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01화
제201화
꿈을 꿨다.
일렁이는 횃불이 일직선으로 어둠을 밝혔고, 그녀가 있는 곳은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의 동굴이었다.
미도는 그곳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녀는 이곳이 꿈인 것을 알았기에 겁나지 않았다.
[당신은 현재 '악몽'을 꾸는 중입니다.]
[상태 이상 '공포'에 걸렸습니다.]
[죽거나 해독이 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꿈을 꿉니다.]
하지만 꿈인 것을 알아도 엄습해오는 본능적인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평소 남자들처럼 온갖 강한 척은 다 해대며 으스대고는 있지만, 그것은 그녀가 강한 척하려 일부러 애쓰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남자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사실 미도는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딱 한 번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미도는 그를 짝사랑했고,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도는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인 줄 알았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이런 거구나 하는 심정을 느끼면서….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다른 여자 생겼어. 너 이제 질린다.'
그 짧은 한마디의 상처를 마음에 새겨놓고, 그 남자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미국으로의 유학.
미도는 그가 너무 미웠지만, 또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유학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으면서.
어째서 지금 그 남자가 생각나는 걸까.
잊어야 하는 남자였지만, 미도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다.
스스스스스슷-.
소름 끼치는 오싹한 소리가 땅바닥에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미도는 저 멀리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두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가 밀려오고 있었다.
스으으으으읏-.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작은 거미 떼들이었고, 미도는 그 끔찍한 악몽의 거미들을 피해 계속해서 도망쳤다.
동굴에 걸린 횃불을 들고 위협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계속해서 도망치던 그녀는 결국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 또한 없단 사실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미도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아우우우우-!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졌다.
미도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저 멀리 흑색 늑대 한 마리가 거미 떼를 가로질러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거미들은 강력한 살기를 뿜어내는 늑대의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했고 마침내 자신의 앞에 도달했다.
미도는 늑대의 눈을 보면서도 오히려 더욱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고도 편한 느낌에 그녀는 오히려 심신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이내 늑대는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아 누웠고, 미도는 그 푹신한 털을 쓸며 단잠에 빠졌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에게 상처 입히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리고 눈을 떴다.
"으음…."
"미도야 정신이 들어?"
부상의 치료를 끝내고 미도의 옆을 지키던 김현우가 미도를 불렀다.
미도는 눈을 몇 번 껌뻑이며 천장을 보더니, 이곳이 처음 보는 곳임을 깨달았다.
"여긴…?"
"대기실 옆에 있는 병실이야."
"아…."
"너 정말 위험했어. NPC 사제들이 그러는데, 온갖 해독제가 안 들어서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대. 그 사람 아니었으면 정말 그냥 죽었을 거야."
"그 사람…?"
"아, 너 잘 모르는구나."
김현우가 병실에 위치한 조그만 수정구슬이 띄운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많은 이들이 환호를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을.
미도는 김현우가 아무 말 하지 않았음에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저 사람이 단검으로 자기 피를 뽑아서 해독제를 만들었데. 진짜 고생했나봐. 이만하길 다행이야. 죽었으면 레벨도 엄청 떨어졌을 텐데 다행이지 뭐."
"아, 그렇죠…."
미도는 김현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금 화면에 나오는 한 사람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아까 자신이 만났던 그 흑색의 늑대가 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꼭 이기세요.'
* * *
무대에 오른 나는 수많은 관객의 환호성을 들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같은 말을 소리치고 있었다.
'다크 울프'라는 말.
이제는 날 상징하는 말이 된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연호하고 있는 것이 아직은 어색했다.
…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나는 어차피 저들을 잘 모르고, 저들도 내 정체를 모른다.
방송국 놈들이 내 모습을 찍는 건 썩 달갑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눈앞에 서 있는 저 망할 삐에로 놈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몹시 뿔이 난 상태다.
-그럼 지금부터 4강전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양 선수 자리로.
나와 매드독은 무대의 중앙에 섰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를 응시했다.
어디를 어떻게 먼저 공격해야 할까, 하는 머릿속의 계산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난 저놈을 쉽고 간단하게 이길 생각이 없다.
최대한 괴롭히면서 고통을 준 다음, 끝을 내버릴 작정이다.
-시작!
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선공을 한 것은 매드독이었다.
녀석은 마력으로 잘 벼려낸 예리한 단검을 빠른 속도로 던졌다.
어떤 것은 두 개를 동시에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녀석의 단검을 피해내며 태양의 춤을 췄고, 양발에 피어난 '해 오름'의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매드독은 공격을 멈춘 채, 내게 물었다.
"어이. 대체 나한테 왜 그래? 왜 시비야? 엉? 나한테 복수할 거라도 있어? 항?!"
"……."
나는 가볍게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경기장의 주변을 원을 그리며 돌았고, 매드독 또한 나를 따라 반대로 돌았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응시하기만 했다.
"왜 말을 못해. 벙어리냐? 이 미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매드독의 욕설이 방송을 타고 있었다.
나는 그저 가면 속에서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다.
저놈이 저러는 것은 내 심리를 흔들려는 것이 커 보였다.
