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96화
제196화
그 무렵, 경기는 한창 절정을 향해 달렸다.
사실 이거는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았다.
로믈라나가 유용하게 쓰라고 준 스킬이지만, 저번에 배에서 한 번 썼다가 부작용 때문에 쓰러진 후 자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북극에서 포트렌으로 향하는 항해 도중 내가 명상을 자주 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건 내게 많은 부담을 안겨주는 스킬이기도 했다.
"후우…."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빨리 끝내야 한다.
속전속결로.
"무시무시하구만! 흐흐흐."
라인하르트가 푸른 냉기를 뿜어내는 흑야랑들의 얼음 송곳니를 보며 광소를 지었다.
그는 꽤 그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기대감이 어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라인하르트도 나름 소룡이 못지않은 싸움 광이었으니까.
[늑대성, 로믈라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오랜만이다. 로믈라나."
[늑대성, 로믈라나가 알데바란이 나타난 거냐고 묻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힘이 좀 필요해서 불렀다. 저놈을 좀 쓰러트려야 해서 말이야."
[늑대성, 로믈라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치이이이익.
내 몸을 감싸는 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성(靈星)의 기운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3등성은 푸른색, 2등성은 연한 보라색, 1등성은 붉은 기운을 띠는 성좌들의 힘의 근원.
이제는 당당히 1등성의 자리에 오른 로믈라나의 붉은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과 융합한 '흑야의 심장 조각'이 펌프질을 시작합니다.]
[과도한 힘의 사용은 당신의 몸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5분의 지속시간이 지나면, 고통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거대한 흑야랑 다섯 마리가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보니, 새삼 이놈들의 덩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몸소 실감했다.
저번에는 내가 레무스처럼 거대해졌기에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눈앞에 있는 라인하르트를 향해 덤벼들라고.
그에 화답하듯 거대한 흑야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컹! 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속도로 라인하르트를 향해 돌진했다.
"좋아. 좋아. 멍멍이들! 드루와!"
어느새 저번에 봤던 펩시맨 같은 모습이 된 라인하르트.
아마 고대 거인족이 쓰던 방패를 저번처럼 자신의 몸에 휘감은 모양이었다.
사실 엘바프리움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광물이 아닌데, 저렇게 한다는 건 아마 저놈의 고유 능력이 아닌가 싶다.
뭐, 어쨌든 그건 그거고.
"바람을 쓰면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른 걸 써야겠지.
[하급 어둠의 마법, '어둠의 화살'을 사용합니다.]
['어둠의 화살'이 '흑야의 심장'으로 인해 새롭게 변화합니다.]
이것 또한 저번에 배에서 알게 된 것 중 하나였다.
아마 레무스가 어둠과 관련된 속성이었기에 그럴 것이라 추측된다.
한 손에 생성된 어둠의 화살에 붉은 영성이 깃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거대한 모습이 되어 적을 격살할 준비를 마쳤다.
나는 그것을 강하게 움켜쥐고 라인하르트를 향해 겨누었다.
[성좌 마법, '흑야의 화살'이 발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름은 화살이지만, 사실 창에 가까운 크기다.
나는 그것을 정밀하게 조준하며 라인하르트를 노렸다.
그는 거대한 흑야랑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맨손으로 흑야랑의 턱에 어퍼컷을 날리는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지만, 역시 5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처럼 보였다.
라인하르트의 다리는 냉독이 깃든 흑야랑들의 발톱으로 인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후우."
마침 흑야랑 하나가 라인하르트를 노리며 거대한 입을 벌렸다.
양손을 이용해 아가리가 닫히지 않도록 버티던 라인하르트의 빈틈이 보이자,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쥔 것을 힘차게 던졌다.
쒸아아아악-!
어둠과 얼음이 공존하는 거대한 화살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듯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쇄도했다.
날아가던 도중 흑야의 화살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이내 또 다른 거대한 늑대의 아가리가 되어 라인하르트에게 도달했다.
"이런, 쒯…."
그리고 그것이 라인하르트의 마지막 말이었다.
콰콰콰콰콰-!
맹렬하게 돌진하던 흑야의 화살이 결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뚫고 나가, 거대한 늑대의 이빨 자국을 관객석에 만들어냈다.
다행히 미리 대피해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동시에 결계가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경기 종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객들의 함성과 눈부신 플래시 세례가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 * *
"이런 미친…."
수많은 관객들 사이에 숨어, 경기를 지켜보던 최불룡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으로 인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설마 영감의 힘이 이토록 강력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 누운 채, 치료를 받는 라인하르트를 살폈다.
그가 두르고 있던 거대한 강철의 표피는 갈가리 찢겨져 조각이 난 상태였고, 복부에 거대한 자상이 남겨져 있었다.
그 부상이 꽤 심각해 치료 중인 사제들이 포션을 들이붓는 것이 보였다.
"아이씨,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사실 최불룡은 에이단에게 명령을 받아 그의 사병들과 함께 콜로세움 밖에서 영감탱이를 기습할 생각이었다.
지금 여기 와있는 이유 또한 안쪽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온 것.
