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8화
제248화
"하하하하-!"
갑작스러운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그 웃음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강자들이 모두 모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런 여유를 부리는 웃음의 주인공은 그럴 수 있는 강자였다.
"아, 진짜 재밌네. 딸꾹!"
스페인의 토레즈가 수룡의 머리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등에 짊어진 항아리에 든 술을 꿀꺽거리며 마시더니, 재밌다는 듯 이죽거리며 입 근처에 남은 술을 닦았다.
그의 얼굴이 붉은 것이 취기가 꽤 오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궁좌의 능력을 계승한 자인가.
아까 봤던 경기 영상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는 12궁좌 중 '수병'의 궁좌.
데우칼리온의 성애자(星愛者)인 듯 보였다.
지금 그가 타고 있는 수룡이 바로 그 증거다.
데우칼리온이 들고 다니는 물병에는 '블라쉬'라는 수룡이 살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데우칼리온이나 저놈이나 술 좋아하는 건 똑같나 보구만.
데우칼리온의 별명은 '영혼의 술반자'다.
아마 저 청년 또한 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니, 저 별명을 보고 혹해서 골랐겠지.
어쨌든 끼리끼리 만난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미간을 찌푸립니다.]
프로메테우스와 데우칼리온은 악연이었다.
그것도 피로 이어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두 존재의 시선이 부딪히며 허공에 작은 스파크를 만들어냈다.
둘 사이에 어떤 악연이 있는지는 언젠가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경기가 먼저다.
"우하하하! 다크울프의 정체가 노인이라니! 나는 지금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핵주먹!"
쿠르릉-!
난데없는 라인하르트의 핵주먹이 피라미드의 땅에 지진을 일으키며 모두의 중심을 흩트렸다.
그 모습을 본 데미안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저 무식한 놈을 누가 말려."
"못 말린다. 그러니까 우린 우리의 할 일을 한다."
마이클이 거머쥔 쌍검에 스콜피온 소드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모래를 밟아 허공을 달렸다.
미국 팀도 그의 뒤를 이어 달렸다.
라인하르트가 일으킨 지진은 마이클이 허공에 만들어낸 모래땅으로 가뿐히 무마되었다.
그들은 가운데 위치한 한국 팀을 노리고 있었다.
"저 바보 놈이 또…. 쯧."
그리고 나는 라인하르트가 땅을 내려치는 순간. 다리에 바람을 운용해 허공에 살짝 떠올라 있었다.
문제는 한국 팀이다.
그들은 자신처럼 허공에 떠오를 수 없었기에 지진의 여파를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었다.
"아악. 토할 거 같애!"
"지진을 일으키면 어쩌라고!"
"누가 어떻게 좀 해봐!"
선발전에서는 활약도 하고 어땠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세계적인 무대로 나오니 그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여기서 탈출시키고 봐야겠군.
"펜릴."
그 말과 동시에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흑야의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등 뒤로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늑대의 형상이 울부짖었다.
아우우우-!
넓게 퍼져나간 내 그림자는 이내 흑야가 되어, 하늘과 땅을 물들였다.
까맣게 내리는 눈 사이로 수십의 흑야랑들이 크르릉거리며 땅에서 올라왔다.
주변은 마치 밤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의 힘에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단연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존재가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저들을 지켜다오. 데리고 가서 흩어지면 된다."
내가 말하는 '저들'이란 당연히 가운데서 얼타고 있는 한국 팀이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펜릴도 주변을 슥 둘러보고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미 주변의 흑야랑들과 각국 대표팀 사이에 싸움이 번지고 있었다.
"그러지."
펜릴이 까딱 고개를 끄덕이자, 전장을 가득 메운 흑야랑 중 몇 마리가 한국 선수들을 두세 명씩 입에 물고는 흩어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꺅-!"
"갑자기 뭐야!"
"다들 침착해. 아군이야!"
주장 임창용의 외침에 한국 선수들이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딜 가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는 법이다.
"아악! 물지 마. 이 자식아!"
"에잇. 죽어라! 똥개!"
