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00화
제200화
대기실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맙소사. 저건…?"
허공에 나타난 황금색의 거대한 술잔.
고대의 언어와 신비로운 그림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약간 오래된 유물처럼 생겼지만, 저것은 술잔이 맞았다.
그것도 보통 술잔이 아니다.
저건 천궁의 술잔이다.
그것도 스틱스라는 강물이 담긴.
"…미친. 저 녀석 또 무슨 짓거리를 한 게야."
저것이 나타난 것을 보면 백무열은 분명 헤라클레스와 절대 맹세를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화면에 스틱스강의 형상이 허공에 나타날 리 없을 테니까.
나는 곧장 백무열에게 귓속말을 했다.
- 잭슨: 이 미친 녀석아. 대체 헤라클레스와 무슨 약속을 한 거냐.
- 백무열: 별거 아니다. 그냥 몽둥이의 과업을 내게 제안했을 뿐이야. 이놈이 저번부터 계속 그걸 원했거든. 뭐, 나도 후계가 되는 조건으로 헤라클레스에게 조건을 걸었지만 말이야.
- 잭슨: 무슨 조건?
- 백무열: 눈앞에 있는 놈이랑 동등한 힘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조건.
나는 다시 화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휴톤은 백무열의 힘에 놀랐는지, 꽤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이길지는 뻔하다.
- 잭슨: 미친놈. 그냥 후계로 삼아준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지. 뭐하러 저놈이랑 동등한 조건으로 싸우나.
- 백무열: 재밌잖아. 그리고 저놈이 나랑 결판도 못 냈는데, 힘을 빼앗기면 얼마나 억울하겠냐.
- 잭슨: 그래서 짓밟고 나서 빼앗겠다?
- 백무열: 그런 셈이지.
"하하하하!"
이번에 웃음이 터진 것은 나였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다.
하여튼 엉뚱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남자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애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군.
그나저나 헤라클레스가 절대 맹세를 할 줄이야.
이놈도 어지간히 급했나 본데.
"흐음."
만약 절대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불리한 건 헤라클레스였다.
9년 동안 숨을 쉴 수 없고, 천궁의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늙게 된다.
불로불사의 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0년째 되는 날 모든 힘을 되찾게 되는 것이 스틱스 강의 맹세였다.
새삼 헤라클레스가 무열이 놈을 얼마나 탐을 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잭슨: 이길 수 있냐?
- 백무열: 질 거 같냐?
- 잭슨: 와장창 깨졌으면 좋겠는데.
- 백무열: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화면에 있는 백무열의 신형이 휴톤을 향해 쇄도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몽둥이를 휘두르며 맞부딪혔다.
휴톤은 힘으로 우직하게 밀며 휘둘렀고, 백무열은 기술만으로 모든 공격들을 흘려냈다.
지금 두 사람의 힘은 동등한 상황이었기에 우세는 당연히 백무열이었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 될 리가 없지.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저놈과 목검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아크스타에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랬기에 그 까다로운 헤라클레스가 백무열을 고른 것이겠지.
어쨌든 헤라클레스도 후계를 고르는 눈만큼은 좋은 모양이다.
"자, 내 한 수를 받아 보거라."
입꼬리가 올라간 백무열이 즐거운 듯 웃었다.
그가 휘두른 흑색의 목검이 호선을 그리며 날았다.
휴톤 또한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무열의 목검을 막기 위해 몽둥이를 가져다 댔고,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히며 힘의 파동이 터지려는 순간.
휘리릭-.
목검이 다른 궤도로 움직였다.
"허허. 진짜 오랜만에 보네."
백무열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휴톤의 반대쪽을 향해 목검이 내질러졌다.
이것은 생전 백무열이 1대1 대결에서 자주 쓰곤 했던 기술.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제비를 베는 것처럼 유연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름하여….
"제비 가르기."
퍼어어어억-!
호쾌한 타격음이 백무열의 목검에서 터져 나왔다.
휴톤은 얼굴을 찌푸리며 오른쪽 무릎을 주저앉혔다.
* * *
"끄으으윽…!"
미간이 찌푸려지는 고통에 휴톤은 절로 신음을 뱉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설마하니 거기서 자신의 몽둥이를 흘리며 한 바퀴 돌아 반대편 다리를 공격할 줄이야.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지금 이 싸움에 자신이 가진 힘을 잃느냐, 아니면 마느냐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끄윽.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다…!"
휴톤이 저항하기 위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이미 승기는 기운 상황이었다.
백무열은 다시 한번 제비 가르기를 사용해 유연하게 움직였고, 휴톤의 목검을 흘려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멀쩡한 왼쪽 다리를 향해 목검을 내리쳤다.
허벅지, 무릎, 종아리를 차례대로 번 갈아가며, 빠른 속도로 둔탁한 타격음을 만들어냈다.
퍼퍼퍼퍼퍼퍽-!
"끄하아아악-!"
결국, 무릎을 꿇은 휴톤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상체를 지탱했다.
백무열은 여전히 건재하게 두 발로 서있는 상황.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휴톤은 입술을 깨물었다.
"뭘 그렇게 쓰레기봉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 억울하냐?"
"흐흐. 억울하지. 동등한 상황에서 져버렸으니 말이야."
