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86화
제186화
깊고 어두운 공동.
나는 아렌에게 '사라의 편지'라는 것을 전해주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렌은 이것을 어디서 얻었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고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다.
"…그랬군요."
아렌의 얼굴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수심에 잠겨있었다.
아무래도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무언가 사연이 있는 편지가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뿐.
"혹시 안의 내용을 보셨습니까…?"
"아니, 보지 못했네. 아무래도 주인이 먼저 보는 게 예의 같아서 말이야. 편지봉투가 뜯기지 않을 걸 보면 알 걸세."
"아, 의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허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그는 겉면에 적힌 글을 착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 글귀를 기억한다.
"항상 빛나던 천사는 나의 기쁨이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마침 아렌이 편지 겉면에 적힌 글을 소리 내며 읽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이건 죽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집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음."
역시 '사라'는 눈앞에 있는 아렌과 관련이 있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죽은 아내였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녀는 천사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해석했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사라에게는 선입견이라는 벽이 없었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모두가 평등한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었지요."
"…자네가 반할 만한 여인이군."
"하하.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먼저 고백을 했었습니다."
아렌이 애써 웃음 지었다.
그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성함을 못 여쭤봤군요."
"잭슨이라고 하네."
"…그렇군요. 잭슨 님. 이왕 편지를 전해주셨으니, 저와 함께 어딘가로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지금 그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신뢰가 가는 눈빛이었다.
아까 보았던 태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건 위험한 곳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겠네."
"감사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아렌은 곧장 자신의 지정 귀환석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연결하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까 봤던 3급 마도 공학인 '비밀 통신' 기능인 모양이다.
"어, 나야. 손님들께 급한 일이 생겨서 2시간 뒤에 보자고 전해줘. 회의도 그때로 미뤄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래. 부탁해."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당장 옆에 있는 아렌의 대화 말고는 전화를 받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그 목소리조차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좋은 아이템이었군.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가시죠."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조금 더 걸으니 큰 갈림길이 나왔다.
이곳은 지하 미로처럼 되어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나온 곳은 조그만 철문이 있는 곳이었다.
아렌이 벽돌 여기저기를 누르자 철문이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문을 열자 나타난 곳은 예상 밖의 장소였다.
"여긴…?"
"조그만 오두막입니다. 생전 아내와 잠깐이지만 함께 살았던 집이지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가끔 제가 들르기는 하지요."
생각보다 오두막은 아기자기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해 보였다.
공중에 매달린 모빌들이 그래 보였고, 손수 만든 것처럼 보이는 곰 인형이 그래 보였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것치고는 관리가 제법 잘 되어있었다.
"먼지가 없군."
"이곳은 늘 제가 올 때마다 청소를 하곤 합니다. 제겐 정말 추억이 많은 장소라서요."
그는 약간의 그리움이 묻어나는 얼굴을 내비쳤다.
아렌은 망설이지 않고,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또 예상 밖의 장소였다.
-항상 빛나던 천사는 나의 기쁨이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묘비에 적힌 글귀는 익숙했다.
나는 한눈에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렌이 내게 말했다.
"혹시 아까 만든 꽃다발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까 계단을 내려가기 전, 엘리스는 꽃다발을 건네주었었다.
그때는 왜 주는지 몰라서 인벤토리에 넣어놨었는데.
이젠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여기 있네."
꽃다발을 받은 아렌은 익숙하게 무덤의 근처에 있던 시든 꽃들을 정리했다.
그리곤 아까 내가 만든 꽃다발을 새로 무덤 위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 시든 꽃들도 같은 꽃인 듯 보였다.
"사라. 나왔어. 이번엔 좀 늦게 왔지?"
이어지는 아렌의 독백.
그는 사라의 무덤 앞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찡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아내에게 내가 하던 말들과 비슷한 것들이 많았으니까.
"큼…."
오랜만에 코끝이 찡해지네.
긴 독백이 끝났을 때 내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주르륵 흘러내린 콧물이 입안으로 들어가 짠맛이 느껴졌다.
나는 아렌이 돌아보기 전에 재빨리 얼굴을 닦았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셨습니까…?"
"아니, 안 울었네."
"아, 예. 하하…."
어색하게 웃는 것이 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제길. 이미 들킨 모양이네.
"큼. 그나저나 이곳엔 왜 오자고 한 건가…?"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민망해서 말을 돌린 이유가 더 컸다.
"아, 그렇죠. 제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하…."
그러더니 아렌은 무덤에 놓여있던 얇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의 제목은 '세인트 헬레나'. 책을 보는 아렌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것은 아까 말했던 생전 아내가 좋아하던 시집입니다. 보시다시피 제목은 '세인트 헬레나'라고 하지요."
