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7화
제247화
러시아의 잔다르크라 불리는 레이나가 소리쳤다.
"다들 엎드려!"
가장 앞서 달리던 그녀의 말과 동시에 환한 빛이 터지더니, 어마어마한 열기의 폭풍이 러시아 팀에게로 쏟아졌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이 떠버릴 정도라 원체 몸이 가볍고 장비도 가벼운 레이나는 그만 폭발에 날아가 버렸다.
"꺄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
덥석.
허공에 떠버린 그녀의 손을 잡은 두툼한 손이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육탄 전차라고 불리는 레오니드의 손이었다.
"손 한번 잡기 더럽게 어려운 여자네."
퉁명스러운 말투의 레오니드가 치아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는 이렇게라도 레이나의 손을 잡아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뻤다.
저번에 레이나에게 망신 아닌 망신을 좀 당하긴 했지만, 그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판금 갑옷을 두들겼다.
"후후. 고마우면 날 한번 안아주면 된다!"
"뭐라는 거야. 이 변태가!"
위협하듯 낫을 휘두른 레이나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가볍게 착지했다.
다행히 러시아의 선수들은 무사했다.
모두 자신보다는 무거운 중갑이나 판금 계열의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초토화됐네."
그녀의 눈앞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방금 있었던 폭발이 얼마만 한 위력을 가졌는지 짐작케 할 수 있는 크기였다.
그녀는 피라미드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다크울프."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곳엔 익숙한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틀림없이 그였다.
레이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의 시선을 느끼며 가슴이 뛰었다.
"안 나온다더니…!"
레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흑색의 낫을 들었다.
아무리 팬이라도 이것은 국가의 명예가 걸린 경기.
사실 그걸 다 떠나 다크울프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감히 자신을 걷어찬 못된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워어어어!"
폭발의 잔재 속에서 붉은 타우루스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뜨거운 화염의 도끼와 화염으로 이루어진 소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최전방에 서서 러시아 선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뚫고 갑니다! 다들 전투 준비하세요!"
***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일본 팀이 탈락하였습니다.]
아랍, 아르헨티나, 네덜란드에 이어 네 번째로 탈락한 나라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그 일본을 처참하게 몰락시킨 장본인.
견소룡은 가볍게 주먹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 번개가 살며시 어려 있었다.
"대인."
견소룡이 몸을 돌려 자신을 '대인'이라 칭하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주양천'.
당랑권의 고수이자 중국의 주장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견소룡은 그에게 주장 자리를 양보했었다.
"주양천 대인."
견소룡은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주양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인의 영춘권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듯하군요. 일본의 사무라이 검술도 우리 중국의 무술보단 못한 듯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대인의 당랑권도 저 못지않습니다."
"하하. 겸손도 과하면 독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대인이라 추켜세우며 서로의 실력을 칭찬했다.
견소룡은 아까 전 '사무라이'라 불리는 근접 딜러 중심의 일본 팀을 무수한 푸른 번개를 흩뿌리며 격파했는데, 그것은 일본 팀에 스타 프루츠 능력자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나저나….'
견소룡은 아까 폭발이 일었던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그에게도 익숙한 폭발이었다.
'형님. 드디어 오신 겁니까.'
거대한 피라미드의 계단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본 견소룡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곳에는 강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당장에 하늘을 보더라도 미국 팀의 모래 구름이 피라미드로 향했고,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멕시코 또한 그곳으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들.
그중엔 8인의 초신성의 멤버들 또한 있었다.
콰오오오-!
괴성이 하늘을 뒤덮은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기다란 그림자가 땅거미를 그리더니, 주양천을 포함한 중국 팀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견소룡도 살며시 뒤로 몸을 숨기며 하늘을 보았다.
그곳엔 온통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수룡이 강력한 기세를 내뿜으며 포효하고 있었다.
수룡이 또 한 번 울었다.
콰오오오-!
'토레즈인가.'
스페인의 토레즈.
원체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오직 월드 대항전에서만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알려진 신비의 인물이었다.
그만큼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고, 아크스타 내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진만 간간히 커뮤니티에 올라오곤 했다.
그는 언제나 지금처럼 수룡을 타고 세상을 여행하는 방랑자였다.
'재밌군. 붙을 사람이 많겠어.'
마이클이 모래의 힘을 다룬다면 토레즈는 물의 힘을 다스리는 스타 프루츠 능력자였다.
그는 마이클의 유일한 호적수였고, 그렇게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자였다.
언젠가 한번 그와 붙고 싶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았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빨리 싸우자고 재촉합니다!]
레이트라도 그걸 원하는 듯하고.
"대인."
견소룡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양천의 손에는 어느새 세 개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아. 깜박했군요. 감사합니다."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걸로 우리 중국은 총 5점인가.'
그 깃발들은 각각 아랍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네덜란드의 깃발이었다.
세 팀은 각각 8인의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능력자들이 한 명씩 들어가 있는 팀이었는데, 아랍과 아르헨티나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네덜란드가 싸움에 휘말리는 바람에 셋 다 공멸하고 말았다.
