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189화 (189/375)

나 빼고 다 젊은이 189화

제189화

지저귀는 새소리와 울창한 숲.

이제 막 깨어난 다람쥐와 토끼가 노니는 이곳은 메테우스의 주변을 둘러싼 산이다.

그 굽이치는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마을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물을 길어오는 처녀들과 물장구를 치며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있다.

이른 새벽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쓰레기촌 출신 남자들의 망치질 소리는 끊이질 않고 들려온다.

그런 마을의 번화가 중 남쪽에 위치한 어느 꽃집.

아직 간판도 걸리지 않은 그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정말 또 오셨네요?"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의 이름은 '에일린'이라고 한다.

최불룡은 마음속 깊이 그녀를 짝사랑했다.

사람이 아닌 NPC였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어쩌다 보니 또 왔네요."

"정말 부지런하세요. 저는 어제 그렇게 일을 많이 하시고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남자는 체력이 중요하죠. 저는 아직 멀쩡합니다. 하하하!"

고개를 젖힌 최불룡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어제 종일 에일린의 일을 도우면서 그는 온몸에 알이 배긴 상황이었다.

무슨 꽃집이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 어깨의 삭신이 쑤시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 모두가 에일린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어떤 일을 도와드릴까요?"

"마침, 잘 오셨어요. 이리로 들어오시겠어요?"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알록달록한 야생 장미들이었다.

최불룡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장미가 아닙니까?"

"맞아요. 오늘은 정원을 꾸밀 건데, 장미들의 가시를 모두 잘라야 할 것 같아요."

"아…."

어제 그 고생을 하며 정원의 가지치기를 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니.

왠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연장선이 된 것만 같은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곧 인상을 풀었다.

눈앞의 에일린이 뒤돌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도와주실 거죠…?"

"무, 물론입니다!"

두근대는 심장이 멈추질 않는다.

최불룡은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런 감정은 생전 처음이다.

아직 연애도 한 번 해보지 못한 그에게 이런 설렘은 굉장히 낯설었다.

'최불룡. 침착하자. 사나이잖아.'

그렇게 그는 장미의 가시를 발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에일린의 말에 따르면 야생 장미의 독성이 생각보다 강하니 조심해서 잘라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찔리면 바로 얘기하라고 했고 바로 중화해서 지혈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했다.

그렇게 집중해서 자르길 30분.

최불룡은 서투른 가위질에 그만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읏, 따거!"

[야생 장미의 가시에 찔렸습니다.]

[미약하지만 소량의 독을 품고 있습니다.]

[초당 0.01%의 생명력이 닳습니다.]

[이 효과는 100초간 지속됩니다.]

"어머, 어떡해. 괜찮으세요?!"

놀란 표정의 에일린이 허겁지겁 자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최불룡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검지의 두 번째 마디가 살짝 찢어져 피가 이슬처럼 맺혀 흐르고 있었다.

"어떡해. 피가…. 잠시만요. 중화제가 어딨더라, 아 여깄다."

에일린이 책상 위에 놓인 중화제를 잡고 상처가 벌어진 곳을 향해 뿌렸다.

그러자 하얀 거품이 일며 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랄까 상처 소독하기 전에 알코올을 뿌리는 느낌이랄까.

그 고통이 생각보다 따끔하다.

"윽…."

이를 악 물었다.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고 한 5초 정도 참았더니 금세 피가 지혈되었다.

그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에일린이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것을.

에일린 또한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얼굴을 매만지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흐흠."

두 사람은 동시에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최불룡은 내심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한 100번은 찔려야겠다고.

* * *

[대상이 현재 귓속말을 거부한 상태입니다.]

"아니, 큰형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거야."

불룡파의 2인자 한불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제 콜로세움의 시작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큰형님은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하며 나갔는데 그 뒤로 계속 행방불명 상태다.

한불이는 아마 큰형님께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업의 명운이 걸린 이 중차대한 순간에 잠적을 할 리가 없으니까.

"호출 버튼을 눌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고?"

"예. 아무래도 차단을 해놓으신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직접 큰형님을 찾는 수밖에.

그는 아까 전 큰형님을 마지막으로 쫓았던 육불이를 불렀다.

"육불아."

"예. 둘째 형님."

"큰형님이 제일 마지막으로 가셨던 곳이 어디냐."

"어제 제가 기억하기론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늑대의 평원이었습니다. 굉장히 화가 나신 것 같아서 말을 걸진 않았지만, 아마 또 평소처럼 몬스터를 학살하러 가셨던 것 같습니다. 전 큰형님이 돌아가서 일 보라는 말에 돌아왔구요."

"음…. 그렇구나."

아마 여섯째의 말처럼 몬스터를 잡으러 간 게 맞을 것이다.

큰형님은 언제부턴가 화나면 그런 식으로 화를 풀었다.

대출 빚이 점점 많아지자 현실에서 물건을 집어던지면 돈이 나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단 다들 움직인다. 늑대의 평원으로!"

