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6화
제246화
찌르르-.
달빛을 닮은 풀벌레 소리가 나지막이 울었다.
찬란한 봄의 햇살처럼 휘날리는 벚꽃과 만개한 매화 잎들이 떨어져 땅과 들판을 이루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그런 봄의 정취를 노래했고, 그런 이곳은 무릉도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쿠우웅!
갑자기 흔들리는 땅.
난데없는 지진에 벚꽃 잎과 매화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허공을 수놓았다.
바람은 그런 꽃잎들을 감싸 안고 하늘을 날았고, 저 먼 들판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두 존재 사이로 떨어져 나지막이 내려앉았다.
"취이익. 재밌구나. 재밌어!"
"나와 싸우는 것은 무척이나 재밌다! 취이익!"
두 존재는 같은 외형과 말투를 하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무두르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바람에 실려온 꽃잎들이 짓밟히며 다시 허공으로 튀었다.
"벌써 며칠째 싸운 건지 모르겠군. 취이익."
"정확히 58일째다.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자고. 취이익."
"취익. 좋다. 마침 나도 지겨웠던 참이니까."
두 명의 무두르는 양손의 깍지를 끼며 서로 힘자랑을 하듯 양팔의 근육에 힘을 주며 서로를 밀었다.
블러디 오크가 되어 붉어진 피부를 타고 형용할 수 없는 힘이 꿈틀거렸다.
굵은 혈관이 마치 천년 묵은 지렁이처럼 꿀렁거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오크 사이에 흐르는 힘의 균형은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었다.
마치 자신이 진짜라는 것처럼.
이내 조금 더 센 무두르의 외침이 허허벌판을 가득 울렸다.
"우오오오!!"
우지끈!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힘의 파동과 함께 조금 더 센 무두르가 조금 더 약한 무두르의 팔을 꺾더니, 이내 손목마저 부러트려 버렸다.
조금 더 약한 무두르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조금 더 센 무두르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얼굴을 향해 내질러졌으니까.
퍼어억!
"췩!"
조금 더 약한 무두르는 일말의 비명과 함께 안면이 함몰된 채 끝없이 날아갔다.
두 개의 바위산을 뚫고, 바다를 건너, 강을 건넜다.
그렇게 몇 마리의 기러기와 부딪히며 다시 바다를 만났고, 이내 조금 더 약한 무두르는 물 수제비하는 돌처럼 바다에 몇 번 튕기더니 바다에 꼬르륵 가라앉았다.
그렇게 조금 더 약한 무두르는 최후를 맞았다.
"취익.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그리고 그 장면을 조금 더 센 무두르.
아니, 진짜 무두르는 끝까지 지켜보며 한쪽 입꼬리를 추켜세웠다.
"흐음. 역시 나 자신이랑 싸우는 건 재미있군."
장장 58일에 결친 혈투.
무두르는 별 다방(多房)이라 명명된 이 세계에서 약 두 달 가까이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과 싸움을 벌였다.
이곳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정작 무두르에게는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는 싸우고 싶었다.
그저 늙은 노인이나 지켜보기엔 무두르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그리하여 무두르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 싸우고 또 싸웠다.
당연히 분신이기에 자신보다 약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존재보다는 나았다.
무두르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최강이었으니까.
고로 분신 또한 최강의 상대였다.
"후우. 이제야 좀 답답한 게 풀리는데. 푸흐흐."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달빛을 닮아 있다.
무두르는 찾아오는 고요함 속에서 묵묵히 달만 쳐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싸움 직후에 올려다보는 달은 예나 지금이나 보람차구나.
"취익. 영감은 뭐 하나 모르겠군."
그동안 분신과의 싸움에 매진하느라 영감과 대화조차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영감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지내는지, 현재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
그저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며, 노친네가 아직 살아는 있구나, 하며 느끼고만 있을 뿐.
별다른 흥미라던가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혼자뿐인 이 고독한 세계가 너무도 낯설어서, 무두르는 차츰 지쳐만 갔을 뿐이었다.
"췩. 빌어먹을 집구석."
이제는 집이라 불러도 무방할 공간으로 무두르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영감이 만들어 먹었던 음식들이 허공에 나타났고, 무두르는 그것을 먹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 실력 하나는 기가 막힌 영감탱이였다.
인간이 아닌 오크였다면 자신의 전속 요리사로 삼았을 실력이었다.
"흠."
그러던 중 무두르는 어느 한곳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관짝 하나.
아마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곳에 누워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었다.
'불을 잘 다스리는 신이었던가.'
어쨌든 왜 그가 자신처럼 영감탱이의 몸속에 있으며, 잠을 자고 있는지는 무두르의 입장에선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저번에 만났던 그 카미유라는 성좌가 펑펑 울었던 걸 생각하면, 서로 그렇고 그런 관계라 추측만 할 뿐.
"꺼억."
입 안에 있던 음식들을 한 번에 꿀꺽 삼킨 무두르가 트림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프로메테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무두르는 먹다 남은 뼈로 이를 쑤시며 관에 누워 잠든 프로메테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츠츠츳.
"음?"
갑자기 프로메테우스의 주변에서 황금빛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더니, 바로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던 무두르에게로 옮겨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두르는 살짝 당황했다.
"흠."
무두르는 저려오는 왼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금빛 스파크에는 그야말로 신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공격해도 좋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누워 있는 시체 따위가 감히 짐의 팔을 저리게 만들다니. 심히 괘씸하도다. 취익."