책은 하늘색 겉표지 위에 화려한 금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끄트머리가 낡은 것이 제법 오래된 것 같았다.
"근데 그걸 갑자기 왜…?"
"제목이 익숙하지 않습니까?"
"제목…?"
나는 다시 한번 시선을 옮기며 제목을 곱씹어 보았다.
세인트 헬레나. 세인트 헬레나…. 세인트…. 잠깐만.
"…헬레나?"
아렌이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딸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잠시 뒤, 나는 아렌과 함께 지정 귀환석을 사용해 그의 저택 앞에 나타났다.
그는 싱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나 또한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은 포트렌의 번화가.
나는 지금 상념에 잠겨있다.
아까 아렌이 해주었던 엄청난 이야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군."
그가 내게 해준 이야기는 많은 것이 아니었다.
헬레나의 출생에 관한 비밀.
헬레나는 아렌과 사라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렌은 금수저를 가진 고위급 귀족이었고, 사라는 쓰레기촌 출신이자, '칼슈타인'이라는 저항군의 수장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해 헬레나를 낳았지만 행복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렌의 아버지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당시 두 사람은 헬레나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 헬레나의 아버지 노릇을 하는 '아이노'는 본디 아렌의 가문에서 오랜 수발을 들던 믿음직한 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헬레나는 그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른 채 커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귀족들로부터 끝없이 견제를 받는 자신에게서 딸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참 복잡하네."
헬레나가 에이단과 정략결혼을 했을 때도, 아렌은 비밀리에 저항군을 시켜 강제로 데려오려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헬레나가 극구 만류했고, 아렌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에이단에게 보내야 했다.
물론, 그때도 헬레나는 아렌이 친부란 사실을 몰랐다.
결국. 아렌은 에이단의 하인 하나를 매수해 스파이로 심어 놓았고, 에이단이 헬레나를 겁탈하려 한다면 바로 죽일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론 그럴 일 자체가 없었지만.
"…흐음."
그리고 아렌은 내게 참으로 어려운 부탁을 했다.
나는 말없이 퀘스트 창을 열었다.
[헬레나의 출생의 비밀]
등급: C
현재 메테우스 마을에 거주 중인 헬레나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에이단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아렌'의 딸.
어머니는 포트렌의 비밀 저항군 단체인 '칼슈타인'의 수장이었다.
그녀에게 친부와 친모에 대한 사실을 알려주고, 사라의 무덤 앞으로 데려오도록 하자.
아렌은 헬레나에게 진실을 고백하기에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 중이다.
-완료 조건: 헬레나가 사라의 무덤 앞에 도착 0/1
-보상: 아렌의 아낌없는 신뢰와 지원.
"흐음. 어떻게 얘기를 한다."
사실 이런 설득에 있어서, 나는 조금 약한 면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헬레나가 알았을 때, 다가올 후폭풍을 과연 그녀가 견딜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물론, 퀘스트 보상이 좋아서 받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 좀 더 생각해봐야겠군."
아렌은 내게 많은 시간을 주었다.
언제든 기다릴 테니 준비가 되면 연락을 먼저 달라고 했었다.
기한이 없다는 건 좋았지만, 그래서 더욱 복잡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얘기를 해야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지가 관건이었으니까.
"끙, 직접 얘기하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고 그런담…."
그러던 중 귓속말이 도착했다.
- 백무열: 바쁘냐.
"이놈이 또 왜 이러지. 담배 땡겨서 그러는가."
- 잭슨: 아니, 안 바쁘다. 왜.
- 백무열: 여기 지금 미도 와 있잖아.
- 잭슨: 그래. 아까 말했었지.
아까 전 백무열은 내게 미도와 함께 사냥할 것이라고 했었다.
물론, 나도 이따가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가면을 벗고, 하얀 요리사 복을 입은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아까 전 미도가 내게 이곳으로 오라고 귓속말을 했었다.
- 백무열: 내가 미도를 좀 가르쳐 볼까 하는데.
- 잭슨: 엥?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열이 이 녀석이 누군가를 가르치겠다고 쉽게 말할 녀석이 아닌데….
"하긴, 저번에 봤던 검술이 예사롭지 않긴 했었지…. 설마 그 정도였다고?"
손자인 백성찬 정도의 재능이 아니면 백무열은 만족을 못 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미도에게 그에 필적할만한 재능이 있다는 건데.
덜컥 걱정이 먼저 들었다.
무열이 녀석은 절대 내 손녀라고 대충 가르칠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과연 그 혹독한 수련을 미도가 견뎌낼 수 있을지가 나는 걱정이었다.
- 잭슨: 일단 가서 얘기하자.
나는 일행들이 있다는 포트렌의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장 안쪽에 있는 기다란 실을 잡아당겼고, 내 모습은 어느새 평범한 요리사의 복장이 되어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