카이단도 사병이 있지만, 에이단은 지금 그와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다.
저번에 세웠던 계획이 실패하자 에이단은 약속했던 카지노의 지분을 그에게 주지 않았고, 카이단 또한 그 일로 인해 손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감탱이가 현 아크스타의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제우스 길드> 의 메인 탱커를 단 한방에 저 지경으로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주아주 많이.
- 최불룡: 한불아. 애들한테 전해라. 우리는 대충 싸우는 척하다가 빠진다.
- 한불이: 예? 큰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빠지다니요.
- 최불룡: 영감이 가진 힘이 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아마 에이단의 사병을 포함해 우리가 덤벼도 저 영감을 이기지 못할 거야.
- 한불이: 그, 그 정도입니까?
- 최불룡: 그래. 그리고 빠지자마자, 진행 중인 담배 사업을 정리하고 튄다. 다른 곳으로 가자.
- 한불이: 어디로 가실 겁니까. 형님.
- 최불룡: …글쎄. 일단 오르카 왕국으로 가야겠지.
- 한불이: 알겠습니다. 애들한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귓속말이 끊어지자, 최불룡은 다시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늑대의 탈을 쓴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관객들 입에선 계속해서 '다크 울프'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고 있었고,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영감이 힘을 숨기고 다녔던 걸까.
그건 자신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겠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노인이라는 것.
"…망할.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최불룡은 뒤를 돌아 콜로세움을 빠져나갔다.
그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으며, 과거에 한창 빠져 읽었던 무협지의 유명한 격언이 떠올랐다.
"…강호 법칙 제1조. 강호에서는 어린아이, 여인,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
그중 저 영감은 '노인'에 해당했다.
그것도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절세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은거 노인.
건드렸다가는 한 문파가 전멸할 수 있을 만한 강자의 풍모를 최불룡은 방금 전 영감탱이에게서 느꼈다.
그는 계속해서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시는, 제발 다시는 저 영감탱이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 * *
온갖 관객들의 고성과 기자들의 끈질긴 플래시 세례를 지나, 대기실로 향하는 통로를 걷던 나는 문득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와앗! 경기 잘 봤어요! 역시 대단하세요. 짱짱!"
미도가 양발을 폴짝거리며 기쁜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새삼 손녀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저번처럼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응원해주신 덕이오."
"에이, 아니에요. 저 아니라도 엄청 잘 싸우셨을걸요? 진짜 짜릿했어요! 저 라인하르트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건 처음 봤어요. 아, 이걸 녹화 했어야 했는데…. 으, 아까워."
그녀는 사뭇 아쉽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참.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저번에 말씀드린 유튜브 방송을 하려고 하는데, 시간은 현실 시간으로 6시쯤…."
미도가 눈치를 보는지, 양 검지를 맞대며 꼼지락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메테우스로 오시오."
"와앗! 정말요?! 감사해요! 앗싸!"
미도가 다시 한번 폴짝거리더니 방방 뛰고는 두 손을 모아 꽉 쥐었다.
저렇게나 좋은가. 허허.
그때, 뒤에서 NPC가 나타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다음 참가자. 미도 선수 맞습니까?"
"아, 네. 저에요!"
"준비하세요. 곧 들어갑니다."
"넵!"
그러고 보니 미도가 내 다음 경기였다.
아마 상대가 그 망할 삐에로 놈이었던가.
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그 삐에로는 당신보다 강하오."
"알아요. 하지만 그냥 지진 않을 거예요. 제겐 검술 스승이 계시거든요. 저 며칠 동안 정말 죽어라 특훈 했어요. 그 사람 이기려구요. 히힛."
나는 그녀가 말하는 검술 스승이 누군지 잘 알았기에 그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로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위험하면 그냥 장외로 떨어지시오. 이건 내가 아니라, 그대의 할아버지가 부탁한 거니까."
"훗, 본인이 걱정되는 건 아니구요?"
"……."
"저 좋아하시는 거 굳이 숨기실 필요 없어요. 혹시 알아요? 제 마음이 바뀔지. 아이 참, 내가 너무 예뻐서 탈이라니깐."
미도는 볼을 붉히며 양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내 손녀라서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진짜 공주병이긴 하다.
생각보다 중증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때, 아까 봤던 NPC가 다시 나타났다.
"미도 선수. 이제 들어갑니다. 매드독 선수는 어딨죠? 아, 저기 오는군요."
마침 건너편에서 망할 삐에로 놈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한 번 노려보고는 미도에게 인사했다.
"…이제 난 가보겠소. 힘내시오."
"고마워여! 나중에 봐요!"
미도가 한 손을 흔들며 배웅했고, 나는 그저 캄캄한 어둠 속을 거닐며 뒷모습과 함께 한 손을 휘적거렸다.
그리고 망할 삐에로 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매드독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는지 몸을 휘청거리며 벽에 이마를 찧었고, 나는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계속해서 걸었다.
"윽, 너 이 씨…! 야! 거기서! 서라고!!"
뒤에서 분노 섞인 고성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오른손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리며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소하다는 표정과 함께 대기실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