서로 붙어 있다가 같이 물려버린 김동현과 한상혁이 스킬로 흑야랑을 공격하고 있었다.
순간 아까 밖에서 자신과 교체를 했던 안승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두 사람만 없었다면 첫 경기에서 그리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
듣자하니 뒷배로 게임 연맹을 두고 날뛰는 놈들인데, 다들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유민석은 곧장 전화를 해 그 두 사람의 대표팀 자격을 박탈하기로 했다.
"펜릴. 저 두 놈은 그냥 먹어 치워라. 쓸모도 없는 놈들이니."
"그러지."
펜릴은 망설이지 않고, 흑야랑에게 김동현과 한상혁을 꿀꺽 집어삼켜 버릴 것을 명했다.
"으아아악!"
"이런 썅!"
그렇게 김동현과 한상혁이 쥐도 새도 모르게 로그아웃되었다.
아마 저 둘은 캡슐을 나오자마자 무대에서 쫓겨나게 되겠지.
그리고 그 두 사람과 연관이 있는 감독도 마찬가지다.
…몹쓸 놈들 같으니라고.
제일 큰 이유는 역시 손녀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이지만.
"큼, 어쨌든 이제 방해꾼도 없으니…."
내 양손엔 어느새 꺼낸 그림자 단검과 포크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주변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그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흡사 지옥도와 비슷했다.
"가자. 펜릴."
이제 최강이 누군지 가릴 차례다.
***
- 놀랍습니다! 최춘택 선수의 힘에 다른 나라 선수들이 압도되었습니다!
- 더욱 대단한 건 저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 아, 말씀드리는 순간 최춘택 선수를 상징하는 검은 늑대들이 한국 선수들을 물고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 각 나라의 선수들과 수십의 늑대들이 맞붙었습니다! 그야말로 치열한 혈투입니다!
- 정말로 무서운 선수입니다. 그림자 늑대들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나고 있어요! 최춘택 선수가 난전에 뛰어듭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요!
경기장 내에 있는 한국 관객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소리쳤다.
어쩌면 당연했다.
가면을 벗자마자 다크울프에 대한 상세한 프로필이 해설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졌고, 칠순을 앞둔 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기장은 탄성과 감탄으로 인한 환호 소리만이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최춘택의 가족들은….
"아버님. 파이티이이잉-!"
"할아버지. 다 박살 내버려요!!"
김미경과 최정도가 스크린을 보며 우렁찬 외침을 쏟아냈다.
그들은 처음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커뮤니티는 물론, 세계적으로 찬사를 쏟아내는 '다크울프'가 바로 자신들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니.
더욱이 주변에서 응원하기 시작하는 한국 관객들을 보며 두 사람은 더욱 흥이 나는 것을 느꼈다.
미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뭐야. 넌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최강현은 당연히 이 사실을 다른 가족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가장 먼저 전화를 한 것은 막내인 최서현이었다.
최강현은 그녀에게 아버지가 월드 대항전 경기에 나와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으니 당장 TV를 틀라고 말했다.
직접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이따가 경기가 끝나고 집에서 보자고 하고는 끊었다.
"이 미친놈아!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 아니, 아버지가 말하면 다리몽둥이 분질러 버린다고 했다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형도 아버지 성격 알잖아. 저번에 날아차기 하시는 거 못 봤어?
"아니, 그때 좀 많이 정정하시구나 싶었는데, 이 정도이신 줄은 몰랐지. 후우. 그때 아크스타 하겠다고 캡슐을 사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지금 전화하고 있는 것은 둘째인 최정현.
한데, 그는 이미 아버지가 다크울프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고까지 했다.
조카인 서희는 오늘 크리스마스라 유치원도 안 가고 있었는데, 마침 같이 보고 있었다고 한다.
"서희는 반응이 어때?"
- TV에 할아버지 나온다고 신났지 뭐.
"하아. 일단 이따가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라. 서현이도 오기로 했어."
- 그래. 설마하니 아버지가 월드 대항전에 나오실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는데. 가면까지 벗으실 줄이야. 일단 축하해 드려야지. 알겠어. 이따가 보자. 형.
"그래."