"쯧.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난 너한테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기회…?"
"그래. 저 몽둥이 변태 놈이 원래는 나를 후계로 삼으려고 했거든. 근데 그러면 네 녀석이 억울해할 것 같으니, 내가 이렇게 공평하게 붙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거다."
"큭큭큭. 웃기는군."
"뭐, 어쨌든 재밌는 싸움이었다. 더 해볼 테냐? 내가 보기엔 더 싸울 수도 없어 보인다만."
백무열의 시선이 휴톤의 무릎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은 시퍼런 멍이 들어 버린 상황이었다.
휴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양다리가 부서져 움직일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뜨고 있었으니까.
"큭큭."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눈앞의 강자가 자신과 싸우기 위해 이런 기회를 만들었고, 또 자웅을 겨룰 수 있었다는 게 좋았다.
그렇기에 그에게 남은 미련 따위는 없었다.
굳이 '몽둥이의 가호'란 것이 없어도 자신은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새로운 목표가 있지 않은가.
"또 싸워보고 싶은데. 도전을 받아줄 겁니까?"
"사내다운 게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언제든지 찾아와라. 단, 내가 당분간 좀 바쁠 예정이니까 내년에."
"큭큭. 좋소. 그때의 나는 더 강해져 있을 거요. 또 봅시다."
휴톤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오른 손을 들었다.
"기권."
* * *
-경기 끝났습니다! 승자는 놀랍게도 백무열 선수입니다! 백무열 선수가 4강에 진출합니다!
경기장 가득 들썩이는 관객들의 환호가 이곳 대기실에까지 전해져왔다.
뭐, 내게는 당연한 결과지만, 관객들은 그렇지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무열이 녀석 또 한동안 시끄럽겠군."
"과연 형님의 친구분은 대단합니다. 놀라운 검술이에요."
어느새 경기를 마치고 도착한 견소룡이 내 옆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김현우는 옆에 있는 병실에 누워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한다.
"붙어보고 싶냐?"
"아마 곧 그렇게 될 걸요?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저, '백무열'님에게 귓속말이 도착했습니다.]
"음?"
나는 곧장 창을 열었다.
- 백무열: 미안하다. 친구야.
"뭐야 이 녀석…."
- 잭슨: 뭐가?
- 백무열: 아무래도 네가 준 꽃집. 당분간 못 맡을 것 같다.
- 잭슨: 엥? 무슨 소리야?
- 백무열: 경기가 끝나는 순간 떠나기로 했거든. 헤라클레스가 스타 프루츠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나는 그걸 찾으러 떠나야 해. 일단 과업을 쌓기 전 본격적인 녀석의 후계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 잭슨: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
그와 동시에 화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견소룡이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형님. 저길 좀 보십시오."
화면에 있는 백무열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빛의 기둥에 휩싸여 있었다.
놀란 것은 사회자도 마찬가지.
그리고 관객들의 표정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 백무열: 미도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라. 손자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성찬이에게 검술을 배우면 될 게야. 검도 대회에서 1등을 한 녀석이니 미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 나이도 엇비슷하고.
갑자기 이렇게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섭섭함이 밀려온다.
뭐, 현실에서 연락하면 되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어딜 간다는 게야.
- 잭슨: 우라질 놈. 찾아갈 테니 기다려라. 어디로 가는데?
- 백무열: 자세히는 모르지만, 세상의 서쪽 끝에 해가 지는 곳이라더군. 아무튼 잘 지내라. 당분간 오지 못할 것 같아. 이제 갈 시간이라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마어마한 광휘가 터지더니, 화면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곳에 백무열은 없었다.
[대상이 귓속말을 할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 * *
"정말 아쉽군요. 그분이랑은 꼭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견소룡이 아쉬운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게 백무열의 사정에 대해 듣고는 싸워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며 계속해서 한탄 섞인 말을 하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냐. 그래도 내가 꼭 너랑 만나게 해주마. 너무 낙담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경기가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군요."
콜로세움 관계자들도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 사회자는 잠깐의 회의를 하겠다며 15분의 휴식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나와 견소룡, 그리고 매드독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세상의 서쪽 끝에 해가 지는 곳이라….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나는 백무열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았다.
한데 거기에도 스타 프루츠가 있었다니 놀랄 노자로군.
대기실에 누군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참가자 여러분? 잠시 모여주십시오."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은 콜로세움의 사회자였다.
그는 막 회의를 끝내고 왔는지 제법 진중한 얼굴이었다.
"회의 결과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견소룡 선수는 상대가 없어졌기에 부전승으로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매드독 선수와 잭슨 선수인데…. 원래 오늘 결승전까지 치르려 했지만, 부전승이 있으니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되어서, 사흘 뒤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매드독과 잭슨 선수. 지금 경기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제법 괜찮은 제안이었다.
내게도 나쁠 건 없었다.
내심 속으로 3명이서 개인전을 치르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매드독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두 분은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사회자는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아마 관객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러 가려는 것이겠지.
나는 옆에 있는 망할 삐에로 놈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가 쭉 찢어진 채, 귀에 걸릴 것처럼 웃고 있었다.
이 썩을 놈이 남의 손녀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실실 쪼개고 있네.
"쳐 웃지 마라. 입 찢어버릴 거니까."
매드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