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1화
제241화
- 이곳을 찾아와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한 노신사의 일장연설이 경기장 내에 울려 퍼졌다.
이곳과의 거리는 굉장히 멀었지만, 다행히 문명의 혜택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스크린에 그야말로 선명하게 노신사의 얼굴이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수만 관중들의 눈이 모두 그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크스타를 처음 개발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죽고 나서도 환생을 한다면….
고풍스러운 하얀 정장에 가슴에 꽂힌 체크무늬 푸른 행커칩이 이건명 회장을 더욱 중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실제로 처음 보았으나, 매체로는 많이 보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그를 보는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연예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건명이라.
나는 그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질겅거렸다.
그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끄는 선구자인 것처럼 여유롭게 연설을 펼치고 있지만, 지금 내 귀에 그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냐.
조셉에게 진실을 들었던 나였기에 눈앞에 있는 이건명의 몸짓과 말투가 전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 또한 이런 내 생각을 알기는 할까.
내가 그를 무척이나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를 실험체로 쓴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주먹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 그래서 아크스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죽고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살겠다는 저의 욕심은 실패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이다.
실험은 성공했다.
분명 조셉이 준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 하는 수 없이 전 그 새로운 세상을 게임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저는 죽고 없을지라도 여러분만큼은 이곳에서 살아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말기암 환자입니다. 곧 저세상으로 떠나겠지요. 저는 하늘 위에서도 여러분이 꿈을 좇아 널리 달려갈 수 있길 항상 바랍니다.
좌중이 모두 숙연함에 잠겼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저런 사람이 바로 영웅이라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세계의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수없이 많은 기부와 선행으로 이 시대의 선구자처럼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정이 그들의 뇌리에 박혀 있을 것이다.
- 그것이 지금 저의 꿈이자, 유니온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추악한 인간의 군상만이 남았을 뿐이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경기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터졌다.
이건명은 약간의 손을 흔들고는 경기장 한편에 마련된 VIP석에 직원들과 함께 착석했다.
바로 옆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주치의인 것처럼 보였다.
이건명의 바로 옆에는 아까 축사를 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 강태산 또한 함께 앉아있었다.
"흐음."
나는 찡그리던 미간과 팔짱을 풀고는 다시 무대로 집중했다.
저 멀리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넘겨받고 있었다.
- 그럼 이제 정말로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월드 대항전의 첫 번째 종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자의 등 뒤에 위치한 스크린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띠리리리리-!
미도 또한 지금 이 상황을 대기실에 마련된 TV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 대표팀은 곧 부를 테니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에 모두 긴장감을 한껏 유지하고 있었다.
TV 속 스크린에 적힌 글자들이 마치 슬롯머신처럼 돌며 화면을 어지럽혔다.
이내, 그것은 멈추며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냈다.
[깃 발 쟁 탈 전]
-네. 첫 번째 종목은 바로 깃발 쟁탈전입니다! 그 전에 점수 합산 방식과 경기 진행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관객들을 위한 스크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띄워졌다.
사회자는 그것을 보며 긴 설명을 이어갔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16개국의 대표 선수가 모두 참가하는 종목으로, 총 3번의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상위 3팀에겐 차등적으로 점수가 부여된다고 한다.
1등은 5점, 2등은 4점, 3등은 3점이라는 점수가 주어질 것이었고, 나머지 4위~10위의 팀들은 전부 2점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11~15위는 1점. 당연하게도 꼴찌는 0점이다.
이것은 미도에게도 익숙한 방식이었다.
'작년 월드 대항전이랑 점수 합산 방식은 똑같네.'
하긴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똑같은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점수로 최종 합산하여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나라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뭐 그런 룰이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 이어서 깃발 쟁탈전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보고 있는 화면에서 사회자가 사라지고 깃발 쟁탈전이 벌어질 맵이 입체적으로 나타났다.
- 방식은 간단합니다. 우선 각 대표 선수들은 무인도에 떨어집니다. 모두 가장 끝에 위치한 외곽지역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며, 서로의 깃발을 빼앗는….
깃발 쟁탈전은 말 그대로 깃발을 빼앗는 것이 중요한 경기였다.
각 대표팀은 경기 시작 전 1분 안에 기수를 정해야 하고, 아군의 기수를 지키면서 숨어있는 적들의 기수를 찾아내 공격하여 깃발을 빼앗아 점수를 올리는 게임이었다.
당연히 깃발은 하나당 1점이다.
- 하지만 1점만 있으면 재미없겠죠?
이어서 화면이 확대되더니 섬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피라미드 신전을 보여주었다.
피라미드는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하나뿐이었는데, 그 꼭대기에는 황금 깃발이 하나 존재했다.
사회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 이 황금 깃발은 무려 5점이라는 점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를 가지고 잘 지킨다면 무려 다섯 팀의 깃발을 빼앗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죠. 어느 팀이 쟁취할지는 모르겠으나 전략적인 활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팀마다 조커라는 예비 선수를 등록….
"하, 무슨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종목을…. 참나. 할 맛 안 나네. 사회자 머리는 왜 저 모양이야? 진짜 웃기네. 안 그러냐 상혁아?"