그렇게 한불이를 포함한 불룡파 전원은 늑대의 평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을 샅샅이 살피기를 한 시간.

어딘가에서 흔적을 발견한 불룡파의 일원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여기 큰형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한불이는 곧장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은 까맣게 휘날리는 재들과 타다 남은 나무와 돌들이었다.

거대한 참격이 땅을 헤집고, 바위를 찢어 놓은 걸 보며 한불이는 그동안 봐왔던 큰형님의 전투 흔적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동생들 또한 마찬가지.

"정말 큰형님인 것 같은데요."

"이렇게 활활 태워버릴 만한 건 큰형님밖에 없죠."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인데요?"

차례대로 두불이, 세불이, 네불이의 말이었다.

한불이는 그들을 돌아보고는 땅에 손을 짚었다.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큰형님의 힘의 원천인 광염은 그 온도가 높아서 식는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체 어디 계신 거지.'

그러다 문득,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한불이는 길게 이어진 까만 잿가루의 흔적을 쫓아 멀리 시선을 두었다.

"이건…."

분명하다.

큰형님의 흔적이다.

광염(狂炎)은 그 이름처럼 미친 화염이라 어디로 어떻게 불이 번질지 모르는 화염이었다.

물론 그 힘이 너무 강해 주체하기가 힘든 것이 큰형님이 가진 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갈무리하여 꺼트리기도 쉽지 않았다.

바로 온도를 내렸다가는 큰형님의 심장에 위치한 광염이 폭주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대 불의 광전사였던 베르세르크가 폭주를 한 원인도 이것으로 추측이 된다.

길게 이어진 큰형님의 흔적을 보며 한불이는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움직이자. 큰형님을 찾는다!"

* * *

어느새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오늘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손녀와 붙어 지냈다.

뭐, 그렇다고 데이트를 한 건 아니고, 그냥 무열이가 가르치는 검술을 옆에서 지켜보는 식이었다.

생명력이 떨어지면 미도는 내가 만든 요리로 생명력과 체력을 회복했는데, 맛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손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젊은이들이 흔히들 말하는 그 '힐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어제 혼쭐이 난 그 호랑말코 같은 놈들은 부리나케 도망을 쳤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도의 말로는 급한 일이 생겼다나 뭐라나.

하긴 그렇게 쳐 맞았는데, 나 같아도 불편해서 못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수련이 끝난 모양이다.

매의 눈으로 꼿꼿이 서있던 백무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허억. 후우. 허억…. 아, 너무 힘들엉."

지쳐버린 미도가 바닥에 '大'자로 뻗었다.

하긴 저럴 만도 하다.

자세를 교정해준답시고, 멀쩡한 손녀의 팔이나 때리다니.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저 망할 친구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미도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걸로 지치면 곤란하다. 미도야. 저기 바위 보이지? 오늘 목검으로 1000번 내려치고 가거라."

"1000, 1000번이나요? 무, 무열이 할아버지…?"

"어허. 스승님이라고 하라니까."

"스, 스승님…? 하트 뿅뿅? -♡"

"애교 부려도 소용없다."

"히잉."

축 처진 미도의 어깨가 안쓰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미도가 수련을 시작하기 전 백무열이 내게 단단히 경고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련은 생각보다 가혹할 수도 있으니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고.

못 볼 것 같으면 아예 다른 데로 가 있으라고.

하지만 나는 꾹 참고 버텼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가자. 춘택아."

"그려…."

미도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손녀를 위한 길이라면 참는 수밖에….

미안하다.

할애비가 이따가 야식으로 맛있는 거 만들어주마.

따흐흑.

그렇게 우리 둘은 말없이 메테우스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

"……."

귀뚤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마 이쪽 세계에도 귀뚜라미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메테우스를 가는 이유는 아까 조셉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

그는 급한 일이라며 저녁에 잠깐 마을에서 볼 수 있냐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뭐 만나보면 알겠지.

지금 백무열이 함께 가는 이유는 내가 녀석에게 마을에 있는 꽃집을 선물로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수정이에게 물어보니 이미 지어진 상태라고 했고, 현재 NPC 하나를 고용해 마무리 작업과 함께 정리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이 미도를 다그치며 때리던 장면이 계속 생각나 자꾸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노무시키를 그냥.

나는 백무열의 엉덩이를 힐끔 보며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녀석이 방심하는 틈을 타 돌려차기를 날렸다.

부우웅.

하지만 백무열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약삭빠르게 엉덩이를 빼며 거리를 벌렸다.

백무열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크하하! 네놈이 그럴 줄 알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지!"

"이이익…! 네가 감히 우리 미도를 때려?! 에잉! 죽어봐라!"

우리는 한참이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목검과 발차기를 주고받았다.

그 치열한 공방 속에서 웃는 것은 무두르밖에 없었다.

[취익. 재밌는 노인네들이로군.]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