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03화
제203화
내가 앞으로 나서자 옆에서 견소룡이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나와 나란히 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고 견소룡 또한 그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정말 오랜만에 하는 거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툭.
우리는 서로의 주먹을 맞댔다.
[새로운 성단이 열렸습니다.]
머리 위에 떠오른 작은 별 하나.
이것은 나와 견소룡이 같은 성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당신에게 손을 흔듭니다.]
"오랜만이다. 천둥벌거숭이."
[주먹성, 레이트라가 당신이 부른 별명을 싫어합니다.]
"싫으면 시집가라."
[주먹성, 레이트라가 자신은 암컷이 아니라며 화냅니다!]
"형님. 농담은 그만하시고 슬슬 준비하시죠. 곧 달려올 것 같습니다."
견소룡의 만류에 곧장 앞을 바라보았다.
에이단의 병사들은 우리들을 둘러싼 채,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오랜만의 상봉인데 농담 따먹을 시간도 없구만. 빌어먹을.
"레이트라. 형님에게 힘을 드려라."
[주먹성, 레이트라가 입을 삐죽 내밀며 싫다고 말합니다.]
"어서."
단순 무식해서 놀려먹기 좋아서 그렇지, 사실 레이트라의 성격은 착한 편이었다.
몇 번 튕기던 레이트라는 이내 손쉽게 힘을 허락했다.
옅은 보랏빛 영성(靈星)이 내 몸을 감싸 안더니 이내 푸른 번개가 흐르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이, 이 힘은…?"
당황한 NPC 하나가 말을 더듬었고, 동시에 옆에 있는 견소룡 또한 푸른 번개를 발산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몇몇 유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둘이 같은 힘을 쓰는 거지…?"
"저게 가능한 건가?"
말해줄 의무는 없었다.
콰르르릉-!
나는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전신을 감싼 푸른 번개는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듯 한계 이상의 속도를 끌어올렸다.
견소룡 또한 마찬가지.
녀석은 엄청난 속도의 번개 주먹으로 적들을 격퇴하고 있었다.
"으아악!"
"막아!"
"너무 빨라!"
아무래도 빌려온 힘인지라 절반의 힘밖에 내지 못했던 나는,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는지 적들이 나를 향해 다양한 궤도로 무기를 찔러왔다.
하지만 내겐 초감각이 있었다.
궁수들의 화살은 빗나가기 일쑤였고 마법은 아군을 다치게 할 위험 때문에 발사하지도 못했다.
나는 적들의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춤을 추듯 피해냈다.
어느새 내 다리엔 해 오름의 불꽃이 타올랐고, 두 다리에 푸른 번개와 태양이 머무는 광경은 적들이 겁을 집어먹기엔 충분한 모습이었다.
"뭐해! 새끼들아! 네놈들도 공격해!"
어느새 거미줄을 걷어낸 에이단이 멀뚱히 서 있는 최불룡을 재촉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에이단을 먼저 잡을까도 싶었지만, 이미 그는 마법사들에 의해 2중, 3중으로 된 보호막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되려 내가 당할 것 같아서 그냥 포기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최불룡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놈이 고개를 끄덕이자 불룡파 놈들이 에워쌌다.
확실히 이런 개싸움을 많이 겪어본 놈들이라 그런지 다른 녀석들과는 재는 타이밍이나 포위 방법이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하여튼 귀찮은 놈들."
마음 같아서는 로믈라나가 준 흑야랑들을 소환하고 싶은데 그것은 단기전에서나 좋지 지금 같은 장기전에서 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뭐, 사실 부작용 때문에 안 쓰는 게 컸지만.
그런데 그 순간.
타아아아아앙-!
멀거니 들려오는 거대한 총성이 귓전을 때렸다.
나는 초감각이 발동되어 있었기에 바람을 가르며 이곳을 향해 쇄도하는 총알의 궤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어깨를 지나 정면에 있던 불룡파 조직원의 머리통에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게 만들었고, 뚫고 지나간 그것은 또다시 뒤에 있던 적을 두 명이나 꿰뚫으며 로그아웃시켰다.
그 엄청난 위력에 나는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또 뭐야!"
최불룡의 외침과 동시에 또 한 번 총성이 울렸다.
나선의 궤도를 그린 총알이 그대로 최불룡의 어깨에 틀어 박혔다.
"크악!"
"큰형님!"
"미친! 야비하게 총질을…!"
탕! 탕! 타앙!
세 번의 총성이 울렸고, 갑자기 나타난 불룡파의 일원이 최불룡의 앞을 방패로 막아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총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방패를 꿰뚫더니 불룡파 놈들을 두 명이나 더 로그아웃 시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군인 건 확실하다.
"이런 씨…! 퇴각한다."
"퇴각한다!"
한불이의 외침에 불룡파 전원이 발을 빼듯 뒤로 빠졌다.
나와 견소룡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에이단에게 고용된 자들 또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단은 최불룡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바빴다.
"야! 누구 마음대로 빼래! 너 이 새끼 지금 하는 사업…!"
"개새끼가 겁나 시끄럽네."
"뭐, 뭣…?!"
총을 맞아 왼손을 들 수 없는 최불룡이 오른손으로 대검을 들었다.