그것을 마지막으로 최강현은 둘째와의 전화를 마쳤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금 국가 대표로 저 쟁쟁한 선수들과 싸우고 있다니.
옛날에 꽤 힘이 셌었다는 이야긴 어머니께 얼핏 듣긴 했지만, 저 정도이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아버지의 데뷔는 충격적이었고, 온 가족을 호출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 대단합니다! 최춘택 선수 대단합니다!
- 그야말로 신들린 컨트롤입니다! 보십시오. 마치 고도로 숙련된 암살자를 보는 듯한 단검술입니다!
- 귀신같은 발차기는 또 어떻습니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앗, 말씀드리는 순간 중국의 선수들이 참전합니다! 상황은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힘내세요."
고개를 든 최강현의 눈에 비친 것은 어마어마한 무위를 선보이며 적들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건 세상에서 제일 듬직한 뒷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
사람의 눈에 미래가 보인다면 어떨 것 같은가.
그리고 그 미래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미래였다면.
그래서 싸우지 못하고 피하며 여태까지 도망쳐 왔는데, 시간이 흘러 이제 그 미래를 감당할 역량이 생겼다면.
그렇다면 어떨 것 같은가.
스칵-!
바로 지금처럼 날뛰고 있지 않을까.
"까악!"
휘몰아치는 거대한 토네이도에 날개가 찢긴 이탈리아의 파비앙.
그는 까마귀의 능력을 가진 스타 프루츠 능력자였지만, 방금 전 내가 일으킨 태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추락하였다.
나는 바람처럼 움직여 파비앙에게 다가갔다.
내게 미래를 보여주는 '혜안'의 눈은 반격하는 파비앙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하여 알려주었다.
내 손은 그저 거들 뿐이다.
파파파파팟!
바람처럼 움직인 포크 숟가락이 그의 깃털을 모조리 뜯어버리며 목, 명치, 허벅지와 각종 급소를 찔렀다.
휘날리는 검은 깃털이 파비앙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말도 안…!"
[이탈리아 팀이 탈락하였습니다.]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음."
그리고 깃발을 줍자마자 보인 것은 이곳을 향해 날아드는 10여 개의 화살 세례.
당연히 그것은 미래였고, 나는 재빨리 주운 뒤 다가오는 미래를 맞이하며 재빠른 동작으로 모든 화살을 피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달려오는 팀을 보았다.
"우크라이나 처자들이로구만."
모두 미녀들만 모여 있었기에 내게도 인상적인 팀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이끄는 구미호를 닮아 있는 여인.
여우의 능력을 지닌 다리야라는 처자.
그리고 바로 옆에는 또 익숙한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카멜레온의 능력을 가진 멕시코의 스타 프루츠 능력자.
루이스라는 청년.
"다리야. 정말 데이트해 주는 건가?"
"글쎄. 네가 저 사람을 치는 걸 도와주면 한번 생각해볼게."
"정말 여우같은 여자라니까."
"그걸 이제 알았어?"
초감각으로 올라간 청력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암묵적인 동맹을 맺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내달리며 춤을 추었다.
되려나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는 수밖에.
"비천기상무."
팟. 팟팟. 팟.
두 다리에 깃든 바람에 태양이 곁들여졌다.
바람이 불을 살리고 불이 바람을 살렸다.
두 가지의 힘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새로운 힘을 만들어냈고,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천기상무의 새로운 경지를 찾았습니다.]
[태양과 바람이 만나 태양풍(太陽風)의 묘리를 깨달았습니다.]
['해오름'이 새로운 경지에 올라 스킬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해오름'의 횟수 제한이 사라집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꺼지지 않는 태양을 노래할 것입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면서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가히 만족스러웠다.
"해오름과 칼바람."
후우우웅.
공간을 집어삼키는 듯한 뒤후리기에 이은 불타는 반월형의 칼날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대한 그것은 이내 수십 개로 분열되더니, 눈앞의 적들에게로 쇄도했다.
그 모습이 마치 폭룡이 날개를 펼치며 재림하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궁!
어마어마한 연쇄 폭격이 전방을 초토화시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