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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66화 (26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66화

제266화

상왕?

내가 아는 그 상왕이 맞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도 모르게 눈이 뜨여졌다.

"실은 상왕께서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렌은 목이 타는지 홍차를 연신 홀짝였다.

저렇게 목이 탈 정도라면 어쩌면 상왕이 부탁하는 것은 엄청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일이 작진 않을 것 같군.

"알았네. 상왕을 만나보지. 대신 시간을 좀 줄 수 있겠나? 이곳의 시간으로 2주는 걸릴 것 같네만."

"물론입니다.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더 감사하지."

나와 아렌은 서로를 보며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는 별것 아니었다.

에이단이 사라지고 난 뒤 달라진 포트렌의 정세와 요즘 포트렌에서 유행하는 것들.

그리고 불사의 인간들 사이에 밝혀진 다크울프의 정체가 나라는 걸 알게 된 아렌이 호탕하게 웃는 것과 헬레나의 안부를 묻는 자질구레한 말들이 이어졌다.

"다 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손을 좀 보았습니다."

"음."

그리고 손을 본 망토를 알프레드가 건네주자, 나는 그것의 정보를 살폈다.

과연 그의 마도 공학 개조는 훌륭했다.

후드를 쓰기만 하면 바로 깜깜한 밤이 찾아온 것처럼 다른 사람은 내 얼굴을 인식도 할 수 없었다.

"내친김에 투명화도 손을 좀 보았습니다. 원하신다면 단체 투명화도 가능합니다."

"오, 고맙네. 허허.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걸."

"좋아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알프레드가 구렁이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이 양반은 정체가 뭔지 모르겠군.

나랑 연배도 비슷해 보이는데.

"이만 가보겠네."

"조심히 가십시오. 레슬리 공에게는 제가 연락을 해놓겠습니다. 돌아가셔서 바로 찾으시면 될 겁니다."

"알았네."

"건투를 빕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로 영주의 권한으로 귀환을 사용했다.

주변이 일그러지며 흩어지더니, 잠깐 사이에 나는 다시 메테우스의 집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후우. 그럼 경기가 어떻게 됐나 한 번 보러 가볼까?"

나는 곧장 후드를 뒤집어썼다.

내친김에 투명화도 쓰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헬레나는 눈치채지 못했고, 손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러고 보니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진 게 딸과 아버지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말은 해야겠는데.

일단은 대회가 다 끝나고 생각해봐야겠다.

곧장 바깥으로 나온 나는 아까 유저들이 들락거리던 주점으로 향했다.

그곳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하긴 경기장도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없으니, 다들 이리로 모이는 건 당연했다.

그들 앞에 놓인 치킨과 맥주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수정구슬은 허공을 비추며 치열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뭐 드시겠소."

"소주."

"…소주? 그게 뭐요?"

아, 깜빡했다.

이곳 세상엔 소주가 없다.

빌어먹을.

"맥주로 주게."

"기다리쇼."

주인장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더니, 맥주를 따라서 내 앞에 올려주었다.

계산은 선금으로 치렀다.

주변에선 내가 후드를 쓰고 있고 얼굴도 안 보여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했지만, 다행히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보진 못했다.

- 아아! 견소룡 선수의 뇌룡과 토레즈의 수룡이 맞붙습니다! 그야말로 용들의 격돌입니다! 과연 결승전다운 모습입니다! 곧 이 싸움의 승자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주점에 자리한 유저들이 소리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결승전이었나."

아무래도 이번 골렘 공성전은 중국과 스페인.

둘 중 하나가 우승을 거머쥘 모양이다.

나는 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칙. 치익.

누가 이기는지는 사실 관심 없었다.

그래도 조금 마음 가는 쪽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견소룡이다.

"지지 마라. 후우우-."

짙은 담배연기가 허공에 나부꼈다.

* * *

메테우스에 위치한 연무장.

"이야아압!"

미도가 거머쥔 피의 도살자를 빠른 속도로 휘두르며 눈앞에 있는 백성찬을 공격했다.

백성찬은 미도의 검을 받아내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러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야! 너 자꾸 피하기만 할래?"

