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04화
제204화
조셉과 이야기를 마친 나는 곧장 숙소를 나와 근처에 자리한 공원을 거닐었다.
수정이를 포함한 일행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조셉은 다시 할 일이 있다며 은신을 쓰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고, 나는 아까 전 있었던 녀석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직접 만나서 얘기 드려도 되겠습니까?'
'직접? 실제로 보고 싶다는 얘기냐?'
'예. 꼭 직접 뵙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저에게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라서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군."
처음엔 그저 몰래 사진이나 찍으며 돈이나 밝히는 순박한 쌍둥이 아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조셉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뭐, 그렇다고 사람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숨기는 게 있다는 건 꺼림칙한 게 사실이었다.
"수장을 데려오겠다라…."
아까 전 그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니, 아르고스의 수장 또한 데려올 것이라고 했었다.
그동안 아무도 수장의 이름이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내가 최초로 보게 될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썩 달갑진 않지만 어쨌든 엄청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다.
숨어지내던 아르고스의 머리까지 모습을 드러낼 정도면 말이다.
"약속은 앞으로 4시간 뒤인가."
현실 시간으로는 약 1시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고, 내가 캡슐에서 나올 때쯤 전화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일단 무슨 말을 할지는 들어보면 알겠지.
"거. 우리 영감님이 쉽게 죽을 분이 아니라니까."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역시 성찬이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니까."
"으이그. 좀 조용히 해요. 여기까지 와서도 그 얘기에요?"
멀리서 투닥거리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었음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엔 묵사발이라는 녀석과 백성찬의 대화였고, 마지막에 잔소리하는 여인은 분명 김수정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엇. 아버님. 결승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제일 먼저 김수정과 백성찬이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왔고, 나는 곧장 백성찬을 향해 말했다.
"무열이는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엇, 혹시 연락되세요? 귓속말이 안 되던데."
"아니. 나도 아직 안 된다."
"흐음."
"그놈 표정을 보니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가상의 게임일 뿐이잖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백성찬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이 친우인 무열이 녀석을 닮아있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어렸던 녀석이 이렇게 사내대장부가 되다니, 새삼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감개가 무량해진다.
"아버지…?"
움츠러든 최정현이 김수정의 뒤에 숨어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놈은 여자 등 뒤에 숨어서 뭘 하는 게야.
수정이한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하여튼 쯧.
"둘째, 이리 와라."
나는 녀석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최정현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왜 그러고 있냐? 내가 어렵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진짜 그 '다크울프'세요? 정말로?"
왜 그러나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나.
"그래, 맞다. 왜."
대답과 동시에 가면을 벗어 인벤토리로 던져버렸다.
쓸 때마다 느끼지만, 가상임에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단발의 흰머리가 찰랑거리며 떨어졌고, 나는 익숙하게 머리끈을 꺼내 뒤로 묶었다.
최정현이 그 모습에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억?! 맙소사…! 진짜였어!"
이 자식 왜 이래?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아까부터 정현 씨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어요. 커뮤니티에 있는 다크울프 영상을 보며 엄청 부러워했거든요. 또 멋있다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얼마나 그러던지."
김수정이 주저앉은 최정현을 웃으며 바라봤다.
내가 보기엔 철부지 어린애 같은데, 김수정의 눈에는 제법 귀여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아 보이니 다행이군.
"아버지. 왜 정체를 숨기세요? 그냥 시원하게 가면 벗으시면 엄청 떼돈을 버실 것 같은데?! 그 돈으로 저 좀 도와주시면…."
빠악!
나는 시원하게 최정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놈의 자식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네.
확 그냥 앞마당에 묻어버릴까 보다.
"시끄럽다. 다른 가족들에겐 비밀이다. 말하면 네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
"힉?!"
나는 최정현을 향해 단단히 못을 박고는 김수정에게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구나. 메테우스로 가 있거라."
"아, 그러세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저희 먼저 메테우스로 가 있을게요. 있다가 봬요."
"그래. 이따가 보자."
나는 김수정의 인사를 받으며 로그아웃을 눌렀다.
최정현은 여전히 뒤통수가 아린지 문지르고 있었다.
* * *
아렌의 저택에 자리한 비밀 아지트.
며칠 전 각 귀족들과 수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이곳에 한 남자가 온몸이 묶인 채 잡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에이단.'
현 포트렌의 상왕 후보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이었다.
"……."
그리고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라이벌인 아렌.
그는 처참한 몰골로 사로잡힌 에이단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익…. 이거 풀어! 풀란 말이야!"
사지가 결박당한 에이단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밧줄을 풀 수 없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자의 정체는 아렌.
그는 이 정체 모를 비밀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에이단은 바로 옆에 선 군인을 보았다.
'저항군의 수장!'
에이단은 한눈에 그의 정체가 막대한 현상금이 걸린 저항군의 수장 '레슬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까 전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영감탱이를 잡기 위해 매복을 했고, 각종 공격을 퍼부으며 광소를 짓던 순간 날아들던 소용돌이 총알의 궤적.
