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29화
제229화
푸쉬이이익-.
김빠진 콜라 소리와 함께 캡슐의 뚜껑이 열렸다.
나는 가볍게 허리를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마침 며느리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마중을 나와 있었다.
"뭐하러 기다리고 있냐. 할 일 하고 있지."
"그냥요. 오랜만에 그러고 싶더라구요."
김미경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며느리가 웃을 때마다 반달이 그려지는 눈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허허. 그래 그래. 가자. 손님이 어디 계시냐?"
"일단 거실로 모셨어요. 차랑 다과 좀 내어올까요?"
"부탁하마."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향했다.
며느리는 부엌으로 가 다과를 준비했고, 시선을 옮겨 거실을 보니 그곳엔 의외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함께 올 줄은 몰랐는걸?"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유니온의 전략기획 팀장인 유민석과 바로 밑에서 일하는 차진철.
두 사람이 나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나는 상석 소파에 착석했다.
"그래. 어쩐 일로 이 늙은이를 보러 왔누."
"아, 그게 실은…."
유민석이 옆에 있는 차진철을 곁눈질로 바라보자, 마침 기다렸다는 듯 서류가방에서 봉투가 꺼내졌다.
그것을 보며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이게 뭐지?"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유민석이 친절하게 노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요즘 TV를 틀면 전부 그 얘기만 떠들어 대고 있었으니까.
"이건 월드 대항전에 대한 광고지가 아닌가? 엄청 화려하게도 홍보를 해대는군."
"맞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어르신을 모시고자 왔습니다."
"나를?"
마침 며느리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그녀는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부엌으로 가더니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며느리가 들을까 봐 한 번 힐끔거리고는 눈앞의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난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나갈 생각이 없는데."
사실 이 대답은 저번에 미도와 했던 유튜브 방송에서 했던 말이기도 했다.
수많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월드 대항전에 내가 나올 것이냐 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런 것에 나갈 생각은 없다고 그때 분명히 못을 박았었다.
"그거 아십니까."
유민석이 운을 뗐다.
"뭘."
"제가 부장님을 설득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어르신을 월드 대항전에 출전시키려고 올해는 무려 통합 리그를 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군."
안 그래도 TV에서 200레벨 이하의 챌린지 리그와 200레벨 이상이 붙는 베스트 리그가 통합된다는 소식이 한창 뉴스거리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그것은 이번에 열리는 월드 대항전부터 적용될 것이라고 했고, 그에 따른 새로운 국가대표 선발전이 전 세계에서 열릴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우리나라도 오늘 예선전이 치러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미도 또한 그것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이번에 뽑는 국가대표는 레벨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뽑아 최고의 선수들만을 내보이겠다는 유니온의 의지가 엿보였다.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싫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가뜩이나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에게 이번 월드 대항전은 그야말로 귀찮은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매우 귀찮은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쫓아다니는 기자들이랑 싸우느라 곤혹을 치르는 중인데, 출전해서 얼굴을 공개한 뒤에는 더 많은 기자들이 따라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안 해. 안 해.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싫은 기색을 표했다.
그러자 유민석이 다급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혹 돈이 필요하시면 저희 측에서 드릴 수 있습니다. 나오셔서 한국의 체면 좀 살려주십시오. 제 승진도 걸려 있단 말입니다."
"그걸 왜 나보고 살려달라는 게야. 나보다 팔팔하고 젊은 놈들 천진데. 그리고 자네 승진을 왜 내가 책임져야 하나."
"큼. 그 젊은이들이 어르신보다 못하기에…."
유민석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어깨를 좁히며 우물쭈물거렸다.
보다 못한 차진철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어르신."
"왜."
"혹, 얼마 전 교통사고를 크게 한 번 내셨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찌 알았지?"
"그건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저희 측에서 어르신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도움을 준다고? 난 충분히 그 똥차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데."
난 지금 무려 7억짜리 람보르기니를 똥차라고 표현하고 있다.
뭐, 사실 그런 인성 쓰레기 놈이 모는 차는 똥차라고 저번에 한 번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게 맞기도 하고.
"그 람보르기니의 차주가 성신 그룹의 막내아들인 건 아십니까?"
"성신 그룹?"
당연히 몰랐다.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성신 그룹의 막내아들인 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예. 어쨌든 어르신께서 일방적으로 시원하게 박으셨더군요. 아마 기업 변호사를 고용해서 꽤 오랫동안 귀찮게 할 것 같던데 말입니다."
"이런 염병할 놈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더해 기업 차원에서 성신 그룹에 압박도 넣어보겠습니다. 어르신 앞에 싹싹 빌게 만들어드리죠."
"호오. 그건 좀 마음에 드는군."
나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만족스러운 듯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망할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잘됐다 싶긴 했다.
