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230화 (230/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30화

제230화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에 있는 항만도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 담긴 블라디보스토크는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많은 역사와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오늘 러시아의 아크스타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고 있었다.

예선에 통과한 것은 총 64명의 러시아인들.

그리고 그중 단연 최고의 인기를 차지하는 것은 제우스 길드의 간부이자, 홍일점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나'였다.

"레이나!"

"너무 섹시해요!"

"여기 좀 봐줘요!"

"나랑 결혼하자!"

아마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가 누구냐고 지나가는 꼬마에게 묻는다면 무조건 '레이나'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로 레이나의 인기는 러시아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날이 갈수록 꽃을 피웠고, 언론은 절정에 이른 미모라며 극찬을 하며 추켜세워 주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항상 도도한 표정으로 매체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오늘 레이나는 기분이 몹시도 좋지 않았다.

'감히 날 차? 이 레이나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싫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레이나였기에, 그녀가 어제 다크울프에게 들었던 말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마, 자신은 그에게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던 것인가.

'지난 일주일간 그렇게 유혹했건만….'

으득.

레이나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방송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 다음은 러시아의 보물이죠! 레이나 겐리흐!

와아아아-!

관객들의 함성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원형의 돔 경기장인 이곳은 접속할 수 있는 캡슐과 화면을 볼 수 있는 무대를 중앙에 두고 관객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레이나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어제 산 신상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모델처럼 우아하게 무대로 올라섰다.

뒤에 붙은 '겐리흐'는 자신의 가문 이름이었는데, 옛날에 피아노를 아주 잘 쳤던 조상의 성이라고 한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 상대는 러시아 육탄 전차라고 불리는 레오니드 코스차!

"우오오오!"

군청색 민소매를 입은 채, 울긋불긋한 근육을 과시하며 걸어오는 남자의 이름은 레오니드 코스차.

그는 게임 내에서 '레오니드'라는 아이디를 쓰는 남자였다.

그는 생긴 것처럼 탱커답게 화끈한 경기를 추구했고, 러시아 내에서는 꽤 팬층이 두터운 편이었다.

아마 그 또한 이번 러시아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러시아에는 그와 견줄만한 탱커가 사실상 없으니까.

'뭐, 라인하르트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나쁘진 않지.'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 경기는 선수 개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개인전.

레이나는 눈앞의 레오니드를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릴 요량이었다.

지금은 아주아주 몹시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이 캡슐에 접속했다.

우우우웅.

시야가 점멸하며 나타난 곳은 숲이 울창한 널따란 평지.

레이나는 익숙하게 눈앞에 나타나는 레오니드를 보았다.

그는 양 주먹을 맞부딪히며 걸어오고 있었다.

"흐흐. 레이나.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내가 잘 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아랫도리로 으흐흐."

너무나 노골적인 멘트였다.

안 그래도 열 받는 레이나의 입장에서 레오니드는 좀 더 공손한 말을 택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너…. 오늘 잘 걸렸다."

레이나가 어두운 기운을 분출하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망토를 걸친 얼굴 없는 영혼이 거대한 낫을 들고 나타났다.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녀의 힘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잘 지키는 좋을 거야. 그 아랫도리."

레이나의 손에 들린 검은 낫이 서슬퍼런 날을 빛냈다.

"잘릴지도 모르니까."

* *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잠실운동장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 경찰들이 나서서 도보에서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차들이 줄을 지어가며 속속들이 그곳에 도착했다.

"음~ 이 상쾌한 공기."

그리고 그곳에 미도가 도착했다.

그녀는 선수 전용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저번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공기는 유독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뒤에서 내리는 선수들을 보았다.

총 50명을 태울 수 있는 이 대형버스 안에는 각양각색의 한국 랭커들이 타고 있었는데, 마침 그 안에는 미도와 같은 길드인 김현우, 박태현, 은정혁 또한 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이번 본선에 올라왔기에 이곳에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언제와도 넓네."

김현우의 말을 박태현이 받았다.

"그러니까 운동장 아니겠냐."

"야, 피곤하다. 빨리 대기실가서 쉬자."

은정혁의 투정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니온에서 마련한 선수 전용 대기실로 향했다.

원래는 남자와 여자의 대기실을 따로 잡아야 하겠지만, 가상현실이라는 게임의 특성상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유니온에서는 친한 이들끼리 대기실을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고, 미도를 포함한 이카루스 길드 전원은 한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전원이라고 해봐야 그녀를 포함해 4명이었지만.

"와, 그 많은 길드원들이 다 떨어진 거야? 예선에서? 어쩐지 허전하네."

미도가 지난 예선전을 떠올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있었던 예선전에서 이카루스는 총 38명이 출전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보다시피….

"다 약해서 떨어진 거지 뭐."

박태현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사실 약했다고 해도 올해는 꽤 많이 살아남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설마하니 유니온에서 작년보다 난이도를 올렸을 줄이야.