지금 떠올려 보면 그것은 레슬리의 특기인 나선형 마탄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런 레슬리와 함께 있는 아렌은….
"아렌…! 네가 바로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였구나! 네가 어찌 감히…!"
"……."
하지만 그럼에도 아렌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볼 뿐이다.
옆에 있던 레슬리는 계속해서 부추겼다.
"아렌 공. 죽여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얼굴을 봤지 않습니까."
아렌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말하는 레슬리를 보았다.
그의 한쪽 눈은 광기에 찬 듯 살기로 번들거렸다.
사실 그건 아렌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레슬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사라'.
그녀는 헬레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인 아델리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아버지는 저항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해 직접적인 탄압을 지시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저항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헬레나 또한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초래한 원흉이 지금 눈앞에 있다.
사랑했던 아내는 당시 아버지의 밑에 있던 에이단의 고발로 인해 붙잡혔으니까.
또 그런 아버지를 배신해 쓰러지게 만든 원흉 또한….
"아렌 공."
레슬리의 뜨거운 눈빛에 아렌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살하시오."
"…고맙소이다."
그 말과 동시에 당황한 에이단이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만. 이봐! 지금 무슨 짓을…!"
레슬리가 허리춤에 있던 권총을 빼 들었다.
그는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탄창을 빼더니, 목걸이로 하고 있던 은색 총알을 분리해 한 발 장전했다.
철컥철컥.
그리곤 살기 어린 눈으로 에이단을 노려봤다.
"에이단."
"저, 저리 가!"
"넌 기억할지 모르지만, 네가 수입해온 총이 신기하니 시험해본다며 내 아내를 죽였었다. 기억하나?"
"그, 그런 거 알게 뭐야!"
"그래…. 기억할 리 없겠지. 아니, 하지 마라. 네놈처럼 추악한 놈의 머리에 그날 일이 남아 있었다면 기분이 더 나빴을 것 같다."
레슬리가 에이단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었다.
그의 한쪽 눈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그동안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에이단을 잡기 위해 수많은 기회를 엿봤지만, 그의 사병들 때문에 그럴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복수할 기회를.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넌 모를 거다. 지금 내가 장전한 이 총알이 뭔지 아나? 네가 내 아내를 죽일 때 썼던 3발의 총알을 녹여 하나로 만든 것이다."
"미, 미친! 아렌! 이봐 아렌! 돈이 필요해?! 그래서 이러는 거야? 돈이라면 주지. 다 줄게! 아니면 상왕이 되고 싶은 건가? 좋아. 내가 양보할게! 양보한다고! 그러니까 이것 좀…."
"끝까지 추악하구나. 지옥으로 떨어져라."
타아아아앙-!
소란스러운 총성이 울린 직후에 남은 것은 오래된 침묵이었다.
머리를 관통당해 쓰러진 에이단은 입에 피거품을 문 채 쓰러졌다.
아렌과 레슬리는 차가운 시선으로 에이단의 주검을 보았다.
총구에서 나온 매캐한 냄새만이 방안에 가득 남았다.
* * *
그 무렵.
나는 조셉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여깁니다. 어르신."
한적한 카페의 구석에 자리 잡은 조셉은 나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 그와 악수를 나눴다.
조셉은 가상현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얼굴이었는데, 오히려 가상의 세계에서 입던 옷이 아닌 현대 세상의 옷을 입으니 더 훤칠하고 말끔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쨌든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이렇게 보니 새롭구만. 최춘택일세."
"알고 있습니다. 조셉 리입니다. 그냥 편하게 조셉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앉으시죠."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본명을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시 떠올려봤지만 진짜 없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저희 아르고스의 멤버 중 절반은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뭐야? 그럼 내 뒤를 캔 거냐?"
"…뭐.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좁히며 조셉을 노려봤다.
설마 뒤에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능구렁이 같은 놈 같으니라고.
"왜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의 뒤나 캐고 다니는 거냐. 스토커냐?"
"하하하. 제가 아직도 그런 변태로 보이십니까?"
"그럼 아니냐?"
"아닌데요."
"…맞는데."
"하아. 이거 참 단단히 오해를 사버렸네."
조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시답잖은 얘기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뒷조사를 당해 불쾌해진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미 내 표정은 쓰레기봉투처럼 구겨져 있었다.
"날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냐. 그리고 그 수장이라는 놈은 어딜 간 게야? 그 망할 놈 면상이나 좀 보자."
"화 많이 나셨습니까?"
"안 나게 생겼냐? 썩을 놈들이 내 뒷조사나 하고 다니고 말이야. 내가 네놈이랑 이런 얘기나 하자고 온줄 알아? 나는…."
그와 동시에 조셉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가 손을 치우자 드러난 것은 익숙한 것이었다.
아까 게임 속에서 보았던 아르고스를 상징하는 3개의 눈이 그려진 패.
하지만 그곳에 써진 숫자는 아까 내가 본 조셉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탁자 위에 놓인 패에는 '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아르고스의 수장. 조셉이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