"정말 공격해요?"

"그래! 공격해!"

빼액- 소리치는 미도를 보며 그제야 백성찬이 눈빛을 번들거렸다.

갑자기 바뀐 백성찬의 눈빛을 본 미도가 당황한 낯빛을 흘렸다.

"……!"

주춤한 미도가 재빠르게 백성찬의 검을 튕겨냈다.

까아앙!

빠른 속도로 검을 주고받던 미도는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찬의 검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느낌이다.

"이씨…!"

미도가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를 악물며 덤벼들었다.

백성찬이 재밌다는 듯 이죽거리며 계속해서 미도와 검을 주고받았다.

까앙! 까앙! 깡!

스킬은 쓰지 않았다.

오로지 검술이었다.

그것이 연무장 한 편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스승 백무열의 가르침.

기초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끅!"

하지만 역시 승리는 미도의 편이 아니었다.

검을 가볍게 튕겨내던 미도가 백성찬의 재빠른 검을 보지 못하고 팔 한쪽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백성찬이 미도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항복하라는 뜻이었다.

"흐으. 내가 졌어."

미도가 땀을 슥 닦으며 숨을 내쉬었다.

백성찬은 미도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백무열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아주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군.'

물론, 타고난 실력은 백성찬이 한 수, 아니 세수는 위였지만, 그래도 백성찬이 호랑이라면 미도는 늑대 정도 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둘 다 아주 흡족스러운 실력을 가진 건 사실이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구만.'

바로 그때.

뒤늦게 도착해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헐. 쟤가 무열이 할아버지 손자라구요?"

"스킬 없이도 엄청 잘 싸우는데?"

"검도 대회 1등 했다잖아."

"와, 레벨만 조금 높고 스킬만 좋았으면 국가대표감인데 진짜 아쉽다."

백무열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시끄럽다. 이놈들아. 성찬이는 그런 대회에 안 나간다."

"예? 왜요? 저런 실력을 그냥 썩힌다고요?"

"원래 진정한 강자는 저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야. 그리고 저놈이 제대로 꽃을 피우면 그딴 대회는 성찬이의 발아래 모두 무릎 꿇을 거다."

"에이. 할아버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니에요?"

임사라가 고개를 홱 돌린 백무열과 눈을 마주치자, 모른 척 고개를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마침 연무장의 입구로 들어오는 무리가 있었다.

"음? 누구지?"

"뭐야."

"흐음?"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백무열은 익숙한 듯 그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있는 팀원들을 보았다.

"게으른 네놈들 상대는 저 녀석들이다. 빨랑빨랑 일어나! 지는 놈은 머리를 몽땅 밀어버릴 테다."

백무열의 손에는 어느새 들린 마력이발기가 섬뜩하게 울고 있었다.

위이이잉-!

* * *

그 시각.

나는 레슬리를 만나 아렌의 부탁으로 왔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훈련에 필요하다구요?"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지요. 저항군은 몇이나 필요합니까?"

"열이면 될 것 같습니다. 레슬리 공도 포함해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레슬리는 저항군 몇을 추리더니 열 명의 정예를 뽑았다.

그리고 그 열 명에게 내가 부탁했던 총과 단검을 들게 만들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나는 그들을 이끌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가시죠."

그렇게 빠르게 달려 근방의 훈련장에 도착했다.

이곳과 저항군의 아지트는 거리가 그렇게 멀진 않았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

그런데 그곳엔 생각보다 많은 인원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내가 아는 이들.

미도는 백성찬과 필사적으로 검술 대련을 펼치고 있었고, 다른 팀원들은 각각 백무열과 친하게 지내던 묵찌빠 형제와 대머리들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째인 최정현이 그곳에 끼여 있었다.

머리 한 가운데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저놈은 대체 여기서 뭐하는 게야.

순간 욱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일단은 이유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왔냐."

백무열에게 다가가자,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이곳에 인사를 해왔다.

임창용과 임사라를 비롯해 김현우, 은정혁, 박장소, 김철, 김해일과 안승현까지 모두 이곳에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옆에 있는 레슬리에게로 향했다.

