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87화
제187화
나는 곧장 포트렌의 서쪽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백무열과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녀석은 내게 오는 길을 설명해주었다.
가끔 두꺼비처럼 생긴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내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행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저 멀리 열심히 쥬얼 매머드를 잡는 이들이 보인다.
나는 초감각을 시력에 집중해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내가 맞게 잘 왔는 모양이군."
마침 나를 발견했는지, 미도가 이곳으로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세상에서 제일 해맑은 미소로 손을 흔드는 미도.
손녀가 웃는 모습을 보니, 세상의 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가까이 이르자 미도가 달려와 내 품에 폭 안겼다.
"할아부지~"
"허허, 욘석아. 사람들 다 쳐다본다."
"흐으응."
갑작스런 손녀의 애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만개한다.
고운 머리칼을 쓸자, 미도가 나를 올려보며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언제 봐도 느끼지만 내 손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예쁘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죠?"
"허허. 게임 속에선 서로 바빴으니 그렇겠지."
"치, 할아버지는 귓속말을 너무 늦게 보신다니까."
사실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미도에게 귓속말이 엄청 많이 왔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고, 만나자는 손녀의 말도 부담스러웠다.
지금 내가 그녀를 만나봤자,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불을 지피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아니면 요리를 하거나.
…그래서 떠올린 것이 답장을 느리게 하는 것이었지.
사실 나는 답장을 일부러 느리게 했다.
게임엔 영 젬병이라 귓속말이 도착한지도 몰랐다는 것처럼.
그러자 처음엔 자주 오던 미도의 귓속말도 점점 줄어들었다.
뭐, 아무리 귓속말을 보내도 늦게 보니 미도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러 가지로 바쁜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왔냐."
앞에서 백무열이 팔짱을 낀 채 걸어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흑단나무 목검이 걸려있다.
꽃이 또 시들었군.
도대체 저건 왜 붙여놓은 게야.
"그래. 왔다."
"야, 안 그래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담…."
"할아버지! 나 무열이 할아버지한테 검술 배울래요!"
"으응?"
별안간 미도가 백무열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백무열은 피식 웃으며 손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우자는 것.
하지만 그 전에 이것부터 마무리 지어야겠다.
"검술을 배우겠다고?"
"네. 무열이 할아버지가 저한테 재능이 있다구 그랬어요. 저 짱이죠?!"
"허허. 우리 미도가 최고지. 암 그렇고말고."
"역시 할아버지 최고! 허락해 주실 거죠?"
"으음…."
미도가 밑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염없이 발사했다.
하마터면 당장 해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끄응. 일단은 무열이 녀석이랑 대화를 좀 해봐야겠군.
"무열이와 얘기를 좀 나눠보마."
"알겠어요. 꼭 허락해주셔야 해요?"
"허허."
나는 그저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미도는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나는 곧장 무열이 녀석에게 다가갔다.
"가자. 담배 태우러."
* * *
포트렌의 남서쪽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저택.
꽤 오래되어 보이는 이 저택은 아렌의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저택이다.
그 역사가 100년이 넘어 아마 초창기 포트렌이 지어지던 때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금수저인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규모는 많이 작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번 돈으로 남몰래 누군가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마을이기도 하고, 또는 어떤 단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아렌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모여 방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아렌 공. 저항군의 새로운 거주지가 필요합니다."
"음, 이젠 포트렌에 거주지를 두기 어려운 지경입니까?"
"그렇소. 현재 에이단의 사람들이 조직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소. 우리를 잡으면 막대한 현상금은 물론 귀족의 지위까지 내리겠다더군. 그동안 우리가 거주지를 삼았던 곳은 몽땅 에이단의 첩자들이 가득하오. 이젠 더 이상 어디에서 저항군을 길러야 할지…."
"으음…."
아렌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수심에 잠겼다.
지금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포트렌의 체제에 반대하는 저항 조직 '칼슈타인'의 수장 레슬리였다.
그는 채 100명도 되지 않는 저항군들을 이용해 각종 귀족들의 돈과 귀중품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파르타 공국 출신의 명사수로 저항군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치곤 했다.
물론, 몰래 총을 들여오는 것은 아렌의 입장에선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우선 제가 마땅한 곳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그럽시다."
그 말과 동시에 아렌의 집사인 알프레드가 종이에 적힌 안건을 읽었다.
"으음, 다음 안건은 옆에 계신 조셉 공께서 주신 정보입니다. 현재 열리고 있는 콜로세움 경기의 우승 상품이 '스타 프루츠'라고 합니다."
그 말에 아렌을 포함한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레슬리는 그저 약간의 미간만 찌푸릴 뿐.
"스타 프루츠라니. 확실한 거요?"
"믿을 수 없군. 정말 그 귀한 것을 상품으로 내놓다니."
"조셉 공 말 좀 해보시오."
마침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던 조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사실입니다. 저희 아르고스의 정보에 따르면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
"그것이 무엇이오."
"카이단이 어쩌면 가짜를 내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그 귀한 걸 돈 받고 파는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내놓을 리가 없지."
"역시 에이단 가문의 놈들은 영악하기 그지없군."
"그들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군요."
아렌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마침 의자를 뒤로한 채 팔짱을 끼던 레슬리가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조셉 공께선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진의가 무엇이오."
"진짜 스타 프루츠를 우리 쪽에서 훔쳤으면 합니다."
"우리가…?"
