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20화
제220화
'이 녀석이 헤라클레스가 점찍었던 첫 번째 놈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백무열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두 번째는 당연히 휴톤일 것이다.
물론, 얼마 전에 자신이 발라버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놈이 다른 성좌랑 계약했다는 그 녀석이라는 건데….
백무열이 게슴츠레하게 노려보자, 마이클이 갸우뚱하며 물었다.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너 말이다."
"예."
"예전에 한 성좌가 관심을 보이지 않든?"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마이클을 못 마땅하게 노려봅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이번엔 마이클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무열을 보았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초창기 아크스타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마이클은 한 성좌로부터 다양한 러브콜을 받았다.
물론 마이클은 그 성좌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꾸 자신을 여장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전갈궁, '안타라스'가 그런 일이 있었냐며 궁금해합니다.]
백무열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그놈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거든."
"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이클은 놀라워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성좌가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겠지.
"아무래도 네놈한테 삐진 게 많은 모양이야."
"…그, 그렇습니까."
마이클은 아직도 그 성좌를 기억한다.
별명은 '최초의 여장남자'.
초창기 마이클은 '몽둥이의 가호'라는 것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집착이 너무 심해서 마이클은 결국 스타 프루츠를 먹고 다른 성좌를 선택했었다.
이제 와서 후회 따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그에게 조언을 하기로 했다.
"조심하십시오. 혹, 여장을 하라고 하진 않습니까?"
"했지. 근데 안 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걸 하냐. 쯧."
"그,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마이클은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자신은 미친놈이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마이클을 보며 백무열은 수상쩍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설마 너…."
"아닙니다. 괜한 오해하지 마십시오."
"했네. 했어."
"아닙니다. 안 했습니다."
"이 녀석이 꽤 잘 어울렸다던데?"
"크흠! 먼저 갑니다!"
마이클은 정말 오랜만에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도망치듯 걸었다.
주변은 마그마가 흐르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용암지대로 보였고, 불 속성 몬스터들이 다양하게 있는 것이 마이클이 사냥하기 좋은 속성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뒤에서 백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어딜 그렇게 급히 가냐~ 천천히 가라! 같이 가자. 이 썩을 놈아!"
마이클은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저히 저 사람 앞에서 낯짝을 들 수가 없었다.
[전갈궁, '안타라스'가 당신의 여장을 궁금해합니다.]
"…궁금해하지 마라. 안타라스."
마이클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하늘을 노려보던 그때.
백무열은 마이클을 쫓아가다 말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잠시 뒤.
그의 손에는 환한 빛이 나는 과일 하나가 들려졌고, 황금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사과 모양의 스타 프루츠를 보며 백무열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어디 맛 좀 볼까."
* * *
그 무렵.
나는 공작과의 면담을 무사히 마치고, 저택 내에 마련된 드레인의 작업실에서 그와 차를 나눠 마셨다.
"설마 브라더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니냐?"
"오우, 그것도 그렇네요. 소식 들었어요. 콜로세움에서 화려하게 우승했던데요?"
"뭘, 새삼스럽게. 그냥 잠깐 놀다 온 거다. 요란 떨 것까진 아니야."
"후후.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요란했어요. 어메이징하던데요?"
"끙."
나는 괜스레 찔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굉장히 요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도 TV에서는 계속해서 다크울프와 관련된 뉴스거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만큼 당시의 경기는 화제였고 전 세계인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지금 그들은 전부 월드 대항전인가 뭔가 하는 것에 내가 나오느냐, 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나갈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지만.
"몸은 좀 어떠냐. 안 좋다더니."
"요 며칠 무리해서 게임을 했더니 그래요. 다시 괜찮아졌어요."
"천천히 해라. 뭐가 그리 급하다고."
"급하죠. 이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잠깐 침묵한 뒤 입을 뗐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아깐 도와줘서 고마웠다."
"후후. 뭘요. 저번에 뮬란에서 도움 받은 것도 있는 걸요. 이런 게 한국인의 정 아니겠어요?"
"큭큭. 그래. 맞다. 한국인은 정이지."
본디 내가 공작에게서 받아야 할 귀족의 지위는 원래 준남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공작과 안면이 있는 드레인 덕분에 나는 그에게서 한 계급 높은 '남작'의 지위를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메테우스는 남작령에 소속된 곳이 되었고, 나는 오르카 왕국의 정식 귀족이 되었다.
에드워드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지위지만 애초에 내게 권력에 대한 욕심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이냐. 오르카로 간다는 얘긴 들었지만, 공작의 밑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저번에 브라더가 준 괴짜 요리정장 제작법을 응용해 귀족들의 옷에 적용 시켰더니, 금세 입소문을 타더라구요. 덕분에 공작에게 불려갔고, 그의 담당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죠."
"하여튼 열정 하나는 대단하다. 네가 동생이지만 존경스러워."
"후후. 브라더도 참."
그렇게 드레인과의 만남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는 그에게 메테우스에 정착할 것을 권했고, 그 얘기를 들은 드레인은 잠깐 고민하더니 자신의 아들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의 이름은 박봉남.