"그러게요. 큭큭."
잠자코 화면을 보던 김동현과 한상혁이 이죽거리자, 다른 선수들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여튼 꼰대 근성은 이런 순간에도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째려봐."
미도는 살쾡이처럼 노려보던 눈을 김동현에게서 거두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다행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 그럼 각국 대표 선수들을 불러보겠습니다!
바깥에서 분주한 소리와 함께 함성이 들리더니, 마침 아까 봤던 직원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선수분들 이제 입장하시면 됩니다."
"어휴. 꼰대…."
김동현을 힐끗 보며 중얼거린 미도는 재빨리 문밖으로 도망치듯 나섰다.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김동현은 역정을 냈다.
"뭐? 너 뭐라고 했어."
"글쎄요~?"
"너 나한테 그런 거지! 아니야?"
"아닌데요. 찔리세요?"
"이이익…."
조금은 삐걱거리지만, 월드 대항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 *
- 우크라이나의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딱 듣기만 해도 우크라이나의 풍경이 떠오를 만한 반주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대표 선수들이 입장을 시작했다.
웃긴 것은 우크라이나의 선수들은 모두 미모의 여성들이라는 것이었다.
"와, 겁나 이쁘다. 역시 우크라이나는 미인의 나라야."
"미인의 나라?"
내가 갸우뚱하자, 옆에 앉은 정도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우크라이나가 여자가 많기로 유명하데요. 소문에 의하면 나물 파는 사람이나 밭 가는 사람도 여자인데 전부 미인이라고 하더라구요. 오죽하면 나물 파는 송태교, 밭 가는 김혜미라는 말이 있겠어요. 근데 지금 보니까 역시는 역시네요."
정도가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꽁!
"악! 왜 때리세요!"
"그냥."
이어서 다른 나라의 행렬이 이어졌다.
- 다음은 독일의 대표팀이 입장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제일 앞장서서 등장하는 거한이 있었다.
그는 양팔을 높이 치켜든 채 마치 챔피언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인하르트. 다른 말로는 바보라고 부른다.
"저렇게 생긴 인사였구만."
게임 속에서만 봤지.
실제로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보, 아니…. 라인하르트가 여전히 호탕한 웃음과 함께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어서 중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등.
총 16개국의 대표팀들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며 속속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한국은 아까 제일 첫 순서로 등장했기에 미도는 이미 무대에 자리해 있었다.
- 그럼 각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를 앞둔 소감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한국 대표팀부터 자리로 모셔보겠습니다.
엄청난 함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과연 개최국이라 이건가.
"한국 힘내라!"
"화이팅!"
"최미도 사랑해!"
마지막 놈은 누구냐.
두 칸 뒤에 놈인가.
넌 내가 기억해뒀다.
썩을 놈 같으니라고.
감히 누구를 넘보는 게야.
- 먼저 대표팀의 주장인 임창용 선수께 여쭤보겠습니다. 각자 월드 대항전에 임하는 각오 한마디씩 부탁드립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임창용이 말했다.
- 저희 한국 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난 합숙에서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야말로 주장다운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이어지는 마이크는 은정혁에게로 넘어갔다.
- 저는 언제나 빛처럼 대표팀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진 건 그때였다.
"멋지다!"
"잘생겼다!"
"팬이에요!"
관객석에서 열화와 같은 성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여성 관객들이 난리였다.
어쩐지 저번보다 은정혁을 응원하는 놈들이 늘어난 것 같은데 착각인가.
"크으. 저 외모에 저런 말까지 해버리면 당연히 여자들이 뻑가지. 부럽다. 부러워."
나는 정도를 보면서 물었다.
"저놈 팬이 많냐?"
"많다 뿐이겠어요. 누나한테 들으니까 원래 있다고 듣긴 했는데, 저번에 국대 선발전 이후로 폭발적으로 늘었데요. 하긴 엄청난 활약을 했으니까 여성 팬이 늘어날 만도 해요. 부럽다 부러워. 으으."
"근데 넌 그걸 다 어떻게 아는데."
"그야 당연히 야자 시간에 몰래 핸드폰으로…."
꽁!
"악!"
정도의 머리에 두 개의 혹이 겹쳐서 봉우리가 되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깃집에 갔다가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2단으로 쌓은 것 같았다.
참고로 정도가 어렸을 때 내가 한 번 만들어 준 적이 있다.
어렸던 정도는 그것을 참 맛있게 먹었다.
"크으으으. 왜 자꾸 같은 곳에 때리세요!"
"시끄럽다. 정도야."
"아빠!"
"쉿. 미도가 마이크 잡았다."
최강현이 검지로 입술을 가리자, 그제야 정도는 씩씩거리던 숨을 참으며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마이크를 잡은 미도가 씩씩하게 말했다.
- 우리 가족들 다 보고 있죠? 나 대표팀 됐어요! 꺄악! 어떡해! 다들 사랑해요~! 하트 뿅뿅-♡
미도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 하트를 카메라를 향해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관객석에서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가족들의 면면을 살폈다.
내 옆에는 웬 홍당무가 3개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도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