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19화
제219화
'몽둥이라고…?'
라레투사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으며 옆에서 나타난 인간을 보았다.
그가 손에 쥔 검집에 황금빛이 아른거리더니, 일순 익숙한 몽둥이 하나가 나타났다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력(巨力)이 깃들었다.
동시에 백무열이 그것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긴 호선을 그린 검집은 무 속성의 가느다란 검기를 만들어내더니 빠른 속도로 라돈을 향해 날아갔고, 화염의 브레스를 뿜어내려던 라돈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며 그대로 검기에 얻어맞고 말았다.
콰아앙!
연기와 구름이 뒤섞이며 만들어낸 안개 사이로 라돈의 그림자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짜식이 별 것도 아닌 게 사람 놀래키고 있어."
백무열이 그렇게 내뱉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라돈은 살짝 넘어지기만 했을 뿐.
멀쩡한 기세로 안개를 뚫고 일어나고 있었고, 백무열은 입맛을 다시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이클도 그 뒤를 따랐다.
"사부님!"
"누가 네 사부냐. 이놈아!"
라레투사는 멍한 눈으로 도망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설마, 설마 저 인간은 헤라클레스와 연관이 있는 인간이었던 것인가.
어쩌면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라레투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에게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가 다가왔다.
"언니. 뭐해!"
"빨리 라돈을 재우자!"
"…어, 그래."
으득.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레투사는 이를 악물며 다시 은종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도 역시 은종을 흔들었고, 포효하며 사납게 울던 라돈은 그제야 잠든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휴우. 살았다. 그나저나 다시 라돈이 깨면 어떡하지?"
"비슷한 크기의 돌에 현혹의 구름을 덧씌워서 알로 바꿔놓자."
"아하, 역시 에리테리아 언니는 똑똑해."
"후훗. 이래 보여도 네 언니란다?"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가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라레투사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두 인간이 도망을 친 곳을 향해 날았다.
"언니?"
"언니 어디가!"
라레투사는 동생들의 부름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해서 두 인간을 찾아 다녔다.
다행히 그들은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하긴, 인간이 도망가봤자 어디까지 간다고.
그녀는 그 둘을 쫓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헤라클레스….'
과거 수백 년 전 한 인간이 이곳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헤라클레스였고, 당시 형벌을 받는 중이던 아버지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되었다.
라레투사는 강하고, 늠름하고, 터프한 헤라클레스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다.
황금 사과를 훔치기 위해 자신과 동생을 속여가며 연기를 했고, 끝내는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로 라돈마저 죽여버렸다.
다행히 라돈에겐 새끼가 있었지만, 그 라돈을 다시 기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는지 모른다.
그녀를 포함한 세 자매는 라돈을 죽게 한 벌로 수백 년간 이곳에 갇혀 지내는 형벌을 받았다.
라레투사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죽-이-고-말겠다!"
그녀의 커다란 포효가 계속해서 뛰던 백무열과 마이클의 귓가에 닿았다.
얼마나 대단한 포효인지 일순 숲이 흔들리며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년이 이젠 우리를 죽이려 드는군."
"사부님. 이제 이곳에서 나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바깥으로 나가야겠구나."
"그렇다면 결계를 부숴야겠군요. 일단 타십시오."
마이클이 자신의 모래에 올라타 손을 뻗었다.
백무열이 보기에 그 힘은 왜곡되어 사악한 악령의 등에 올라탄 것으로 보였다.
"썩 내키진 않는데."
"이게 훨씬 빠릅니다."
"어쩔 수 없지."
백무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탔고,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결계가 위치한 곳으로 내달렸다.
속도가 빨라지자 라레투사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 결계가 보이자, 마이클은 거대한 모래 주먹을 두 개 만들어 그곳으로 날렸다.
쿠웅-!
구름의 결계가 물결을 치자 마이클은 양손을 빠르게 내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오!"
쿠쿠쿠쿠쿵!
데저트 칼리버를 만들어내 순식간에 베어버릴 순 있지만, 그것은 만들어내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다.
뒤에서 죽이려고 다가오는 라레투사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이클은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계속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구름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트득.
트드득.
[미지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해집니다.]
[힘을 왜곡하여 보여주는 현상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유저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전갈궁, '안타라스'가 당신을 발견…]
마이클은 주먹을 내지르면서도 수많은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안타라스와 연결되며 더욱 많은 힘이 생겼고, 내지르는 모래 주먹에 담긴 힘은 더욱 거세어졌다.
하지만 마이클은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에 가장 눈길이 갔다.
무엇보다도 스승이 될 검성의 얼굴이 궁금했으니까.
그는 옆으로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그곳에 웬 익숙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이 사람은…?'
백무열의 손에 있던 검집이 황금빛에 휩싸이며 거대한 몽둥이로 변모했다.