그래서 중국은 그 세 팀의 깃발을 취하려고 했는데, 그만 일본 팀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뭐, 덕분에 일본 팀의 깃발도 얻었지만.
"이대로 그냥 시간을 끌까요?"
견소룡이 중국 선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대로 도망 다니면서 시간만 끈다면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쉽게 상위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견소룡은 중국을 대표하는 선수였기에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우리 중화 인민은 이제 비겁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중국 무술의 위대함을 알릴 때가 되었군요."
이건 그들이 원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우린 이제 사파나 마교가 아니니까요."
무협지를 좀 많이 읽은 친구들이긴 하지만.
"우린 협객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다 죽죠."
나쁘지 않았다.
치사한 방법으로 싸웠던 작년의 중국은 전 세계적으로 사파나 마교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는 꽤 괜찮은 친구들이 왔다는 생각에 견소룡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곧장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올해의 우리는 정파입니다. 갑시다. 싸우러."
***
"오우. 스트라이크로군."
나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계단 아래에 솔라가 만들어낸 정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위력이 엄청 강하다.
어쩌면 아까 보았던 '낮'에는 더 강해진다는 메시지 때문일지도.
"…낮인가."
지금은 그야말로 해가 쨍쨍한 '낮'이었으니 아주 없는 가능성은 아니었다.
어쨌든 밑에서는 솔라가 폭염의 군세로 계단 아래의 적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저곳은 당분간 걱정 안 해도 되겠고.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익숙한 시선이 그곳에서 느껴졌다.
프로메테우스였다.
과연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낼 것인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이 못생긴 오크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에잉?"
[취익. 어이 영감. 오랜만인데 이 콧구멍만 큰 신이…. 어윽! 악! 야!! 아프다!! 악!!]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못생긴 오크를 때리는 중입니다.]
"……."
설마하니 오자마자 쌈박질을 할 줄이야.
"에휴.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렇게 약 30초가 흐르자, 들려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밖에 없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오랜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 반갑다. 근데 무두르는?"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무두르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못생긴 오크."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기절시켜서 밧줄로 묶어뒀다고 말합니다.]
"…그렇구만."
무두르 놈은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었는데,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프로메테우스한테 두들겨 맞던 거 같던데. 쯧쯧.
"어쨌든 잘 왔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게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잔소리는 이따가 하자고 말합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흐음."
사실 불길함은 나도 감지하고 있었다.
예민한 초감각이 아까부터 이곳으로 오는 이들을 다수 감지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한국 팀을 향해 말했다.
"사방이 적이다. 다들 긴장하거라."
그 말에 한국 선수들의 눈빛이 변하더니 제법 날카로워졌다.
임창용은 선수들을 이끌어 원진을 만들더니 단단한 수비 형태를 취했다.
나는 중앙으로 걸어가 그들의 수비진을 점검했다.
…과연 이 정도면 쉽게 당하진 않겠군. 역시 주장이라 이건가.
이 정도면 내가 다른 놈들과 싸울 때 충분히 버텨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임창용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번엔 김현우와 은정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손녀가 털끝 하나 다친다면 경기가 끝나고 너희 둘 엉덩이는 남아나질 않을 게야."
"넵! 알겠습니다!"
"꼭! 지키겠습니다!"
차렷 자세를 취하며 대답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두어 번 어깨를 두들겼다.
두 사람은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이 꽤 귀여운 맛이 있었다.
생각보다 내 정체가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 제일 먼저 도착한 이들이 뒤편에 보였다.
그들은 바로 첫 시합에서 1등을 한 미국 팀.
아까 영상에서 본 마이클과 데미안을 필두로 한 총 열 명의 선수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멈추었다.
"뭐야. 다크 울프는…."
데미안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미국 팀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낸 내 모습에 입을 쩍 벌리면서.
그리고 이어서 계단에서 올라온 한 사람.
그녀는 레이나였다.
"다크울프 이리 나와-!"
새침데기 같은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다시 한번 이곳에 정적이 일었다.
그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찾기 시작했다.
"어딨어. 어딨지? 어딨…."
그 모습이 마치 도토리를 찾는 다람쥐 같다.
이윽고,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
"……."
세상에 저런 멍청한 표정이 있을까.
레이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녀의 손이 날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덜덜 떨었다.
"너…. 너…. 아니, 당신…. 아니, 할…. 아니, 이게 대체…?"
나는 무시하며 그냥 뒤돌았다.
이어서 라인하르트가 속한 독일 팀이 도착했고, 여인들만 있는 우크라이나 팀이 도착했다.
멕시코,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토레즈가 도착했다.
그가 올라탄 수룡의 괴성이 전장을 푸르게 물들였다.
나는 뒷짐을 진 채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반갑네. 젊은이들."
[남은 시간: 09:58]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10분.
[사도 스킬, '혜안'을 사용합니다.]
[10분간 적들의 공격 경로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이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손녀를 지켜야 한다.
"내가 바로 다크울프일세."
그곳에 내가 서 있었다.
주변엔 온통 나 빼고 다 젊은이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