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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02화 (202/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02화

제202화

경기가 끝나고 30분이 흘렀다.

관객들의 환대를 받으며 인사를 마친 나는 미도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내가 그를 보며 갸우뚱하자 귓속말이 도착했다.

- 견소룡: 오셨습니까. 저랑 싸웠던 친구를 보려고 왔습니다. 손녀 분이 계시니, 전 계속 모른 척하겠습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엔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상체를 일으킨 채 앉아있는 미도가 보였다.

그 옆에는 견소룡이 보러 왔다던 김현우가 떡 하니 앉아있었는데,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호랑말코 같은 놈은 왜 여기서 알짱거리는 게야.

"엇,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미도가 나를 발견하자 인사했고,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그들을 제지하며 다시 앉아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냥 앉아있으시오."

오면서 헬륨 슬라임의 핵으로 목소리를 바꾼 상태였기에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사실 아까 먹었을 때, 여자 목소리가 나오는 바람에 나는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이곳에 오게 된 상태였다.

지금의 내 목소리는 30대 후반쯤 되는 중후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몸은 좀 어떠시오."

"많이 좋아졌어요.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일어날 참이었어요."

"음, 다행이군."

"NPC들에게 얘기 들었어요. 절 구하시느라 굉장히 고생하셨다고…."

그녀의 시선이 내 오른손에 감긴 하얀 헝겊으로 향했다.

피가 묻어나 이미 조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아까 그 상처는 다 치료가 된 상태였다.

포션을 뿌리니 조금 따끔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차마 지금 묻은 피의 대부분이 그 망할 삐에로 놈의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미도가 내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이 손이구나."

미도는 천천히 헝겊을 풀더니, 내 손바닥에 길게 남은 상처의 흔적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힝."

"난 괜찮은데."

"뭐예요. 아직 상처가 남아있으면 제가 치료를 해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다 치료돼서 멀쩡하잖아요. 좀만 늦게 치료하지. 치…."

그녀의 말에 나는 가면 속에서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툴툴거려도 제법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나는 늘 밝은 모습만 봐왔기에, 지금 이런 손녀의 모습은 낯설지만 새로웠다.

그마저도 이쁘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에이, 그 삐에로 미친놈 때문에 하여튼…."

"오빠. 고운 말!"

찰싹!

미도가 김현우의 허벅지를 때렸다.

김현우는 지퍼를 채운 것처럼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는 내심 속으로 고운 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좋아할 것 같으니까.

…아, 맞다. 그걸 잊을 뻔했네.

나는 그녀 몰래 손가락에 낀 솔로몬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솔로몬의 반지가 '판결의 눈'을 준비합니다.]

푸른빛이 일렁이자, 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반지를 감싸 쥐었고.

[반지가 유저 '미도'님을 관찰합니다.]

반지는 미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듯이 그녀를 훑었다.

나는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과연 미도의 마음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결과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도가 좋아하는 이성은 유저 '제임스'입니다.]

* * *

[해당 유저는 현재 사망한 상태입니다.]

[귓속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김제복 이 미친 새끼가 결국…."

김제복에게 귓속말을 보냈던 최불룡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말을 안 들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김제복은 더 이상 자신을 따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하는 건가.

"큰형님. 왜 그러십니까."

"…김제복이 죽었다."

"예? 하여튼 그 또라이 새끼 진짜. 어휴."

불룡파의 부두목 한불이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늘 김제복이 못마땅했다.

껄렁거리는 태도 또한 그랬고, 존경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싹수없는 말투 또한 그랬다.

그로서는 김제복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지금 그에겐 기회가 찾아온 상황이었다.

"큰형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김제복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를 따를 놈이 아닙니다. 차라리 저희가 먼저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사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김제복은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놈이 있으면 확실히 자신들의 전력이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래. 이 일을 마치고 곧장 김제복을 친다. 애들한테는 미리 얘기해두도록 해. 피해는 없이 사로잡아야 할 거 아냐. 저래 보여도 그놈 전국구 칼잡이야."

한불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멀어지는 한불이의 등을 보던 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는 다 끝났나?"

"…오셨습니까."

말을 걸어온 남자는 에이단이었다.

그는 조선 시대에서나 볼 법한 양반들이 타는 가마에 앉아있었는데, 도대체 왜 저러고 다니는지는 최불룡으로서는 의문이었다.

에이단의 가마를 들고 있는 하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서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경기는 어떻게 됐지? 네가 심어놓았다던 그자 말이야."

"아, 이겼답니다."

"오, 그래? 크하하하하! 그거 꼴 좋구만! 하하하하!"