무두르가 콧김을 한번 강하게 내뿜더니 왼손을 들어 프로메테우스의 뺨에 주먹을 내질렀다.
평소에 신을 한번 때려보고 싶었는데, 잠들어 있는 지금이 기회이구나 싶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아마 때려볼 기회도 없으리라.
그렇게 무두르의 왼 주먹이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에 맞닿으려는 순간.
팍!
"……!"
깜짝 놀란 무두르의 동공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잠든 줄 알았던 프로메테우스가 하나 남은 팔로 자신의 왼손을 막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프로메테우스의 두 눈에 태양이 깃들어 있었다.
화르륵!
[네놈은 누구냐.]
***
[불과 예언의 신, '프로메테우스'를 감싼 금제의 저주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몸 이곳저곳에서 튀기 시작하는 황금빛 스파크를 느끼며, 나는 드디어 프로메테우스가 깨어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심중 깊은 곳에 자리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기운이 들끓었다.
젊은 시절 보았던 무협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전이 꿈틀거리는 것 같달까.
어쨌든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살아 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솔라야. 썬 익스플로젼."
"알겠다 주인아!"
솔라는 언제나처럼 "해해." 웃으며 몸집을 덤프트럭처럼 키우기 시작했다.
진화를 하고 나서 손까지 생겨버리니 꽤나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프로메테우스를 위한 부활의 축포로는 안성맞춤이로군.
"훌륭하다."
나는 그대로 거대한 솔라를 거머쥐고는 냅다 아래로 던져버렸다.
하나뿐인 계단을 통해 피라미드를 거슬러 올라오던 언데드의 군세들에게 재앙이 밀어닥쳤다.
그 재앙의 이름은 '태양'이었다.
"이런 미친…!"
"이건 또 뭐야!"
"막아!"
"공격해!"
하지만 소용없었다.
죽음과 어둠의 마법을 쓰는 그들에게 태양을 막을 수단 따윈 없었다.
쇄도하던 솔라는 이내 하얀 빛이 되더니 전방의 적들을 집어삼켰고, 이내 세상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이윽고, 어마어마한 폭발이 프랑스 팀을 집어삼켰다.
[프랑스 팀이 깃발을 빼앗겼습니다.]
[프랑스 팀이 전원 탈락하였습니다.]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얻어맞았기에 직격타였다.
프랑스 팀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었다.
아마 누가 이걸 던졌는지조차도 모르겠지.
[불과 예언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신격(神格)을 회복하였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감싼 금제의 저주가 모두 풀렸습니다!]
허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불과 예언의 신, '프로메테우스'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불과 예언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힘이 '낮'에 더 강해지고 '밤'에 약해집니다!]
[현재는 '낮'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힘이 더 강해집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다시 돌아왔고.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뜹니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오랜만이다. 네비게이션."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립니다.]
그오오오-!
솔라가 피어오르는 화염 속에서 폭염의 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태양을 숭배하는 타우루스들이 불꽃 속에서 솟아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들의 왕을 기다려온 것과 같은 외침.
바야흐로 태양의 축제가 시작될 참이었다.
***
"어이어이, 이거 진짜냐고."
미국 팀의 주장 데미안이 팔짱을 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현재 미국 팀 전원은 마이클이 만들어낸 모래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함께 팔짱을 낀 채 진지한 눈빛을 한 마이클을 힐끔 보았다.
마이클의 지금 눈빛은 그야말로 호적수를 만났을 때 볼 수 있는 눈이었다.
이건 라이벌인 토레즈를 볼 때랑 똑같은데….
"네 말대로 진짜 다크울프가 온 모양이야."
"…내기는 내가 이겼군."
"그래. 술은 내가 사야겠어. 하하."
데미안은 그렇게 웃으며 손에 쥔 은창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다크울프의 월드 대항전 참전을 놓고 작은 내기를 했었는데, 마이클은 참전한다는 쪽에 걸었고, 자신은 당연히 안 한다는 것에 걸었다.
결과는 보다시피….
"술은 네 집에 있는 1945년산 무통 카데(Mouton Cadet)로 하지."
"그래. 1945년산 무통 카데… 뭐? 야, 그거 내가 제일 아끼는 와인이란 말이야!"
"약속은 약속이다. 데미안."
"야, 씨. 80년 다 돼 가는 와인인데 그걸 뜯으라고?"
마이클은 대꾸 없이 그저 쌍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저 폭발 너머에 서 있을 다크울프였다.
프랑스 팀을 단번에 탈락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
과연 자신이 인정한 호적수다웠다.
'그런데 다크울프는 대체 어느 나라 소속이지…?'
갑자기 든 생각에 마이클은 그저 피식 웃었다.
'하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마이클은 모래의 구름을 움직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는 미끄럼틀을 만들어냈다.
미끄럼틀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땅까지 맞닿아 있었다.
"야, 내 말 듣고 있냐? 그 와인은 있잖아. 사실…."
그저 자신은 다크울프를 이겨 그의 가면을 벗겨내고 데미안이 사주는 술로 회포를 풀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해보지도 않았던 합숙 훈련까지 했고, 자신만이 최강에 어울리는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마이클은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저번에 내지 못했던 결판을 내자. 다크울프…!'
마이클이 미련 없이 모래 미끄럼틀로 뛰어내렸다.
"야. 마이클 거기서! 무통 카데는 안 돼! 좀 봐주라!"
이어서 데미안이 뛰어내렸고, 미국 팀 전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이어질 세기의 대결에 모든 이들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