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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190화 (190/375)

나 빼고 다 젊은이 190화

제190화

우리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메테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그 전에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 가면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 입구에 미리 귓속말을 보냈던 김수정이 마중을 나와 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키스는 좀 어떠냐.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헬레나 언니가 극진하게 간호를 하고 있어요. 완전 열녀라니까요. 뭐, 덕분에 많이 좋아졌죠. 조금만 더 치료를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지금도 잘 걸어 다니고요."

"음, 다행이구나."

김수정은 뭐가 그리 좋은지, 호호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콜로세움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키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며 곧장 메테우스로 돌아갔다.

확실히 누군가를 보살펴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곧장 옆을 돌아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백무열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크흠. 큼큼. 뭐, 왜."

"다치게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게 웃어른의 도리야."

"거, 알고 있다니까. 지가 무슨 바가지 긁는 마누라도 아니고. 이거 참. 큼."

초감각 때문에 구시렁거리는 그의 말이 다 들렸지만 나는 그냥 모른척했다.

이놈이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까.

뭐, 어쨌든 타이밍은 좋은 것 같다.

조셉과의 약속까지 1시간 정도 남았으니 그때까지 시간 때우기로는 충분하겠군.

"병문안은 빈손으로 가면 곤란하지. 꽃이나 좀 사가자."

"오, 꽃? 좋지. 근데 여기도 꽃집이 있었냐?"

"그래. 최근에 지었다."

"오오, 어서 가보자."

나는 김수정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 의중을 알았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그녀에게 귓속말로 꽃집을 보여줄 생각이라고 했었으니 아마 그리로 안내를 할 것이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괜찮은 꽃집을 제가 알고 있어요."

"오오, 그래. 그래.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럼요. 당연하죠. 저도 그게 더 편해요."

"허허. 그래. 수정아. 친하게 지내자꾸나."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말을 놓았다.

그녀와 먼저 안 것은 나였는데 왠지 더 빨리 친해지는 것 같은 것이 이상하게 질투가 난다.

흥, 고얀 녀석.

내가 점찍은 예비 며느리한테 무슨 수작을 거는 게야.

나는 약간의 감정을 실은 발차기를 백무열의 엉덩이로 날렸다.

뻐억-!

"어윽. 너 이씨…."

이번엔 예상치 못했는지 백무열이 엉덩이를 문질렀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통쾌하기 그지없다.

홍홍홍♡

"뚝배기 한 번 터져볼텨?!"

"가자."

뒤에서 계속 성난 백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걸었다.

누가 본다면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에게 이 정도는 장난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김수정에게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가자니까."

"아, 네!"

우리는 메테우스의 번화가를 걸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나는 작게 감탄했다.

귓속말로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메테우스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조셉 녀석이 준 정보로 쓰레기촌의 주민들을 받아들인 건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있다가 집무실에 들러서 얼마나 발전했나 확인해봐야겠군.

"도착했어요. 여기예요."

앞서가던 김수정이 멈추자 상념이 깨졌다.

곧장 눈앞의 가게로 시선을 옮겼다.

노란색으로 곱게 칠해진 벽면은 무열이가 제일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닮아 화사했다.

앞에 있는 정원의 장미들은 아름답게 수놓인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선물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어머,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대단한 NPC였나?"

김수정이 아름다운 정원과 진열대에 놓인 꽃들을 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게 안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마치 주인처럼 나오는 것은 웬 덩치 좋은 남자였다.

"어서 오세…."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엄청난 적막이 주변을 휘감았다.

* * *

최불룡은 하루 종일 다양한 잡일을 도맡았다.

또 한 번 정원의 가지를 치고 그곳에 장미를 포함한 여러 가지 꽃들을 심었다.

아직 물을 주지 못한 화분에 물을 주었고 매장 앞에 진열대를 손수 만들어 진열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판매까지.

에일린은 그만해도 된다고 했지만 최불룡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열심히 일할 때마다 에일린이 성실한 모습이 멋지다며 눈을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쉬고 있을 무렵.

가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최불룡은 엎드린 채 잠든 에일린을 깨우지 않기 위해 직접 나섰다.

"어서 오세…."

그리고 가게 밖으로 나온 최불룡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말을 이었다.

"뭐야. 당신들이 어떻게…."

"불도마뱀?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패죽이라는 별명을 가진 백무열이 물었다.

최불룡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함께 있는 옆 사람이 더 놀랍다.

한 명은 저번에 납치를 했던 크리스탈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김수정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가면을 써서 아이디는 안 보이지만, 늑대 가면을 쓴 남자.

최불룡은 그의 정체를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서 이프리트의 팔찌를 앗아간 망할 영감탱이.