"그래. 몬스터 웨이브에 함정이라니 이건 진짜 예상치도 못했다."

은정혁 또한 예선전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선전은 총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100명씩 인원을 나누어 경기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유니온에서 준비한 함정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마치 이것조차 통과할 수 없다면 국가대표가 될 자격은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함정에 실력이 없는 이들은 우수수 떨어졌다.

'어우, 다시 생각해도 오금이 저리네.'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고, 앞에서 거대한 철퇴가 천장에 매달린 채 떨어지기도 했다.

제일 까다로운 것은 벽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이었다.

다행히 은정혁에겐 함정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고, 일행들과 살아남았지만, 다른 길드원들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본선은 어떻게 진행되려나 모르겠네."

은정혁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박태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내뱉었다.

"뭐, 작년처럼 개인전이랑 팀전으로 나눠서 하지 않겠어?"

"룰이 바뀌었잖아. 아마 선발 방식도 바뀌었을 거야."

"흐음, 이따가 보면 알겠지."

그렇게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을까.

- 본선 진출자들은 무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가자."

길드장 김현우가 앞장서 걸었고, 미도는 그의 뒤를 따라 무대를 향해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오늘 경기장에 오라고 했던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명씩 찬찬히, 미도는 꼭 오늘 최종 본선을 통과해 국가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싶었다.

'지켜봐 주세요.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미도는 씩씩하게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차마 동생인 정도는 떠올리지 않았다는 걸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 *

"에취!!"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잠실 운동장 구석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 정도를 보는 며느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너 감기 걸렸니?"

"스읍. 겨울이잖아요."

정도가 코를 슥 문지르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다 큰 사내 녀석이 감기나 걸리고 말이야. 쯧쯧. 안 되겠다. 할애비랑 같이 등산이나 다니자."

"아익…. 싫어요. 할아버지랑 다니면 힘들잖아요."

"이놈의 자식이."

꽁!

나는 정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다시 팔짱을 꼈다.

정도는 머리에 혹이 났는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우씨…. 진짜 왜 맨날 저만 때리세요!

"뭬야?"

나는 정도의 머리를 두어 대 더 쥐어박았다.

옆에서 들리는 신음을 애써 무시하며 앞을 보는데 별안간 방송이 울려 퍼졌다.

- 지금부터 아크 스타 국가대표 선발전 최종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전에 애국가 연주가 있겠습니다. 내빈 여러분들께서는 자리에 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손을 척 올리며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렇게 불렀다.

가벼운 1절이 끝나자, 우르르 거리는 소리와 함께 관객들이 다시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아크 스타 국가대표 선발전 최종 본선 진출자들을 소개합니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사이로 저 멀리 드라이아이스가 짙게 깔리면서, 선수들이 통로를 지나와 한명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장하고 장엄한 배경 음악과 함께하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였다.

옆에서 며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기 미도다. 미도야~!"

미도에게 닿을 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며느리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나는지 신명나게 손을 흔들었다.

옆에 있던 첫째는 이미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여보. 창피하게…."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요? 내가 내 딸을 응원하겠다는데. 안 그래요? 우리 미도 파이팅~!"

한술 더 뜨는 며느리를 보며 최강현과 최정도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더 좋았다.

암, 저래야 내 며느리지.

"크하하하! 그래. 나도 같이 응원하자꾸나. 미도야 힘내라!!"

"오호호. 역시 우리 아버님 화끈하시다니까. 파이티이이잉!"

그렇게 며느리와 나는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응원전을 펼쳤다.

평소라면 1도 안 했겠지만 무려 미도의 국가대표 선발이 걸린 경기다.

창피함을 감수하더라도 할 땐 해야 한다.

강현이와 정도는 얼굴을 붉히며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다시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 다들 아시다시피 올해 국가대표 선발전은 통합 리그로 진행이 됩니다.

그것은 모두가 잘 아는 얘기였다.

- 유니온에서는 통합 리그인 만큼 선발전 또한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난이도가 올라간 예선을 통과한 50인이 가려졌습니다. 과연 이 중에서 살아남을 최종 20인은 누가 될까요? 그리고 누가 대한민국의 국기를 가슴에 달 수 있을까요?

두근거리는 배경음이 잔잔하게 깔리며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 이번 선발전의 최종 본선의 종목은 유니온에서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지금 동시에 시행이 되고 있는데요. 지금 제 손에 그 종목이 적힌 종이가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르르르르.

살짝 쿵 떨리는 드럼 소리와 함께 사회자의 얼굴이 거대한 스크린에 띄워졌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편지지 같은 것을 꺼내더니 봉투 안에 담긴 것을 보고는 살짝 눈이 커졌다.

"아하…. 이거군요."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크스타 국가대표 선발전. 그 최종 본선의 종목은 바로…!"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심장을 강타하는 드럼 소리가 장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약 30초가 흘렀고, 사회자가 침을 삼키며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광고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