난데없는 NPC의 등장에 다들 놀라는 눈치.

하긴 레슬리도 은근 무섭게 생기긴 했다.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임창용."

"네."

"박장소, 김철."

"네."

"네."

"너희 셋은 특수부대 출신이다. 그런 만큼 내일 있을 PVP에선 그 장점을 살리는 게 좋지 않겠냐?"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임창용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저흰 이곳 세상에서 마탄을 주로 씁니다만…."

"그걸 누가 몰라? 그래도 근접 격투술 스킬은 갖고 있을 것 아니야."

"예. 있지요. 그렇지만 여기 세상에선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저희가 찌르고 베어도 단단한 탱커의 갑옷을 뚫을 수 없는 것처럼요."

뭐,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레슬리 공."

"말하시오."

"이들에게 마스체니식 근접 격투술을 가르쳐 주십쇼."

"……!"

레슬리의 하나 남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휘둥그레졌다.

이 양반 눈이 이 정도로 컸었나.

"…내가 그걸 쓸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데."

레슬리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당연히 알 수 있다.

왜냐면 아까 레슬리를 만나자마자 통찰을 썼거든.

나는 눈앞에 띄워진 레슬리의 상태창 밑에 그가 가진 스킬들을 주목했다.

[마스체니식 근접 격투술]

[총사령관의 헌신적인 가르침]

[나선의 마탄]

[백발백중 총검술]

마스체니식 근접 격투술은 쉽게 말하면 단검에 마도 공학의 정수가 담긴 에테르 블레이드를 만들어내 적들을 찢어발기는 무시무시한 격투술이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의 헌신적인 가르침은 말 그대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대상이 가진 스킬의 숙련도를 빠른 속도로 올려줄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즉, 다시 말해 가르치면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의미다.

원래는 총검술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려고 했지만, 그 호랑말코 같은 제임스 놈이 있는 이상 총으로 싸우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애초에 우리가 노리는 건 우승이니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

레슬리가 하나 남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엔 말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슬리였다.

"하나만 묻겠소."

"말씀하시지요."

"혹시 그대는 파르타 공국에서 보낸 스파이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

지금 내가 누군가의 상태창과 스킬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NPC인 레슬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 사실이 밝혀져 퍼져나간다면 어쩌면 나는 진짜로 유니온에서 제재가 들어올지도 몰랐다.

이건 최대한 비밀로 만드는 게 좋을 것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우리 둘 사이에 치열한 눈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레슬리의 한쪽 눈이 들썩이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호랑이처럼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

"……."

나와 레슬리가 동시에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레슬리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에테르 블레이드를 입혀 날카롭게 만들었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을 꺼냈다.

우리 두 사람의 신형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츠카칵!

나는 그의 에테르 블레이드를 포크 숟가락으로 막아냈고, 두 다리엔 어느새 태양을 피워냈다.

"……!"

조금 놀랐는지 레슬리의 한쪽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레슬리는 나이에 맞지 않는 노익장으로 엄청난 속도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왼손으로 뻗어오는 오른손을 쳐내고, 빠르게 휘돌아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콱!

"끙."

레슬리는 지지 않고, 이를 악물고는 내 멱살을 잡으며 단검을 휘두르는 척하며 중지의 마디를 세워 명치를 날카롭게 찍었다.

퍽!

"큭."

우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동시에 공방을 주고받았다.

팟. 팟팟. 팟.

레슬리의 단검과 포크 숟가락이 목표를 찾지 못한 채 주변에서 춤을 추며 움직였고, 서로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수준 높은 근접 격투술을 주고받았다.

한수 한수가 서로의 치명상을 노리는 것이었다.

해오름을 쓰고 있음에도 레슬리는 전혀 밀릴 기세가 없었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그에겐 발차기를 노릴만한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자다.

이런 강자는 처음이다.

그러다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퍽! 콱!

레슬리는 손날치기로 내 목을 쳤고,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나는 목 주변을 쓰다듬었고, 레슬리는 턱을 매만졌다.

"…흐."

"…하."

나와 레슬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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