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92화
제192화
그 무렵.
나는 캡슐에서 나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온몸의 삭신이 쑤신 것이 나이를 먹은 것이 느껴진다.
곧장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숨을 들이마시니 이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기분.
이젠 어떤 게 진짜고 가상인지 모르겠다.
"에구구. 허리야."
그렇게 안방을 나서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밖을 향하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는 손녀인 미도.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 우리 손녀~! 이제 왔니?"
전형적인 손녀 바보의 미소를 지으며 나는 헤벌쭉 웃었다.
하지만 미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뭐지, 무슨 일 있나…?
"할아버지가 다크 울프예요?"
"뭐, 뭣…?"
순간 당황해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것보다 미도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았는지가 궁금하다.
그토록 철저하게 숨기기 위해 연극을 했건만, 이렇게 쉽게 들켜버리다니.
"이거 할아버지 필체 맞죠?"
"으응?"
"발뺌할 생각 말아요. 아빠가 분명 할아버지 필체랬어요."
아아. 뭔가 했더니 이거였나.
그녀가 내민 것은 저번에 내가 적었던 4장 분량의 방대한 성좌들의 정보가 적힌 종이였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빡빡하게 적느라 힘들었는데, 마지막에 스티커 같은 종이를 붙여서 '우렁각시'라고 적으려다가 '다크울프'라고 일부러 적어 넣었다.
지금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긴 하지만, 미도가 방송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했으니 기왕지사 친하게 지낼 구실을 만들어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변명을 생각해놓은 상태였다.
"네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만, 그건 내가 적은 게 맞다. 하지만 다크 울프는 아니야."
"네…? 그, 그럼 이건 뭐예요?"
미도가 당황한 낯빛으로 내가 적었던 스티커 종이에 '다크 울프'라는 글자를 가리켰다.
"분명 할아버지 필체잖아요. 아니에요?"
"그래. 내 필체가 맞지. 하지만 그 정보들은 다크 울프가 준 거다."
"네에???"
미도가 또 한 번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아~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우연히 제 방에서 이 종이를 봤는데, 그 얘기를 다크 울프 아저씨한테 했는데,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했다구요?"
"그래. 베껴 적느라 손목 아파 죽는 줄 알았지."
나는 짐짓 태연한 척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미도의 의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럼 할아버지가 보고 적으셨다는 원본은 어디 있어요?"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파고들 줄은 몰랐는데.
"그 까까오인가 메시지로 왔는데, 삭제해버렸지…."
"아아, 그랬구나. 그분 까톡하세요? 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러다 잘못하면 진짜 들키게 생겼다.
나는 일단 눈을 비비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땐 아픈 척하는 게 장땡이다.
"크흠. 미도야…. 할애비가 오늘 좀 몸이 안 좋은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되겠니?"
"으으음…. 네. 알겠어요. 의심해서 죄송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다행히 그녀는 더 채근하지 않았다.
미도는 곧장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나갔다.
물론, 나갈 때 볼에 뽀뽀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허. 이 맛에 할아버지 하는 거지.
열심히 종이를 끄적인 보람이 있구만.
"이제 잘 준비를 해볼까."
나는 곧장 불을 끄고는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미도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번호를 달라고 매달릴 것 같아서였다.
끙. 이렇게 불편해질 줄 알았으면 그냥 도와주지 말 걸 그랬나.
"아니지. 그래도 손녀 성적이 더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당분간은 미도를 피해 다녀야겠지만, 이 모든 것은 손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도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할아버지였다.
* * *
다음 날 나는 새벽 4시에 기상했다.
오늘은 일부러 운동을 가지 않았다.
미도가 일어나면 다짜고짜 번호를 캐물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매일 운동을 가면 좋겠지만, 지금의 내 나이에 매일 하는 것은 무리긴 하다.
어차피 쉬는 것도 중요하니 한 이틀만 쉬어야겠군.
나는 곧장 캡슐로 들어섰다.
익숙한 시스템 음성이 들려왔고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어제 접속을 종료했던 숙소였다.
이곳 세상도 마침 해가 뜨려는 중이었다.
곧장 창문을 열어젖혔다.
상쾌한 공기가 코로 가득 들어오는 것이 제법 기분이 좋다.
"좋군."
그렇게 한껏 가득 상쾌함을 누리고 있는데, 별안간 푸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어깨에 앉는 새가 있었다.
아무래도 찬바람이 들어오니 깨버린 모양이다.
"춘자야. 미안하다. 추웠니?"
"구루룩."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머리가 좋아진 건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파이어볼 다 배울 수 있겠냐?"
"구룩. 구룩."
춘자가 두어 번 끄덕였다.
"얼마나 걸리겠냐. 네 시간?"
"구루루룩."
춘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시간?"
"구룩. 구룩."
"으음, 그렇단 말이지."