에이단의 광소가 하늘을 찔렀다.

최불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김제복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말해봤자 자신에겐 좋은 일도 없을뿐더러,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담배 사업장에 피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흐흐. 잠깐, 그럼 지금 우리가 매복을 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 아닌가? 어차피 그놈은 죽었을 테니 말이야."

화들짝 놀란 최불룡이 말했다.

"아, 그게…. 이기긴 했는데, 장외로 떨어지는 바람에 죽이는 데는 실패했답니다."

"뭐야?! 으음, 아니지. 그래도 지금 우리가 공격하면 그 영감탱이에게 두 배로 굴욕을 줄 수 있는 거겠지? 후후. 좋아 마음에 들어. 크하하하."

에이단이 또 한 번 미친놈처럼 웃었다.

소문에 의하면 요즘 더욱 미쳐 날뛴다는데 진짜인 것 같다.

그나저나 확실히 상왕 후보자라 그런지 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최불룡은 에이단의 뒤로 서 있는 그의 사병들을 보았다.

그곳엔 현상금을 얻기 위한 NPC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드문드문 유저들도 보였다.

그들은 에이단이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자들이었다.

듣자 하니 영감탱이를 사로잡을 경우, 5천만 달러를 준다고 한다.

사실 최불룡 또한 돈이 탐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일단 시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그 경기를 지켜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쯧쯧. 불쌍한 놈들.'

앞으로 벌어질 일조차 모른 채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최불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한편, 나는 견소룡과 함께 선수 전용 비밀 통로로 조용히 빠져나왔다.

사회자는 우리 둘을 불러서 사흘 뒤 오후 1시에 결승전을 할 예정이니 늦지 않게 오라고 했는데, 다행히 시간은 좀 넉넉히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알았다고 했고, 그렇게 헤어졌다.

관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김수정을 포함한 일행들은 사람이 많아서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기에, 나는 이따가 숙소 앞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길게 이어진 숙소로 향하는 길을 나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한 새소리와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음? 아니다."

"아닌 게 아닌데요."

"흐음…."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엄청 복잡한 상태였다.

아까 전 미도에게 썼던 '판결의 눈'이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띄웠기 때문이다.

나는 아까 그 메시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미도가 현재 좋아하는 이성은 '제임스'라는 유저라고.

…제임스가 누구야 대체. 혹시 미도가 외국인을 만나고 있는 건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아닐 거라는 상상의 나래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졌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민다.

미도야 넌 대체 누구를 만나는 거니.

"소룡아."

"예. 형님. 말씀하십쇼."

"혹시 제임스라는 놈 아냐?"

"제임스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그게 누구입니까?"

"…나도 모르지."

나는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젠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만약 미도가 외국인과 결혼하고 싶다고 데려오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새삼 외국인 손녀사위가 생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상상을 떠올릴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다.

…뭐하는 놈일까.

대체 어떤 망할 놈이 미도를 꼬여냈는지 면상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겐 그럴 방법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미도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마음속에 가득한 이 울화를 풀지도 못한 채 입술만 질겅질겅 씹었다.

그리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뭐냐. 이놈들은."

갑자기 떼거지로 나타난 NPC와 유저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거머쥔 채, 우리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견소룡이 피식 웃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군은 아닌데요."

"그럼 다 죽여야지."

그리고는 구름 같은 인파를 가로질러 웬 가마 한 대가 나타났다.

갑자기 웬 사극 드라마인가 싶은 심정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하인들은 가마를 받치고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있었다.

"큭큭. 오랜만이지?"

그는 바로 에이단이었다.

망할 놈의 면상을 보니 더 열이 받는 것 같았다.

오늘 저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든가 해야겠다.

그리고 옆에 최불룡….

하아, 저놈과 나는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보다.

참 껌딱지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이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이봐.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 겁먹었나? 후후. 그래. 그럴 만도 해. 내가 널 죽이기 위해 이 많은…."

퓨웃-.

곧장 에이단의 면상에 대놓고 거미줄을 쏘았다.

"읍! 이 씹. 이거 뭐야! 아윽. 이거 떼봐. 떼보라고 이 새끼들아!!"

에이단이 소리치자 가마를 내린 하인들이 그의 얼굴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놈이 굳이 설명 안 해줘도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에이단은 "퉤퉤."거리기 바빴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주변의 병사들이 하나씩 무기를 빼 들었다.

"쫑알쫑알 나불대지 말고 덤벼라."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이곤, 입에 꼬나물었다.

"이 시부럴 놈들아."

고운 말 쓰기로 했는데.

다 글러 먹었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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