조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레슬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의 조셉이 그것을 훔치자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에 모인 인물들 중 불사의 인간인 사람은 조셉 한 명 뿐.
레슬리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그대가 먹을 생각이오…?"
조셉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리니, 다른 귀족들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봐주는 것은 가장 상석에 앉은 아렌밖에 없었다.
마침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의심을 거두시지요. 그동안 조셉 공이 저희를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렌 공. 그동안 아르고스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 않소. 이곳은 본디 수장들이 모이는 자리. 하지만 조셉 공은 아르고스에서 고작 말단의 번호를 가진 자요. 도대체 이런 비밀스러운 자들을 어떻게 믿고…."
그 말에 조셉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전 비록 아르고스에서 말단의 번호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희 조직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비록 제가 왔지만,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아르고스의 수장께서 말씀한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렌은 조셉을 보며, 처음 그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때는 바야흐로 2년 전 어느 날 밤.
잠든 그의 침상에 한 도둑이 찾아왔다.
그는 바로 조셉.
그가 말하길 아르고스 수장의 명을 받고 왔다고 했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돈(Money).
'수장의 정체가 궁금하긴 한데….'
그 당시 아르고스는 굉장히 작은 정보조직이었다.
하지만 조셉이 수장의 명을 받고 자신들을 지원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고, 마침 저항군을 지원해주고 있던 자신은 정보 수집 활동에 필요한 돈을 대는 대신 무상으로 아르고스에서 정보를 받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수장을 보지 못했다.
오직 철저한 정보 수집을 위해선 비밀 유지가 필요하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저희 수장을 포함한 아르고스 전원은 그때 도움을 주셨던 아렌 공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진심을 왜곡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셉이 공손하지만,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아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들 그만하도록 합시다. 사실 수장이 와도 달라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조셉 공이 아르고스의 수장에게 얘기를 할 텐데."
"끙."
"그렇긴 하죠."
"알겠습니다."
"미안하오. 조셉 공."
그제야 조셉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래도 아직 의심을 풀지 않았는지 레슬리가 날카로운 눈매를 하며 물었다.
안대를 찬 반대쪽 눈이 내뿜는 기세가 더욱 고강해졌다.
"조셉 공은 스타 프루츠를 훔쳐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제 생각은…."
* * *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아까 미도의 검술에 관한 것은 결과적으론 허락해버렸다.
사실 재능이 있다는데 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도 했다.
무열이 놈이라면 그래도 꽤 대단한 검술 선생이니까.
사실 미도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배웠을 것이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묵사발이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모닥불에 모여 앉아 쥬얼 매머드의 '보석 고기'를 구워 먹었다.
아까 일행들이 쥬얼 매머드를 잡았을 때 내가 식재료를 채취한 덕분이었다.
지킬과 바로크도 이어서 말했다.
"훌륭하군요. 오랜만에 사람다운 음식을 먹습니다."
"바로크…. 맛있다."
묵찌빠 삼형제가 체면도 잊은 채 손으로 쥐고 보석 고기를 뜯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시인 같아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맛있다며 감탄 섞인 말을 했다.
"으응, 마이떠(?)."
입안에 삼키지도 않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미도.
손녀가 맛있다니, 내 기분이 다 좋다.
그래도 날씨 요리술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사실 보석 고기는 육류들 중에서도 꽤 최상급에 속하는 식재료다.
원래는 알렉서스가 최초로 알아낸 것이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이렇게 요리를 하게 됐다.
태양의 레시피로 요리하면 더 맛있는데 그건 좀 아쉽다.
"춘택이 할아버지는 늘 이런 요리를 드세요?"
무열이의 손자 백성찬이 보석 고기를 뜯으며 물었다.
그의 입도 역시나 보석 고기를 오물거리고 있다.
"허허. 그렇지. 아무래도 요리사니깐 말이다."
"와, 부럽다. 우린 며칠째 전투식량만 먹었는데…. 이곳에서 제대로 식사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그의 말에 일행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열이가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굴리고 굴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옆에 앉은 백무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 녀석은 어디 갔냐?"
"누구?"
"김기태인가."
"아, 걔 요즘 연애하느라 바쁘다."
"…청춘이로군."
그 말에 보석 고기를 삼킨 미도가 볼을 한가득 부풀렸다.
그녀가 제법 우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힝, 나도 연애하고 싶다."
"누나. 남자친구 없어요?"
백성찬의 물음에 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모태솔로야."
"헐, 완전 의왼데."
"나도 의외야. 도대체 왜 남자들은 날 좋아하지 않는 걸까."
"뭐, 주변에 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인기야 많지. 근데 내 남자는 없잖아."
사실 미도의 인기가 제법 높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이거 혹시 나 때문인가….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온다.
에이, 아니겠지.
"금방 생길 거예요. 이카루스 길드라면서요. 거기 잘생긴 형들 많던데?"
"한 명 관심 있는 사람이 있긴 한데…."
"오오, 누구예요?!"
백성찬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궁금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
그 호랑말코 같은 놈들 중에 미도가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니, 새삼 궁금해졌다.
아니, 몹시도 궁금해졌다.
누구인진 몰라도 그놈은 죽었다.
"몰라. 있다가 올 거야."
"있다가 온다구요?"
"응, 내가 여기로 불렀어."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초감각이 있는 나만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그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달빛 아래 언덕을 넘어오는 세 남자.
그들은 바로 김현우, 박태현, 은정혁이었다.
내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과연 저 중에 어떤 놈을 죽여야 할까 싶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