그래도 얼굴을 밝히는 건 좀 시기상조 같은데….
어떻게 한다.
띡띡띡띡.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엄마, 나왔어~"
미도였다.
"어머,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응. 일찍 끝났어. 내일 국대 선발전 본선에 나가야 되서 오늘은 푹 쉬려고."
"예선에 통과했나 보구나. 엄마 응원가도 돼?"
"음, 재미없을지도 모르는데."
"얘는, 그런 게 어딨니. 이참에 아빠랑 같이 가봐야겠다. 정도도 불러서."
"뭐, 그래도 되구요."
신발 벗는 소리와 함께 거실로 온 미도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엇, 할아버지. 그리고 진철이 오빠? 손님이 계셨네. 안녕하세요."
미도가 나를 포함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일단 미도가 와버렸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마침, 유민석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게 말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 생각이 있으시면 저번에 드린 명함으로 연락 주십시오."
"그러지."
"엇, 벌써 가시려구요? 혹시 저 때문인가…?"
미도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차진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어차피 일어나려고 했어."
"아, 그래? 벌써 가니까 좀 서운하다. 오빤 잘 지내지? 요즘 왜 접속 안 해? 통 못 본 거 같네."
"일이 좀 바빠서."
"아~ 어쩔 수 없지 뭐. 들어오면 귓속말해."
"하하, 그래. 나중에 보자."
"응. 잘 가~"
화기애애한 미도와 차진철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이 망할 늑대 놈이 왜 이렇게 미도랑 친해 보이는 거지.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 벌써 거사가 치러진 건가?
"큼. 조심히들. 아니, 어서 빨리 가게나."
나는 차진철이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친히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 * *
그로부터 1시간 뒤.
미도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본선을 진출했다며 내게 한껏 자랑을 했고, 내일 가족들과 함께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단 알았다고 하긴 했는데, 사실 가야하나 망설여지긴 한다.
막상 갔다가 미도가 탈락해서 우는 모습을 볼까 해서였다.
괜히 갔다가 울상을 짓는 손녀의 얼굴을 보면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다.
[접속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게임 세상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마그마가 보였고, 역한 가스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마침 저 앞에 몬스터들을 두들겨 패는 백무열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왔냐."
마침 백무열이 마그마 울프의 뚝배기를 터트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늑대는 좀 살살 패지."
"몬스터인데 무슨."
"꼭 내가 당하는 것 같잖아."
"오, 맞아 볼텨?"
"그럼 담배는 없을 줄 알아."
"큭큭. 잘됐네. 마침 담배가 땡겼는데, 한 대 줘봐."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동시에 연기를 내뿜으며 나란히 섰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백무열이 입을 열었다.
"너 월드 대항전인지 그거 안 나가냐?"
"너도 날 설득하려고? 그만해라. 안 그래도 방금 유니온에서 직원이 찾아와서 제발 나와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
"흠, 그래? 아니, 뭐. 난 네가 나가든 말든 상관없는데, 어제 미도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귓속말을 하더라고."
"미도가…?"
이건 좀 의외인데.
"그래. 올해 월드 대항전은 나한테 좋은 기회라나 뭐라나. 아무튼 난 솔깃하긴 해서 말이야. 길드 가입해달라고 하더라고."
"네가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거지 뭐."
"춘택이 네가 없는데 무슨 재미로."
백무열이 아이 같은 표정으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여튼 싱겁다니까."
다시 한번 담배 연기가 나부꼈다.
망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나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일까, 지금 내가 정체를 드러내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배배 꼬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백무열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응원은 가 봐."
"그래야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듣자 하니 올해 국가대표 선발은 예비후보를 포함해 총 20명을 뽑는데, 각종 전문가들이 보는 앞에서 다양한 경기를 치르며 개인 기량과 팀워크 점수가 가장 높은 20인을 주전으로 뽑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물론, 주전으로 나가는 10인과 예비후보들은 감독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교체될 수 있으니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느 나라든 공통된 룰이었고, 지금도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선발전이 치러지고 있을 것이었다.
"미도가 내일 와 달라고 하더라고."
"미도가 참 싹싹하단 말이야.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 저런 손녀 진짜 없다. 에이, 성찬이 이 녀석은 뭐하는가 모르겠네."
"정도 놈도 뭐하나 몰라."
나와 백무열은 서로 손자 흉을 보면서 낄낄거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참. 레이나는?"
"아, 그 처자 아까 화가 많이 났는지 허공에 대고 빼액 소리를 지르고 돌아가던데?"
화가 단단히 났나 보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난 제우스인지 재떨이인지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일단 다시 사냥이나 하자."
"그래. 안 그래도 몸이 근질하던 참이야."
그날은 그렇게 온종일 지루한 사냥만 반복하다 일찍 잠들었다.
내일 있을 미도의 국가대표 선발전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