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85화
제185화
꽤 오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아렌을 만나자마자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에이단이 헬레나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깊은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새삼 그가 헬레나와 무슨 관계인지가 궁금해진다.
하지만 지금 아렌은 에이단이 쓰레기촌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역시 그날 있었던 쓰레기촌의 화재는 그의 짓이었군요."
"그렇네. 그 녀석이 쓰레기촌을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지금 쓰레기촌의 주민들은 내가 촌장으로 있는 마을에 임시로 정착 중이네. 나는 헬레나의 부탁으로 이곳에 왔지."
"하아. 전 그것도 모르고 속으로 무슨 일인지 몰라 끙끙 앓기만 했군요. 이렇게 직접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도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어."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꽤 비싸 보이는 옷을 보면, 분명 포트렌의 귀족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겸손하고, 심성이 착한 편이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쓰레기촌의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망할 에이단 놈이 저번에 보여준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까.
"아닙니다. 주민들을 받아주시다니,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닐세. 오히려 이젠 내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 그들이 마을의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하고 있다더군."
수정이의 말에 따르면 정말 경이적인 속도로 마을이 발전 중이라고 한다.
순식간에 판잣집이 들어섰고, 유저들의 입주를 받았다고 했다.
아마 돌아오면 꽤 많이 놀랄 것이라고 했었다.
"하하하. 하긴, 그곳 출신 사람들이 모두 마을에 정착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포트렌의 각종 건물들은 모두 그분들의 손으로 지었습니다."
"호오."
이거 점점 더 기대가 되는데.
포트렌의 건물들은 엄청 화려하고 거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그렇게 지으면 튼튼하지 않을 수 있는데, 포트렌의 건물은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이참에 시간 나면 메테우스에나 좀 들러볼까.
마침 수정이에게 무열이 녀석한테 줄 꽃집도 하나 만들어 놓으라고 부탁해놨었다.
어떻게 됐나 모르겠네.
"이거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머무는 곳으로 초대를 하고 싶지만, 지금 집에 손님이 와 있는 상황이라서요. 다음번에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
나는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 정보창을 열었다.
[포트렌 귀족 전용 - 지정 귀환석]
등급: 영웅
지정된 장소를 귀환 위치로 정할 수 있는 최고급 귀환석. 포트렌의 상위권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소유물이다. 파르타 공국의 마도 공학이 일부 깃들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마력이 충전 된다. 귀환 장소를 바꿀 경우, 최소 50%의 마력이 필요하다.
-현재 마력 충전률 100%,
-100% 달성 시 '귀환' 마법 사용 가능.
-지정된 귀환 장소: 포트렌 귀족 아렌의 저택 앞.
-3급 마도 공학: '비밀 통신' 사용 가능.
"이건…."
"금수저 이상의 귀족들만 들고 다닐 수 있는 지정 귀환석입니다. 제가 비밀리에 파르타 공국에 들러 비밀 통신 기능이 달린 마도 공학을 부여했지요. 저한텐 하나가 더 있으니 그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뒤를 보시면 버튼이 있는데, 그걸 누르시면 전화번호부가 뜰 겁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나는 곧장 귀환석의 뒷면을 살폈다.
그곳엔 아렌이 말한 대로 조그만 버튼이 있었고, 옆에는 이상한 번호와 작대기가 여러 개 있었다.
이거 혹시 전화번호인가.
곧장 버튼을 눌렀다.
-전화번호부 등재 목록
1. 아렌
2. 없음
3. 없음
……
아무래도 나와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해 일부로 새 걸 하나 구해온 모양이다.
번호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보면.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고맙구만. 나한텐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될 것 같네."
이건 사실이었다.
기실 지금 아렌이 건네준 귀환석은 저번에 에드워드 꼬마가 내게 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윈디아의 귀환석은 횟수의 제한이 있지만 이건 횟수의 제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거기다가 귀환 장소를 새로 지정할 수 있고, 비밀 통신 기능이 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아렌이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다시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아, 잠깐. 이보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몸을 돌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나는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지금 내 손엔 '사라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 * *
포트렌의 남쪽에 위치한 늑대의 평원 깊숙한 곳.
웨어울프의 터전이라고 불리는 늑대의 숲에서 최불룡은 무아지경으로 웨어울프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주변의 들판은 이미 하얀 불꽃에 잠식되어 까만 재만이 남았고, 그는 불타는 대검을 높이 치켜들어 마지막 웨어울프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제길! 제길!"
그렇게 화풀이 비슷한 찌르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최불룡은 터전에 남은 마지막 웨어울프가 사라지자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는 방금 전 웨어울프가 살던 터전 하나를 멸망시켰다.
오늘의 날씨는 그 어떤 날보다 좋았지만, 지금 그의 몸과 마음은 먹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보통 먹구름이 아니라 비와 바람을 동반한 구름.
지금 그는 폭발할 것 같은 폭풍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후우. 진짜 인생 되는 게 없네."
대검을 뽑아 등에 있는 검집에 꽂은 그는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늑대의 발톱, 늑대의 털가죽, 늑대의 이빨….
짜증나게도 쓸만한 장비는 하나도 안 떨어트렸다.
