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97화
제197화
나는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에 도착했다.
매드독과 휴톤을 제외하면 내 정체를 다들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매드독은 방금 경기장으로 향했고, 휴톤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그땐 힘을 숨긴 거였나?"
"고의는 아니었다."
"꼭 한번 제대로 붙고 싶군."
"언제든지."
그 말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백무열을 찾고 있는 중인데, 이놈은 또 어디서 뭘 하는지 보이질 않는다.
때마침 귓속말이 도착했다.
- 견소룡: 승리 축하드립니다. 화끈하게 하셨군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 잭슨: 허허, 어쩔 수 없었지.
- 견소룡: 그나저나 잠시 대기실 구석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와 보시겠습니까?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잭슨: 음? 알았다. 금방 가마.
봐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 조금 의아했지만, 새삼 어떤 걸 봐야한다는 건지 궁금했다.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지….
"가보면 알겠지."
나는 뒷짐을 지며 견소룡의 말마따나 대기실 구석에 위치한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아까 귓속말을 했던 견소룡이고, 다른 한 명은 내가 애타게 찾았던 백무열이었다.
근데 친구 놈의 분위기가 좀 심상치가 않다.
"뭐야. 이 녀석 왜 이래."
백무열은 지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살짝 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는 은은한 황금빛의 아우라가 감싸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은 순간.
견소룡이 말했다.
"아무래도 성좌와 대화를 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강한 의문이 머릿속을 돌았다.
아직 스타 프루츠를 먹지도 못한 놈이 성좌와의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제가 북극에 갔을 때 선원과 함께 갔었는데, 그때 선원이 말해주더군요. 제가 허공에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오랜 시간을 공중부양하고 있었다구요. 지금 친구분의 모습이 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으음…."
나는 턱수염을 쓸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여기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혹시 저번에 프로메테우스와 대화를 했을 때도 이랬던 건가?
"일단 우리 둘이 여기를 지켜야겠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자칫 대화를 방해했다가는 이놈에게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견소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띄워진 수정구슬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이곳에도 수정구슬이 하나 더 있었기에, 경기를 볼 순 있을 것 같았다.
"손녀분의 경기가 시작될 모양입니다."
"으음. 이겨야 할 텐데…."
"잘 될 겁니다."
"그래야지."
마침 수정구슬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8강전 두 번째 경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양 선수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친구 놈은 친구 놈이고, 내게는 손녀가 더 중요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기거라. 미도야."
* * *
미도는 크게 심호흡했다.
건너편에 마주 보며 서 있는 삐에로. 아니, 매드독은 강자였다.
한국에서 꽤 알아주는 랭커인 오빠들을 궁지로 몰았을 정도였으니까.
레벨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킬이 정말 위협적이었다.
맹독을 다루는 암살자들은 이런 것들이 참 무섭다.
'후우, 해보는 거야. 최미도. 정신 차리자. 열심히 했잖아. 그동안 해왔던 수련의 성과를 믿는 거야.'
어쩌면 자신은 비전투 직업이었기에, 저 남자에게 상대도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도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죽도록 수련하고 수련했다.
저 남자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일념으로.
흐르는 긴장감 속에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뻗으며 맞붙었다.
챙-!
"호오. 계집이 제법이군."
매드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조커 같아서 미도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검을 밀며 그를 밀쳤고, 매드독 또한 그 반동으로 뒤로 덤블링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허공에 마력을 방사한 매드독이 예리한 단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빠르게 점프를 반복하며 미도를 향해 순차적으로 던졌다.
"……!"
놀란 미도가 오른손에 거머쥔 피의 도살자를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총 다섯 자루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단검이 날아왔다.
얼굴에 하나, 몸통에 둘, 다리를 노리며 날아오는 두 자루.
그녀는 조금 서툴지만, 익숙한 검세로 다섯 자루의 단검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챙! 하는 소리가 5번 들렸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걸 내가 막은 거야? 대박. 역시 수련의 성과…."
그 순간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한 자루.
미도는 모골이 송연한 느낌에 소름이 쫙 끼쳤다.
가까스로 스치고 지나간 머리카락 한 올이 그녀의 눈앞에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아, 빗나가버렸네. 아쉽게 말이야…!"
매드독이 마치 야구공을 던지는 선수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미도의 눈앞에 단검 한 자루가 이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소리를 치며 인벤토리에서 파레트를 꺼내 막았다.
콕!
"……."
[고목나무로 만든 파레트의 내구도가 18% 감소하였습니다.]
다행히 파레트로 단검은 막았지만, 뚫려버린 파레트는 이미 내구도가 꽤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이건 나무로 만든 거라 수리도 안 된다.
사실 내구도가 떨어져 부서지면 새로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힝. 이거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어이. 피하지 말라고."
파레트를 내린 미도가 매드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검날을 혀로 핥으며 자신을 게슴츠레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후우. 정신 차리자. 상대는 PVP 특화 직업을 가진 사람이야.'
미도는 다시 피의 도살자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왼손엔 나무로 만든 파레트를 방패처럼 들었다.
좀 아깝긴 하지만, 저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선 이게 필요할 것 같았다.
