
온몸의 피가 빠른 속도로 도는 것이 느껴졌다.
우람한 상체와 울긋불긋한 근육.
울컥거리는 혈관.
뛰는 심장 소리와 핏빛의 새빨간 피부는 마치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워어어억-!]
광기 어린 눈을 한 존재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였다.
그리고 또한 무두르이기도 했다.
그래. 팬티만 입은.
"…크륵."
카를로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코와 귀. 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나를 보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의 팔다리는 이미 기괴하게 돌아가 있었다.
아마 얼마지 않아 카를로스는 죽고 말리라.
[…취익.]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무두르가 피식 웃었다.
아래에서 위로 향한 두 개의 거대한 송곳니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뿜어댔다.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강인한 하관의 턱수염과 흰 머리는 검게 변색 되어 있었다.
원래의 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
무엇보다 머리가 엄청 큰 것이 좀….
'무두르. 내 몸을 내놔라.'
그리고 나는 역시 무두르에게 내 몸에 대한 소유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흥. 영감탱이가 말이 많군. 이 몸은 이제 짐의 것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무두르는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거기다가 아까부터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길,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취취취취췩-♬]
투레질을 하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취익거리던 무두르가 엎어진 카를로스의 몸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블러디 오크로 변한 무두르는 그야말로 흉측한 괴물과 같은 형상이었다.
그는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시선으로 카를로스를 보았다.
[취익. 아까보다 몸이 작아졌군. 다시 변신해봐라. 인간.]
"쿨럭."
카를로스는 목울대에서 피가 꿀렁거려 대답하지 못했다.
'뭐냐. 이 괴물은 대체 뭐냐고…!'
이미 시간의 화살은 무두르의 어깨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다행히 대회라서 인공 스타피스를 빼앗길 염려는 없지만,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눈앞의 괴물이 무척이나 무섭고 두려웠다.
[흠.]
한편, 무두르는 아까 전 손가락에 매달린 인간이 거대한 곰으로 변신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타격감이 제법 찰져서 한 번 더 때려보고 싶었는데, 단 한 방에 변신이 풀리는 것이 무척이나 김이 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인간은 팔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무척 재미가 없지 않은가.
[변신을 못 하나? 그럼 쓸모가 없지.]
"……!"
놀란 카를로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그런 카를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투두둑.
"끄아아악-!"
끔찍한 카를로스의 비명.
무두르의 손에는 떼어낸 카를로스의 오른팔이 들려져 있었다.
이어서 왼팔, 왼다리, 그리고 오른 다리를 차례대로 무심하게 떼어내는 무두르였다.
"끄아아! 끄아! 아아악-!"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다.
무두르는 마치 하찮은 벌레의 다리를 떼어내는 것처럼 아무렇지 도 않아 보였다.
'됐다. 그쯤 했으면 됐어! 이제 그만해라. 어이, 무두르!'
나는 계속해서 외쳐보았지만, 무두르는 그저 입꼬리를 올릴 뿐이다.
[흥.]
코웃음을 친 무두르가 말했다.
[그 콧구멍 큰 신이 날 불덩어리 감옥에 처넣었다고.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 이 정도 자유는 괜찮잖아? 췩.]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인 무두르가 몸통과 머리만 남은 카를로스를 씹어먹었다.
아그작 아그작.
비명조차도 없었다.
카를로스는 소리없이 잔인하게 로그아웃되었다.
때마침 경기의 끝을 알리는 메시지도 떴다.
삐이이-!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선수 교체를 하시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뒤편에 작은 포탈이 하나 생성되었다.
선수 교체를 희망한다면 저 포탈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무두르. 저기로 들어가라.'
[싫은데? 푸흐흐흐.]
제기랄.
전혀 통제가 안 된다.
* * *
- 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 최춘택 선수가 붉은 괴물로 변신하더니 카를로스 선수를 잔인하게 찢어 죽였습니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합니다!
- 정말 말도 안 되는 경기입니다. 대체 최춘택 선수의 숨겨진 힘은 어디까지일까요? 또 지금 변신한 스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끝을 알 수 없는 잠재력을 가진 선수입니다!
흥분한 해설자들의 음성에 화답하듯 관객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그만큼 화끈한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붉은 괴물로 변신한 최춘택은 정말이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인했다.
특히 마지막에 머리와 몸통만 남은 카를로스를 먹어치우는 장면은 압권 그 자체.
아마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몇몇 어머니들은 자식의 눈을 가리기 바쁠 정도였다.
다행히 하이라이트로 다시 보여준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아, 진짜 오빠. 왜 이렇게 천천히 걸어? 빨리 좀 와!"
그리고 그때.
뒤늦게 경기장에 들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거 참,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다리가 잘 안 찢어지는 거라니까."
한 쌍의 남녀는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바로 김수정과 마석두였다.
"우리 자리 저기야. 빨리 가자."
"에이, 귀찮게."
"아, 오빠! 쫌! 귀찮다고 하지 말고 빨리!"
김수정이 마석두의 등을 밀었다.
워낙 덩치가 크고 근육이 커서 그런지 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수정은 안간힘을 쓰며 마석두를 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어휴, 곰도 이거 보단 가볍겠다.'
김수정이 마석두를 힐끔거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석두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오로지 그녀가 마석두에게 놀러 가자고 졸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감이 있었다.
마석두의 마음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쌍방이 아닌 일방통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남자는 듬직한 맛이 있어야 한다.
- 말씀드리는 순간 브라질의 다음 선수가 나왔습니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엇, 시작한다."
"……."
김수정은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고, 마석두는 입을 꾹 다문 채 잘 되지도 않는 팔짱을 억지로 꼈다.
김수정은 그런 마석두의 모습조차도 귀여웠다.
진짜 곰이랑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뭔가 뚱한 표정이 굉장히 러블리하달까.
'아, 빨리 끝나고 밥 먹고 싶다.'
하지만 그런 김수정의 마음도 모르는 마석두는 밥 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 최춘택 선수가 두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 이어지는 내려찍기!
- 아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정말 가공할 힘입니다!!
이어지는 것은 또 한 번의 충격.
김수정과 마석두는 어안이 벙벙한 채 화면 속에서 날뛰는 붉은 괴물을 보았다.
"뭐, 뭐야. 저게 아버님이라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니, 저 형님은 왜 저러고 계신 거지. 어디 아프신가? 야. 수정아. 형님 건강 괜찮으시지?"
"다, 당연하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마석두는 처음부터 다크 울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뭐, 사실 알고 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형님이 정체를 밝혀버리는 바람에 떠벌릴 겨를도 없었거니와 마석두는 원체 입이 무거운 사람이기도 했다.
마석두는 그래도 오랜만에 형님을 만나러 온다는 기분으로 경기장에 왔는데, 지금 보고 있는 형님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와 같은 모양새였다.
- 워어어어억-!
마치 킹콩처럼 가슴을 두들기며 승리의 세레머니를 하는 최춘택은 무척이나 멋졌다.
마석두는 괜스레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저토록 위풍당당한 모습이라니.
참고로 마석두는 킹콩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열 번도 넘게 돌려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빠. 가슴에 손 올리고 뭐해?"
"어? 아, 큼. 아무것도 아니야."
마석두가 올렸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