콜로세움의 시작까지는 6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이참에 춘자의 파이어볼 습득을 완료해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법사 길드에 들러 괜찮은 마법서가 있으면 몇 개 좀 살 생각이다.
언젠가 춘자가 배워도 괜찮을 것으로 고르는 게 좋겠지.
지금 내겐 남는 것이 돈이었으니 비용은 전혀 걱정이 없다.
"솔라야."
"흠냐. 왜 불렀냐. 주인아~"
허공에 작은 불꽃의 구체가 생기며 솔라가 나타났다.
피곤해 보이는 게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춘자 교육 좀 시켜라."
"아하, 저번에 그거 말이냐?"
솔라가 반색했다.
"그래. 그거."
"알겠다! 가자! 춘자야!"
춘자는 솔라에게 이끌려 욕실로 향했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이 엄청 가기 싫어 보였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춘자를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때로는 자식을 엄하게 가르쳐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춘! 자! 그게 아니라구우우! 이렇게야! 이렇게!"
욕실 안에서 크게 꾸짖는 솔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그 귀여움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한 줌의 미련도 없이 바깥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마법사 길드가 있는 마탑이다.
* * *
"포트렌의 마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탑의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마법사 NPC가 나를 반겼다.
생각보다 숙소와 마탑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가 지팡이를 짚은 채 물었다.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요."
"으음, 그 마법서란 걸 좀 구매해볼까 싶은데."
"그러시군요.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3층으로 향하는 마법진입니다."
"음, 고맙네."
마법사가 만들어준 마법진 안으로 들어서자, 곧장 정경이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울렁거림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참을만했다.
마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느낌이랄까.
"오호, 신기한 곳이군."
마탑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이 마법사 유저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다른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 보이기도 했다.
조셉의 말에 따르면 이곳 포트렌은 윈디아보다도 더 커다란 마탑을 가졌다고 한다.
안 그래도 내 말을 들은 조셉이 마탑에 있는 저항군의 NPC 중 한 명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었다.
미리 말해두었으니, 그냥 가면 마중 나올 것이라고 그랬는데….
"혹시 잭슨님이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제법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 마법사가 로브를 입은 채 서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제법 한 가닥 할 것처럼 생긴 NPC였다.
"그렇네만."
"음, 제가 제대로 맞췄군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메이븐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잭슨일세."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내 손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찌릿한 통증과 함께 손등에 문신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놀라지 마십시오. 원활한 대화를 위해 텔레파시 마법을 건 것입니다. 이제 저와 속으로 얘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아아. 정말이구만.
새삼 마법이란 굉장히 편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마법사로 전직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다시금 밀려왔지만, 이미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 따라오십시오. 조셉에게 이미 얘기는 들었습니다. 괜찮은 하급 마법서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드리죠.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마법서들이 전시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들으며 하나씩 차근차근 살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충족시킬 순 없었다.
…이런 것들을 춘자에게 가르치기엔 너무 수준이 낮은데.
차라리 솔라를 선생으로 두고 있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물론, 언젠가는 솔라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을 붙일 생각이었다.
풍희에게는 바람 마법을 부탁할 생각이었고, 나중에 구름의 정령도 얻게 되면 더욱 다양한 마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흐음, 차라리 아이템이나 구매하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하나씩 보며 지나가던 중.
눈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급 마법 – 스톤 스킨]
등급: 희귀
하급 대지 마법 '스톤 스킨'의 원리가 담긴 마법서.
몸의 일부를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 수 있다.
-하급 마법: '스톤 스킨' 습득 가능.
"이건…."
"이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메이븐도 텔레파시가 아닌 말로써 물었다.
그는 생각보다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눈이 약간 커져 있는 상태였다.
"음, 이것이 괜찮겠군."
사실 대지 속성과 관련된 하급 마법서는 더 많았지만, 다른 건 다 팔리고 이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새삼 춘자에게 가르칠 공격 마법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뭐, 이런 방어 마법도 하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밑으로 시선을 내려 가격을 확인했다.
[가격: 200,000달러]
"……."
뭐가 이렇게 비싸지.
"이걸 고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저희 마탑에서 제일 인기가 없는 마법서거든요. 가격만 비싼 애물단지라고 할까요."
메이븐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겐 저것이 꼭 필요했다.
왠지 이번 콜로세움에서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근데 너무 비싸다. 돈이야 넘치지만 이런 하급 마법서를 사기엔 엄청 아까운 느낌이랄까.
애초에 다른 마법서와 가격 차이가 너무도 심했다.
10배가 넘게 차이 났으니까.
"끙,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그런 내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메이븐이 한숨을 쉬었다.
-직원할인 해드리죠.
직원할인이라는 말에 조금 놀랐다.
과연 NPC니까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얼마나 되는데?
-90% 됩니다.
곧장 헛기침을 하며 스톤 스킨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굳이 할인 해준다는데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이런 걸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부른다던데.
"개이득."
어제 미도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