이것은 저번에도 겪었던 헤라클레스의 성유물 '올리브 나무 몽둥이'.
백무열은 헤라클레스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입꼬리를 이죽거렸다.
"그러게 내가 검성인지, 검정인지 아니라고 했잖아."
구름의 결계로 뛰어오른 그가 몽둥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파아아앙-!
거대한 힘의 파장이 구름의 결계를 뒤흔들더니, 이내 무너뜨리며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결계의 파편들을 보며 마이클은 충격에 휩싸였다.
* * *
나는 일행들과 함께 오르카 왕국의 번화가를 걸었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유저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넓어서 이곳을 모두 돌아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이틀 정도 걸리려나?
"그래서 공작님을 만나면 최대한 잘 보이는 게 좋아. 알았지? 그러면…."
함께 걷던 에드워드는 어깨에 가득 힘을 주며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에 대해 설명을 주절거렸다.
지금 향하는 곳은 오르카 왕국에서 권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듀크 공작이 있는 곳.
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내린 곳에서 그곳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며 걷고 있었다.
물론, 나는 현재 얼굴을 드러낸 상태이기에 알아보는 유저들은 없었다.
그저 웬 할아버지 유저가 있으니 신기하게 쳐다볼 뿐.
"그래야 최대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 잭슨! 듣고 있어?"
양 볼을 한가득 부풀린 에드워드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손녀인 서희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하마터면 꼬집을 뻔했다.
"아, 예. 듣고 있습니다. 잘 보여야 높은 지위를 준다구요."
"에헴. 그래, 맞아."
에드워드가 다시 입을 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귀찮아서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대충 설명하자면 이랬다.
지금 만나러 가는 듀크 공작은 불사의 인간들에게 지위를 내리는 일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최소한 '준남작'보다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불사의 인간들에게는 준남작의 지위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다 온 것 같군요."
케레노스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과연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포트렌의 저택보다는 작았지만, 그 규모나 품위로만 따지면 오르카 왕국의 저택이 훨씬 더 기품 있게 느껴지는 듯했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우리를 막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약속을 하고 왔어."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에드워드 폰 샤를."
한 경비병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확인하더니, 우리를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그래. 공작님 어디 계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안내에 따라 듀크 공작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에드워드가 이곳에서 귀족으로서 제법 대우를 받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나는 기품 있는 장식이 달린 문 앞에 섰다.
에드워드와 케레노스는 귀빈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었고, 나는 괜스레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자 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엔 예상대로 흰머리에 흰 수염을 가진, 조금 뚱뚱하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노인이 있었다.
에드워드의 설명이 맞다면 그가 바로 오르카 왕국의 2인자인 듀크 공작이었다.
현재 그는 맞춤옷을 하나 하려는지 치수를 재는 중이었고, 그가 양팔을 벌린 채 고개를 돌리더니 넉살 좋은 인상으로 말했다.
"그대가 에드워드 백작이 보증을 서겠다고 한 자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
"흠. 생각보다 나이가 많군?"
이곳에 오기 전 윈디아에서 간단한 프로필을 작성해 보냈다고 들었다.
그는 아무래도 그것조차 읽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근데 좀 열 받는데.
나이가 많은 게 죄인가?
자기도 나이 많으면서.
하여튼 정치인 놈들은 다 재수가 없다니깐.
"자넨 이만 나가보게. 옷은 알아서 이쁘게 만들어 주겠지?"
"예. 물론이지요. 공작 전하."
치수를 재던 디자이너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동시에 놀랐다.
"너…?"
"브라더?"
그는 바로 오르카 왕국으로 갔었던 드레인이었다.
* * *
백무열과 마이클은 어렵사리 결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곳은 헤스페리데스의 북쪽에 위치한 용암지대였고, 다행히 라레투사가 밖으로 나와 쫓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계 안에서 외친 한 마디는 백무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헤라클레스. 널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 거야아아아-!'
그 한 마디에 헤라클레스의 메시지가 요동치는 것을 느낀 백무열은 둘 사이에 무언가 조금 더 깊고 진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은 살았다는 게 중요했다.
백무열은 주변의 열기에 땀을 닦으며 타다만 나무에 기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크하아. 좋다."
그 모습을 마이클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이클은 여전히 눈앞의 할아버지가 '백무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또한 콜로세움 경기를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였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아닌가.
노인이 높은 경지의 검술을 쓴다는 건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의 경지를 가진 인물일 줄은 마이클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눈앞의 할아버지를 지고한 검성(劍聖)으로 오해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마이클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밀려오는 민망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한숨 쉬지 마라. 복 나간다. 쯧쯧."
백무열이 그런 마이클을 보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마이클은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조금 놀라운 메시지가 떴다.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마이클이 첫 후계자였다고 말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