이제는 중년에 접어든 드레인의 양아들이었는데, 그는 아버지인 드레인의 뒤를 이어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아크 스타에서 디자이너 사업의 가능성을 본 박봉남은 드레인의 뒤를 따라 게임을 시작했고, 그는 드레인이 만든 브랜드인 'D. Rainy'를 아크스타에 정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라고 한다.
"우리 봉남이 잘 부탁드려요."
"이를 말이냐."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며 다음을 기약했다.
조만간 메테우스에서 보자는 약속을 한 나는 그대로 뒤돌아 저택을 빠져나왔다.
하늘의 햇살은 오늘따라 유독 화창하다.
"날씨 좋네."
지나가던 구름을 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구름의 정령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한다…."
이럴 때 프로메테우스라도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새삼 이 녀석이 깨어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아직도 시간은 3주나 가까이 남아있었다.
무려 현실 시간 기준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끙. 일단 그 3주 동안은 레벨업이나 죽도록 해야겠군."
나는 에드워드와 케레노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미리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저 멀리 실피드 기사단들이 보일 무렵.
띠링-!
[World. 새로운 전설이 깨어났습니다! 그의 성호는 바로 '몽둥이 성애자(星愛者)'입니다!]
백무열이 드디어 스타 프루츠를 먹게 되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새 현실 기준으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나는 오르카 왕국 주변에 자리한 성들을 전전하며 다양한 몬스터들을 잡아 레벨업 했다.
백무열은 우연히 만난 마이클과 함께 화산에서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중이었는데, 당분간 암브로시아의 효과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해서 사냥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포트렌의 마탑 앞에 도착했다.
가는 사냥터마다 유저들이 미친개처럼 달려드니, 도저히 사냥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참에 무열이를 만나 함께 사냥을 하고 싶기도 했기에 잘된 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현재 마법 포탈은 수리 중입니다."
문제가 있었다.
"수리는 언제 끝나지?"
"글쎄요. 지금 포탈을 지지하는 마력석을 새로 보충해야 하기에 아마 한 달은 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제부터 저랬는데, 하아. 저도 난감하네요."
…낭패로군.
하필이면 어제까지는 괜찮았다는 말이 더 가슴 아팠다.
제길.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포탈을 이용할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윈디아는 마법 포탈이 없고, 아마 오르카 왕국이 있을 겁니다. 그곳의 마법 포탈은 괜찮으니 그곳을 이용해보는 건 어떠신지요."
"끙."
그 먼 거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애초에 오르카에서 포트렌까지 내려오면서 도망치듯 몬스터를 잡았던 나였기에, 다시 그 유저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가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이걸 어쩐다….
결국, 다시 올라가야 하나?
"혹시 다크울프님 아니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면서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엔 내가 아주 잘 아는, 매일 집에서 보는 젊은 처자가 하나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미도.
내 손녀였다.
…얘가 왜 여깄지?
* * *
포트렌의 번화가와는 조금 동떨어진 인적이 드문 골목길.
사람이 없는 지름길로 미도는 하염없이 걸었다.
물론 혼자 걷는 것은 아니었고, 다크울프와 단둘이 걷고 있었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후우. 침착하자.'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날 있었던 콜로세움 결승전은 엄청난 화제를 낳으며 다크울프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존재가 되었고 미도 또한 그날 결승전에서 단숨에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미도는 그날 밤 당장 다크울프의 팬카페 '늑대의 유혹'에 가입했는데, 지금은 눈팅만 하며 올라오는 사진만 보고 있지만, 그래도 팬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이곳은 어쩐 일로 오신 거세요? 혹시 마법 포탈 때문?"
다크울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엄 있는 흑색의 갈기와 날카로운 이빨이 어마어마하게 카리스마 있어 보였다.
과연, 강자다운 풍모다.
'개멋있…. 아, 아니지. 정신 차리자. 최미도.'
미도는 자신의 볼을 찰싹 때리고는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녀가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간부 오빠들과 함께 파르타 공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곧 있을 월드 대항전의 국가대표로 뽑히기 위해서는 실전 연습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파르타 공국은 그런 연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곳에는 정식으로 유저들끼리 PVP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결투장이 마련되어있었다.
특정 퍼센트까지 생명력이 감소하면 자동으로 결투가 중단되기 때문에 PVP를 즐기는 유저들에겐 인기가 많은 필수코스나 다름없었다.
승점으로 얻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들은 덤.
가뜩이나 이번에 유니온에서 올해 월드 대항전은 통합 리그로 진행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기에 그녀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로 뽑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아마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할 것이다.
"혹시 파르타 공국으로 가시는 거면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그 말에 함께 걷던 다크울프의 발이 멈칫거렸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소? 혹시 오르카 왕국으로 가는 것이라면…."
"에이. 거기까지 갈 시간이 어딨어요."
미도가 손을 내저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날아가면 되죠."
그곳에 거대한 비행선이 하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