이곳 메테우스의 촌장이자, 그 실상은 다크 울프라는 정체를 가진 정체모를 노인네.

"……."

최불룡은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지금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가는 순식간에 당하고 만다.

이곳 아크스타엔 피로도라는 시스템이 있는데, 쉬지 않고 일이나 사냥을 반복할 경우 마일리지처럼 피로도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70%를 넘어갈 경우.

전체적인 능력치가 절반으로 감소하게 되는데, 이건 포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자거나 앉아서 회복을 하거나 피로 회복제를 먹어야 복구가 가능했다.

[현재 피로도 : 83%]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감소한 상태입니다.]

[행동을 멈추고 쉬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피로도가 무려 83%나 쌓인 상태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최불룡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이, 난 지금 싸우러 온 게 아닌…."

"닥쳐라. 이 썩을 놈아."

자신의 말을 끊은 것은 가면을 쓴 영감탱이였다.

그의 기세가 사나운 것이 아무래도 화난 것 같다.

"야, 춘택아. 너 저번에 이놈한테 공격당했었다며?"

옆에 있던 백무열이 가면을 쓴 남자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춘택'은 저 영감탱이의 이름인 모양이다.

근데 아무래도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설마 친구인가?

이런 맙소사.

"그것뿐이게요? 저도 이 사람한테 납치당했었어요."

김수정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백무열에게 고자질을 했다.

이거 어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결국, 여기서 싸워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직 포기하고 싶진 않다.

가게 안에 있는 에일린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 난 싸우러 온 게 아니…."

"큰형님!"

문득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한불이를 포함한 불룡파의 동생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저놈들은 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지.

하아. 되는 일이 없군.

"뭐, 뭐야. 패, 패죽 영감?!"

"저 여자는 저번에 저희가 납치했던 여자입니다!"

"그렇다면 저 가면을 쓴 사람은…."

불룡파 일행들의 얼굴이 가면을 쓴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말없이 포크 숟가락을 꺼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증명이 되었다.

그는 저번에 우리들과 싸웠던 그 영감탱이가 확실하다.

"무, 무기 뽑아!"

한불이의 외침과 동시에 불룡파 일행들이 무기를 뽑았다.

'아, 미친. 이러면 안 되는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백무열은 콜로세움에서 봤던 무시무시한 목검을 꺼내 들었고, 춘택이라는 영감탱이는 춤을 추더니 다리에 화염을 뿜어냈다.

그리고 김수정은 저번에 보았던 그 엄청난 보호막을 치려는 것 같았다.

이대로 붙는다면 우리가 지고 말 것이다.

"으음…. 불룡 씨 무슨 일이에요?"

마침 에일린이 자다 일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며 가게 밖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 벌어진 이 살벌한 풍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이게 대체…."

김수정이 외친 것은 그때였다.

"에일린! 저 남자한테서 떨어지세요! 저 남자는 아주 흉악한 악당이에요!"

"네? 그게 무슨…. 아니에요. 불룡씨는 아주 성실하고 착한…."

에일린이 '대체 무슨 일이냐' 는 표정으로 자신을 본다.

최불룡은 눈을 감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여기서 에일린이 자신을 옹호한다면 그녀는 흉악한 악당을 감싼 죄로 이곳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으로 인해 좋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

최불룡은 그것이 죽도록 싫었다.

잠시 뒤, 그는 결심을 내렸다.

"하하하! 그렇다. 내가 바로 흉악한 악당 중에 악당 최불룡이다!"

그렇게 말한 최불룡이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갑주와 대검을 장착했다.

"후후. 에일린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실패했구나!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하.하.하!"

"예? 안 싸우고요?"

"정말 돌아갑니까?"

불룡파 전원이 최불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일린은 최불룡의 의도를 깨달았다.

지금 그는 어색하지만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감싸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

종일 그와 일을 하며 에일린이 느낀 것은 최불룡이라는 남자가 생각보다 성실하고 착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렴풋하지만, 그의 마음 또한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불룡 씨….'

에일린은 최불룡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눈을 글썽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뜻을 짐작했다.

최불룡은 시선을 거두며 뒤돌았다.

더 이상 그녀를 보았다가는 헤어지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돌아가자!"

그 우렁찬 외침에 불룡파 일행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최불룡이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신속하게 메테우스를 빠져나왔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거리가 좀 멀어지자 최불룡은 다시 뒤를 돌았다.

에일린이 있던 꽃집이 있던 방향.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그는 오늘 있었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아련한 그리움에 코가 시큰해지는 것 같다.

'에일린….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여자요. 부디 행복하길….'

그리곤 말없이 뒤돌았다.

쓸쓸한 달빛이 한 남자의 등을 비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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