뭐, 부서지면 오빠들한테 사달라고 조르면 되니까.
복수해줬다는 명목으로 사달라고 하면 오빠들이 사줄 게 틀림없었다.
"이봐요. 변태 아저씨."
"변태 아저씨…?"
"그래요. 변태 아저씨. 왜 자꾸 그렇게 게슴츠레하게 보는 거예요? 기분 나쁘잖아요."
"후후.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자꾸 야비하게 단검만 던질 거예요? 제 아름다운 이 몸매를 가까이서 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면 무서운 겁쟁이라 그런가? 아저씨 지금 작으니까 자신 없는 거죠?"
미도가 매드독을 도발했다.
그녀로서는 회심의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자꾸 이렇게 단검을 피하거나 막아내서는 한 방 먹일 수는 없었으니까.
하여튼 저 독이 문제다.
"하. 계집년이 꽤 재밌는 소리를 지껄여대네."
매드독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별것도 아닌 년이 묘하게 기분 나쁘게 도발을 해온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기도 하고, 꼭 저년이 비명 지르는 것을 듣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아까 말대로 몸매도 제법….
'하긴 이렇게 던지는 건 손맛이 없긴 하지. 저년의 입에서 꼭 살려달라는 말을 듣고 말 테다.'
그가 양손의 단검을 역수로 쥐더니 팔을 뒤로 젖히고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파고들었다.
곧장 몸을 회전시키며 단검을 급소를 향해 예리하게 찔러 넣었다.
미도 또한 수련했던 것을 떠올리며 매드독의 공격을 막기 시작했고, 단검은 공격속도가 빠르니 짧게 튕기며 다시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백무열의 가르침이 머릿속을 스쳤다.
두 사람은 짧지만,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직 미도에게 매드독은 버거운 상대였다.
우드득-!
[고목나무로 만든 파레트가 내구도가 떨어져 부서졌습니다.]
"꺅!"
부서진 파레트의 파편이 미도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미도는 팔을 스치는 예리한 감각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손에 쥔 피의 도살자를 가로로 크게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맹독에 걸렸습니다.]
[생명력이 1분당 10%의 속도로 감소합니다.]
[빨리 해독제를 먹는 것을 추천합니다!]
"으윽…."
미도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해독제를 꺼내 마셨다.
저번에 은정혁이 해독제가 없어서 죽는 것을 보며, 미리 준비를 해둬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복용한 해독제가 '맹독'을 온전히 중화시키지 못합니다.]
[생명력이 1분당 5%의 속도로 떨어집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맹독이 너무 강합니다.]
미도의 시선이 피가 흘러내리는 왼팔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이상한 거미 문양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다행히 중화제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죽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 한 방 먹여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녀는 아까 다크 울프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위험하면 그냥 떨어지시오. 이건 내가 아니라, 그대의 할아버지가 부탁한 거니까.'
그녀는 다시 오른손에 쥔 피의 도살자를 강하게 거머쥐었다.
그래도 힘을 내서 복수를 해보기 위해서.
하지만 이내 힘없이 칼을 늘어트렸다. 독이 몸에 퍼지기 시작하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도가 한숨을 쉬며 검을 쥔 손을 살짝 들었다.
"…항복할게요."
* * *
-승자는 바로 매드독입니다! 매드독이 4강에 진출합니다!
반갑지 않은 사회자의 공표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나름 미도가 잘 싸웠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진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수련을 얼마나 혹독하게 해왔는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기에 더 그랬다.
아마 미도는 지금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도야…."
나도 모르게 꽉 쥐어버린 양 주먹.
떨려오는 어깨를 진정시키듯,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형님. 그래도 잘 싸웠습니다. 사실 이미 예상하시고 계셨지 않습니까. 손녀분은 화가라서 승산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걸요."
"그래. 안다. 나도 아는데…."
입술을 질끈 깨물며, 화면에 나오는 매드독을 노려봤다.
내 오늘 저놈의 면상을 기필코 개떡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다음은 제 차례군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나는 아직도 가부좌를 튼 채, 공중에 떠 있는 백무열을 돌아봤다.
지금 내가 걱정되는 것은 세 번째 경기가 빨리 끝나버려서 백무열의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놈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이래저래 복잡하다.
하여튼 망할 놈이 민폐나 끼치기는.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시간 끌어보겠습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도 이분과 붙어보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깨어나면 귓속말을 하마."
견소룡이 손을 흔들며 다음 선수를 찾는 NPC를 향해 뛰어갔다.
그의 상대는 아마 김현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기사라는 직업이었는데, 사제와 전사가 합쳐진 그런 직업이라고 들었다.
공격력은 강하지 않고 방어력과 생명력이 많아서 쉽게 죽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쉽게 요약하자면 딴딴한 놈이란 거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은 좀 끌 수 있을 것 같네."
그때, 저 멀리 출구 쪽에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미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우울해하고 있을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잘 싸웠…."
하지만 그 순간.
미도의 가녀린 몸이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물처럼 스르륵-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미도야. 정신 차려라. 의, 의사. 간호사! 아니, 사제 없나! 아무도 없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