그렇게 갖가지 신세 한탄을 하던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있었던 16강전 이후로 최불룡은 에이단에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얻었다.
다행히 김제복이 살아서 담배 사업은 아직은 차질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경기에서 그 영감탱이를 이기지 못한다면 탈락이라고.
'어떻게 해야 그 영감탱이를 이길 수 있을까.'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의 경기를 지켜봤지만, 영감탱이는 김제복보다 훨씬 강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한 수 접어주고 있다는 게 보여줄 정도.
"아니, 대체 정체가 뭐길래 김제복이 그렇게 쳐발리는 거냐고."
물론, 레벨의 차이와 장비의 차이란 것이 있다.
아마 직업 간의 상성이나 이런 문제도 있었겠지.
하지만 김제복은 순수한 컨트롤 실력으로 졌다.
그 녀석이 단검으로 붙어서 지는 것은 최불룡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 어디 스타피스라도 짠하고 나타나면 좋으련만."
최불룡은 웨어울프의 터전을 여기저기 뒤졌다.
혹시나 쓸만한 것이 있는가 싶어서.
하지만 역시나 그런 것은 없었다.
이미 아크스타가 오픈한지 어언 1년. 많은 유저들이 이곳을 들락날락했을 테니.
이런 곳에서 스타피스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아마 구하려면 좀 더 레벨을 올려 상위의 사냥터로 가야 하리라.
"되는 일이 없구만. 되는 일이 없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삼촌의 손에서 컸다.
하지만 키워주는 삼촌은 술주정뱅이에 손버릇이 고약한 사람.
아직 어렸던 그에게 가정폭력은 억지로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바로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돈을 벌어 독립을 해, 삼촌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후우…."
그는 익숙하게 망우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들판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생각이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걷기를 30분.
최불룡은 한 마을의 입구를 발견하고는 멈추었다.
어느새 걷다 보니 이곳까지 와버렸다.
아마 요즘 커뮤니티에서 제일 핫하다고 하는 '메테우스'인가 하는 마을.
그는 이곳의 촌장으로 있는 자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쓰레기촌의 주민들을 데려갈 만한 사람은 그 영감탱이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즘 TV에서 떠들고 있는 다크 울프인가 하는 사람의 정체도 아마….
"후우. 진짜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할 수만 있다면 세계 3대 미스터리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영감탱이가 '다크 울프'고 이곳의 촌장이라니.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한테 협박을 받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영감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건가."
삼국지에 보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다.
어쩌면 자신은 그 영감탱이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거겠지."
최불룡은 마음을 굳혔다.
그는 곧장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커뮤니티에서도 제법 유명한 실피드 기사단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저번에 자신을 끔찍하게 난자했던 그 기사와 같지만 살짝 다른 복장.
아마 그는 실피드 기사단에서 꽤 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광장을 지나 상점가로 들어섰다.
"방금 딴 맛있는 과일 팝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각종 무기와 방어구들 수리해드립니다! 언제든지 맡겨주세요!"
"잡템과 장비들 그리고 스킬북들 팝니다~!"
"자, 한 번 둘러보세요. 둘러봐~!"
"길드원 모집합니다~!"
커뮤니티에서 메테우스는 연신 화제나 다름없었다.
이제 갓 지어진 마을이라 그런지 유저들의 입장에서도 일반적인 마을에 비해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이곳 메테우스는 유저들에게 대여비를 받고 개인 공간을 빌려주는 식으로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저들의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최근 하위 길드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아지트로 쓰고 있었는데, 다른 마을에 비하면 훨씬 싼 값 때문에 그들도 만족스럽다는 후기들이 올라오곤 했다.
또 메테우스가 발전할수록 나중에 팔 때도 유리하니 재테크나 마찬가지였다.
"…와씨. 겁나 부럽네. 아주 떼돈을 벌겠구만."
영감탱이가 말년에 꽃을 피웠다.
저 멀리 보니 빠른 속도로 건물을 짓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쓰레기촌의 주민들.
자신이 위협을 했던 이들이 저토록 대단한 NPC였다는 것을 깨달은 최불룡은 막상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하아, 인생…."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대로 움직인 그는 어떤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은 이제 막 연 것으로 보이는 꽃집이었다.
최불룡은 옆에 있는 전단지 같은 것을 읽었다.
-일손이 부족해요. 새로 오픈 예정인 꽃집인데, 절 도와 오픈을 도와주실 힘 좋은 남자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지원 바랄게요.
'뭐야, 이 아무도 지원 안 할 것 같은 전단지는….'
엉성해도 너무 엉성하다.
구하는 사람의 이름도 없었고, 일당도 적혀 있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적은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 최불룡은 마침 꽃집에서 나오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
두근두근 대는 심장.
그곳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30년을 넘게 살면서 이런 감정을 가진 것은 최불룡의 입장에서도 처음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NPC에게.
"엇, 어떻게 오셨어요?"
상냥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물음에 최불룡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귓가를 울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심장아 나대지 말아달라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그렇게 반복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 일손…. 아, 아니 꽃집. 아니, 일하러 왔는데요."
사랑은 늘 이렇게 교통사고처럼 찾아온다.
(다음 편에서 계속)