그는 들고 있는 대검에 하얀 불꽃을 휘감고는 에이단의 마차를 향해 휘둘렀다.
빠르게 날아간 화염의 검기가 폭발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앙-!
연기가 걷히자 보인 것은 가마에서 떨어진 에이단의 처참한 몰골.
안타깝게도 가마를 들던 자들은 모두 화마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최불룡은 에이단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네놈과는 끝낼 생각이었어. 병신아."
"저, 저런…!"
그 말을 끝으로 최불룡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에이단은 노기 서린 눈으로 그런 그의 뒤를 향해 손가락질할 뿐이었다.
그렇게 불룡파가 물러나자 이곳은 약간의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 모욕스러운 발언과 치욕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에이단은 소리쳤다.
"공격해라. 공격해!"
에이단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돈을 준다니까!"
처절하게 외쳐봤지만, 아무도 말을 듣는 이가 없었다.
아마 그들 또한 돈보다는 목숨이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도망가면 살려준다."
그러자 에이단의 사병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중 몇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도망자들이 속출하자, 에이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거, 거기 서라. 서라고! 날 데리고 가. 이 멍청이들아! 5천만 달러를 준다니까!!"
그 말에 웬 유저 하나가 멈칫거리더니, 에이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와 에이단을 번갈아 보더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
"스읍."
그저 입으로 바람 소리를 냈을 뿐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뭐, 예를 들면 '움직이지 마라.' 라던가.
'너도 죽이겠다.' 라던가.
'후회 안 해?' 라던가.
아무튼 기타 등등.
"죄, 죄송합니다!"
그 유저는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하긴, 어차피 에이단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 자체가 가망이 없는 이야기다.
거기다가 뒤에는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저격수가 노려보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새 손을 턴 견소룡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마침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것은 은신을 풀며 나타난 두 인영.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실력은 여전하시네요. 어르신."
카메라를 손에 거머쥔 조셉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 * *
숙소에 도착한 나는 조셉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견소룡은 잠시 볼 일이 있다며 어딘가로 가버렸다.
"하하. 이거 괜히 끼어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조셉이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와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잘 나서주었어."
"다행이네요."
사실 조금 열 받아서 화풀이는 필요했지만, 그래도 괜히 다른 이들까지 미운 것은 아니었다.
불룡파는 스스로 발을 뺐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고, 그나마 아까 사로잡은 에이단의 뺨을 한 대 후려친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 직후.
에이단은 한쪽 눈에 안대를 찬 중년의 군인에게 기절당해 끌려가버렸는데,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그에 대한 정체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보통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까 총 쏜 건 그 군인이었냐?"
"네. 맞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죠? 하하."
조셉이 또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도통 이놈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어째 이놈의 뱃속에는 능구렁이 백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는 생각만이 더욱 커져 갔다.
"너. 대체 진짜 정체가 뭐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기 있습니까? 곤란한데."
"저런 실력을 가진 거물 NPC가 너와 친한 것도 그렇고, 저번에 말했던 스타 프루츠를 주겠다는 이유는 또 뭐냐. 그 저항군이라는 것도 그렇고. 넌 대체…."
"잠깐. 잠깐만요. 천천히."
손바닥을 내저은 조셉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곤 다시 말했다.
"하나씩 알려드리죠. 제가 누구이고, 아까 그 NPC가 누구인지. 그리고 스타 프루츠를 주겠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부요. 어디 보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요…."
조셉이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이야기는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아까 말한 그 군인의 정체는 조셉이 말했던 저항군들의 총사령관이라고 한다.
이름은 '레슬리'. 아까 본 저격 실력을 다시 떠올려 보니, 과연 저항군을 이끌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늘 관객석에서 내 실력을 보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왔는데, 나에게 저항군의 거처에 대해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건져서 돌아간 상태였다.
당연히 그 수확의 정체는 '에이단'이고.
어쨌든 그가 아렌이 말했던 저항군의 일원이라면 언젠가는 또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조셉의 정체는….
"아르고스…?"
"네. 들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꽤 유명한 비밀 정보 조직인데."
"난 커뮤니티를 안 하니까."
"그러시군요. 어쨌든 꽤 유명합니다. 뭐, 좀 비싸긴 하지만 일 처리도 확실하죠. 저희는 1~99번대의 번호를 가지고 활동을 합니다. 소수정예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정보원들만 있죠. 아르고스의 수장은 0번의 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흐음…."
아르고스는 아렌이라는 NPC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계기로 아렌과 칼슈타인 저항군, 그리고 아르고스는 암묵적인 동맹 관계라고 한다.
뭐, 사실 이런 암묵적인 관계는 금방 깨지기 마련인데 의외로 오래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그만큼 서로의 신뢰가 두텁다는 얘기일 테니까.
"넌 번호가 몇 번인데."
"99번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조셉이 보라는 듯 품에서 3개의 눈동자가 그려진 패를 꺼내 보였다.
그곳에는 '99'라는 숫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고, 딱 보니 아르고스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자. 내게 스타 프루츠를 주겠다는 이유는…?"
묵묵하게 보던 조셉이 입을 열었다.
"그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