나는 그저 무심하게 포크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궤변은 그만 늘어놔라. 단검에 꽤 자신이 있나 보지?"
"그렇다면 어쩔 건데? 왜 한 판 붙어볼래?"
"안 될 것도 없지."
나는 포크 숟가락을 역수로 쥐며, 매드독을 향해 달렸다.
매드독은 코웃음을 치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 둘은 각자의 무기를 맞부딪히며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고, 나는 곧장 하단 돌려차기를 해서 놈의 다리를 걸었다.
다리를 들어 피해낸 매드독은 순간 균형을 잃었다.
나는 곧장 주먹 쥔 오른손으로 놈의 왼팔을 내리쳤고, 순식간에 접힌 매드독의 팔을 쳐내며 오른 팔꿈치로 녀석의 목을 찌르고, 포크 숟가락을 놈의 배에 깊게 찔러 넣었다.
"윽…!"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연계속도.
깜짝 놀란 매드독은 곧장 거리를 벌렸지만, 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바람의 마력을 끌어올렸고, 오른손에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내 놈을 향해 던졌다.
매드독은 한 번 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나를 향해 마력으로 이루어진 단검을 던졌다.
그리고 놈이 쥔 하얀 단검으로 바람의 칼날을 막았다.
하지만 흩어진 작은 칼날들은 매드독의 전신을 베고 지나갔고, 나는 손쉽게 포크 숟가락으로 놈이 날린 단검들을 쳐냈다.
"…이 미친. 야비한 새끼가."
"어린놈이 입에 걸레를 물었구나. 그 입을 찢어주마."
나는 다시 녀석을 향해 달렸다.
이번엔 그냥 달리지 않고 허공을 날아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매드독은 이때다 싶었는지, 내 다리를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아마 독에 중독시키려는 것이겠지.
놈이 가진 독이 아라크네의 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다.
해독제를 통해 내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무려 1등성을 넘보던 무두르를 죽인 독이다.
지금의 놈에게 나는 약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을 참이다.
파라라라락-.
"뭣이…!"
허공에서 한 번 더 몸을 틀어 버린 나는 간발의 차이로 단검을 피해내 놈의 면상에 2회전 돌려차기를 꽂았다.
콰아앙!
자욱한 연기가 매드독의 얼굴에서 피어올랐다.
"큭. 이런 개…!"
"시끄럽다."
퓨웃.
거미줄을 쏘아내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그의 몸을 향해 양손으로 거미줄을 쏘아냈다.
하지만 매드독은 생각보다 침착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거미줄을 피해냈다.
그러나 모두 피한 것은 아니었다.
"……!"
지금의 내게 초감각이라는 능력치가 있는 한, 놈은 절대 나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아니, 있어도 내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죽여버릴 것이다.
가슴에 들러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려는 매드독.
나는 그러기 전에 거미줄을 쭉 잡아당기며 놈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그리고 아직 놓지 않은 거미줄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는 두 발을 놈의 가슴팍을 향해 뻗었다.
"썬 로드."
콰콰콰콰쾅-!
폭발력으로 인해 허공에 떠오른 매드독에게 엄청난 옆차기 연타가 퍼부어졌다.
매드독은 무기력하게 무수한 발차기 세례를 맞아야 했다.
나 또한 허공에 떠오른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저 본능에 몸을 맡겼다.
그저 이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끄어억."
썬 로드의 화염 때문에 입에 있던 거미줄이 제거된 매드독은 비명만을 계속해서 질러댔다.
이내 썬 로드가 끝나자, 나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곧장 놈의 목을 무릎으로 짓누른 채 땅으로 처박았다.
"카아윽…!"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핏줄이 도드라진 삐에로의 얼굴은 이미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웃고 있던 입꼬리도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놈의 생명력은 아직 30% 정도 남아 있었고, 아마 그 불룡파 놈들처럼 이놈도 화염 저항 세팅을 한 것 같았다.
하여튼 바퀴벌레 같은 놈들.
"크으으윽…!"
다급해 보이는 매드독의 단검이 내 옆구리를 찔러왔지만, 내겐 이런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스킬이 있었다.
[하급 대지 마법, '스톤 스킨'을 사용합니다.]
[몸의 일부가 단단한 돌로 굳어집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가 돌로 굳어졌다.
매드독의 단검은 힘없이 팅-! 하는 소리만 울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놈의 눈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복수할 거라도 있냐고?"
나는 놈이 거머쥔 단검의 날을 맨손으로 거머쥐며 눈을 부라렸다.
이미 내 왼손은 스톤 스킨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
까드득!
쇠와 돌이 갈리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매드독의 귓전을 때렸다.
"네놈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왼손의 힘을 주자, 날카롭던 단검에 금이 가더니, 이내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챙그랑!
"그것만으로도 넌 사형감이다."
"이런 개…."
콱! 콱!
거머쥔 포크 숟가락을 매드독의 이마를 향해 수차례 내리찍었다.
물론, 아까 얘기한 대로 입을 찢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드독은 누운 채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몇 번의 아우성과 함께 축 늘어졌다.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나는 곧장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태양의 불꽃으로 한 모금 땡기니 그 맛이 가히 일품이다.
"후우."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경기 종료를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